◇처음 시작된 사회적 대화=97년 외환위기와 함께 시작된 국민의 정부는 ‘사회통합’으로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노사정위원회는 그 중심축이었다. 98년 1월 출범한 노사정위원장에 김 전 대통령의 최측근인 한광옥씨가 임명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광옥씨는 국민의 정부 초대 비서실장을 역임한 중량급 인사였다. 사회적 대화에 대한 대통령의 의지가 그만큼 확고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노사정위 출범은 물론 위기 극복이라는 비상상황이 전제되긴 했지만, 그동안 배제하고 억눌렀던 노동계가 정부의 정책파트너로 거듭났다는 의미를 가진다. 노사정위는 노동계의 대폭적인 양보를 얻어 냈다. 지난 정부가 수차례 시도를 거듭하고도 법제화하지 못했던 정리해고제 도입이나 노동자 파견제도 시행이 그 골자였다. 사회안전망과 사회보장제도 확충, 공무원노조 결성권과 전교조 합법화 같은 굵직한 합의도 노사정위에서 이뤄졌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에 김대모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장은 “우리나라에 사회적 대화의 기초를 놓았던 분”이라며 애도를 표했다.
◇실업극복을 위한 적극적 고용대책 추진=“할 수 있는 제도는 모두 해 봤다.” 국민의 정부 시절 청와대에서 실업대책 실무자로 참여했던 한 정부 관계자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그때는 노동부가 대통령에게 직접 고용대책을 보고할 정도로 노동부의 위상이 높았던 시기였다.
실제로 지난해 말부터 시작된 미국발 경제위기 대책으로 이명박 정부가 내놓은 고용대책은 국민의 정부 시절에 실험했던 내용이 그대로 반복됐다. 공공근로제도는 희망근로프로젝트로 이름만 바꿔 시행되고 있고, 청년인턴제를 비롯해 각종 고용대책도 마찬가지로 적용되고 있다.
워크넷(Work-net)으로 대표되는 국가고용정책이 본격화된 것도 김 전 대통령의 업적으로 꼽힌다. 전직지원프로그램제도를 도입하고 고용안정센터(현 고용지원센터)를 증설했다. 사회안전망이라는 용어가 활성화된 것도 그 즈음이다. 사회보험제도 확충이 잇따랐다. 고용보험 적용범위가 전체 기업으로 확대됐고, 실업급여 최저급여액이 상향 조정됐다. 임금채권보장제도와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역시 국민의 정부가 도입했다.
◇노동유연화로 비정규직 증가=하지만 4대 부문 구조조정과 함께 추진된 노동유연화는 후세대에 부담을 안겼다. 단기 실업대책은 급격한 비정규직의 증가를 낳았다. 일괄적으로 10%가 해고된 공공분야에서는 그만큼의 자리가 비정규직으로 채워졌다.
급기야 실업대책이 마무리된 99년에는 임시일용직 비중이 51.3%로 치솟았고, 2000년에는 그 비중이 52.1%로 높아졌다. 단기적인 일자리 대응전략에 치중해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이로 인해 사회 양극화가 심화되는 등 노동시장 안에 구조적인 문제를 낳았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