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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 40년, 박인상 회고록 ⑦[제3부] 노동자가 되다 [제1편]열여섯, 나의 꿈
나이를 먹을수록 아이들의 꿈은 작아진다. 어른들이 가르쳐주는 세상의 비밀들은 아이들을 겁먹게 하는 것이다.
사천 용현면 신평마을 우리 동네 꼬맹이들이 제일 먼저 품었던 꿈은 이순신 장군이 되는 것이었다. 초등학생이 되어서는 돈을 많이 벌어 부모님에게 논을 사 드리고 싶어 했다.

내 나이 열여섯, 그때 나의 꿈은 공짜로 고등학교에 다니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회를 놓쳐 버렸다. 그럴수록 더 작아지는 나의 꿈…. 많이 답답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십대 때 겪은 ‘실패’를 통해 어렴풋이 깨달은 것은 ‘절망’·‘분노’보다는 ‘분발’·‘승복’이 이롭다는 것이었다. 대한민국 최초로 긴급조정권이 발동된 대한조선공사 파업투쟁으로 구속됐을 때도, 개혁을 꿈꾸며 금속노련과 한국노총 위원장에 출마했다 고배를 마셨을 때도 느긋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의 경험 덕분인 것 같다.

나는 기차를 노려보고 있었다.
진주와 삼천포를 잇는 진삼선이다. 동란 중이던 1953년, 진주와 사천에 있던 군용비행장을 연결한 기차다. 제법 많은 학생들이 그 기차를 타고 진주로 통학을 했다.
나무 하러 와룡산에 오르면 들판을 가로질러 진주로 달리는 기차가 유난히 더 눈에 들어왔다. 눈을 돌려봤자 보이는 것은 답답할 만큼 태연하게 똬리를 틀고 있는 산과 들, 그리고 바다뿐이니, 내 눈은 점점 더 기차에 고정되고 만다.

영어단어장을 든 나무꾼

기차가 어느덧 시야에서 멀어지고 있다. 나는 그때까지도 눈을 돌리지 못하고 뚫어져라 기차를 쫓고 있다. 그러노라면 어느새 진주사범 교복을 입은 내가 ‘칙칙폭폭’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달리는 기차에 타고 있는 것이었다.

“야, 인상아, 인마. 뭔 생각을 그리 열심히 하고 있노?”
“….”
“진주사범에 떨어지더만, 야가 아주 넋이 나가삣네”

“고만 하이소.”
와룡산에 함께 올라 나무를 하던 병수 형은 안다. 열여섯 소년에게 이곳이 얼마나 답답한 곳인지. 나보다 한 살 위인 병수 형은 외아들이라 부모님에게 붙들려 꼼짝없이 농사를 지어야 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나는 아버지와 큰 형님을 따라 농사를 지어야 했는데, 한 마을에 사는 병수 형, 해명 형과 함께 땔감으로 쓸 나무를 구하러 와룡산에 자주 올랐다. 실은 나에게도 기회는 있었다. 중학교 3학년이 되자 아버님께서는 진주사범학교라면 가도 된다고 말씀하셨다.

‘학비는 줄 수 없지만 상급학교로 진학해도 된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말씀은 ‘농사일은 면제’라는 뜻과 마찬가지였다.
이것만 해도 엄청난 행운이었다. 농사일 하지 않고 공부한다고 책을 빼앗아 불쏘시개로 태워버리던 때였다.

1955년, 온 나라를 할퀴어놓은 동란의 포연은 가셨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녹지 않고 있었다. 농촌에는 일손을 채울 장정들의 숫자도 부족했다. 무엇보다 도시로 자식을 내보내면 무슨 물이 들어 돌아올지 모를 일이었다.

학교 성적은 우등상을 받을 만큼 괜찮았다. 입학시험 준비도 차근차근 했다.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벌써 선생님이라도 된 기분으로 합격자 명단을 적은 벽보 앞에 섰는데, 내 이름 석 자가 없는 것이다. 가슴이 쿵 내려앉더니 눈앞이 깜깜해졌다. 진주사범이 명문이라지만 낙방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진주사범학교는 3년만 공부하면 바로 초등학교 교사가 됐고, 학비를 내지 않아도 되는 건 물론이고 다달이 장학금까지 나왔으니 경상남도의 가난한 집 아이들에게는 꿈의 학교였다. 그 해 경쟁률은 13.5대1이었다.

“고만 내려가자.”
나는 대답 대신 ‘끙’ 하며 지게를 짊어졌다. 신참 나무꾼이던 나는 기우뚱거리다 손에 들고 있던 영어 단어장을 떨어뜨렸다.

“어!?”
형들이 흘낏 보고는 놀란 눈치다. 사범학교에 떨어지고도 미련을 못 버려 영어 단어장을 들고 다니며 외우고 있으니. 그렇다고 재수를 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내게 주어진 길이란 아버님과 형님을 따라 농사를 짓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중학 시절 걸어서 두 시간 걸리는 등하교 길, 손이 얼어붙는 추운 겨울에도 손에서 놓지 않던 영어 단어장이다. 시험에 떨어졌다고 놓아 버려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저 멀리 내가 사는 신평마을에서도 저녁 짓는 연기가 피어오른다.

사천 용현면 신평마을 우리 동네 꼬맹이들이 제일 먼저 품었던 꿈은 이순신 장군이 되는 것이었다. 내가 개혁을 꿈꾸며 금속노련과 한국노총 위원장에 출마했다 고배를 마셨을 때도 느긋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의 경험 덕분인 것 같다. 자료사진=정기훈 기자 ⓒ 매일노동뉴스

9남매의 순둥이 막내

경상남도 사천군 용현면 주문리 신평마을. 사천읍에서 이십리 정도 떨어진 곳이다. 마을 뒤로는 와룡산이 우뚝 서 있다. 와룡산은 788m로 높지는 않지만 산세가 험한 편으로 마을에서 바라보면 꽤 높은 산처럼 보인다. 와룡산에서 우리 마을까지는 십리 길로 산과 마을 사이는 너른 들판이다. 신평 마을의 끝은 사천만이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으로 왜선을 격파했다는 그곳이다.

우리 마을에는 스무 가구 남짓 살았고 모두 농사를 지었다. 다들 한 뼘이라도 자기 땅을 갖고 있었다. 몇몇 아주머니들은 마을 앞 바다에 나가 조개를 캐서 이십오리 떨어져 있는 삼천포 시장으로 들고 나가 팔기도 했다.

우리 집의 조상들이 신평마을에 뿌리를 내린 것은 4백여년 전이다. 마을 근처에 삼천 평이 넘는 선산이 있는데 광해군 때 돌아가셨다는 조상님이 모셔져 있다. 어쩌면 우리 조상님들은 이순신 장군을 따라 왜군과 싸우셨던 게 아닐까.

까마득한 조상님들이 벼슬을 하셨는지는 모르겠다. 할아버님은 농사를 지으셨다고 했고, 아버님(朴官益)도 농사를 지으셨다. 어머님(金未点)의 고향은 사천(당시 행정구역으로는 삼천포) 벽동으로 농사짓는 집안의 딸이셨다.

아버님과 어머님은 9남매(5녀4남)를 두셨다. 나는 막내다. 살림 밑천이라는 큰 딸, 내 큰 누님과는 솔직히 나이 차이가 얼마나 나는지도 모르겠다.

나와 스무 살 차이가 나는 큰 형님 위로 누님 두 분이 계셨고, 아래로 누님 두 분이 계셨다. 다음이 나와 열 살 차이가 나는 작은 형님이 계셨고, 그 아래로 누님이 한 분 더 계셨다. 다섯 살 차이가 나는 셋째 형님이 있다.

누님들의 나이는 기억을 못 하고 형님들의 나이만 기억해서 민망하기 짝이 없으나 옛날 시골에서는 딸들은 이름으로 불리지도 않았고, 나이도 따지지 않았다. ‘큰아’가 처녀티가 나면 혼인을 시켜 남의 집으로 보냈으니까.

나는 구남매의 막내로 순둥이였고, 누님들의 손을 더 탔다고 한다. 우리 집은 논 스무 마지기를 부쳤다. 식구가 많아도 배를 곯지는 않았다. 밭에는 보리·밀·콩을 키웠다. 또 대마와 목화를 심어 집에서 어머님과 누님들이 삼베와 무명을 짰다. 또 바닷가에 돌밭도 갖고 있었다. 돌밭이란 특별한 게 아니라 바닷가에 돌을 쌓아 둔 곳이다. 밀물 때 물이 들어오면 휩쓸려 들어 온 고기들이 썰물 때는 돌에 걸려 나가지 못하는데, 이 때 그물로 고기를 잡아들이는 것이다. 숭어나 멸치들이 걸려들었는데, 내다 팔 만큼은 되지 않았고 부식거리는 됐던 것 같다. 아버님과 어머님은 유교 범절로 자식들을 가르쳤던 것 같다.
‘어른들 공경하고, 동기간에 우애하고, 몸가짐 조심하고, 남에게 나쁘게 대하지 말하고, 남자는 입이 무거워야 되고….’

나는 대처로 나가고 싶었다. 농사짓는 것보다는 공부하는 게 훨씬 더 선택의 기회가 많을 것이라는 사실은 ‘이팔’을 갓 넘긴 내게도 자명한 일이었다. 자료사진=정기훈 기자 ⓒ 매일노동뉴스

다시 얻은 기회

해방이 된 이듬해 면 소재지에 있는 용현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초등학교에서 한글을 공식적으로 배운 첫 세대다. 학교 가는 길은 십리 길. 같은 학교에 다니는 동네 또래는 여섯 명으로 논두렁 밭두렁 사이를 ‘종종종’ 줄 지어 다니느라 먼 줄도 몰랐다.

여름이면 멱을 감고, 겨울이면 불을 놓고. 그래도 겨울은 추웠다. 무명옷을 입고 산바람과 바닷바람을 맞으며 허허벌판을 가로질러 걸어 다녀야 했으니.

초등학교 5학년 때 동란이 일어났다. 내가 살던 마을에는 난리가 터진 지 한 달도 채 못 돼 인민군이 들어 왔다. 인민군 6사단 방호산 부대라고 했다.

서해안으로 내려와 전북과 전남을 거쳐 진주까지 함락을 시켰지만 마산을 지나서 낙동강으로 나아가지 못했던 그 부대다. 인민군이 우리 마을에서 머물렀던 기간은 약 한 달 정도였다. 나 같은 꼬맹이들은 마을회관에 불려가 노래를 배웠다. 어린이야 노래만 불렀지만 어른들은 어디 그랬을까? 난리 통에 우리 집은 그나마 있던 땅도 팔아야 했을 정도로 가세가 폭삭 기울었다. 막내인 나를 고등학교 공부 시킨다는 건 엄두도 못 낼 일이 돼 버렸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한 해를 꼬박 아버님과 큰 형님을 따라 다니며 농사를 지었다. 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 내 마음을 아는 큰 형님이 이곳 저곳을 알아보셨는지 부산에 있는 대한조선공사에 조선기술중학교와 고등학교가 있다고 하셨다.

큰 형님의 친구분으로 이웃 마을에서 자랐던 최근호씨가 대한조선공사 조선부에서 노동자로 일하고 있어서 알게 됐다고 하셨다. 최근호씨에게 조선기술고등학교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주었던 분은 선박부에서 일하셨던 황포 아저씨라고 불렸던 분인데 입학 뒤에도 도움을 많이 주셨다. 조선기술고등학교는 학비를 내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아버님은 국가에서 학비를 대준다니까 반대하지 않으셨다. 어머님은 시골을 벗어나 나가서 부지런히 배우라고 하셨다.

1956년 2월, 신평마을을 떠났다. 큰 형님이 동행을 하셨다. 마을을 떠날 적, 손을 흔들어 주던 병수 형의 눈길이 한참 동안 내 낡은 검정색 신발에 머물러 있었다. 버스 탄다는데 가는 동안 신발이 떨어지지는 않겠지 하는 눈치였다.
“아침은 단단히 챙기 묵었나? 차를 오래 타믄 속이 안 좋다 카던데.”

“행님은 밸 꺼를 다….”
나는 같이 나무하러 다니던 병수 형이나 해명이 형을 남겨 두고 떠나는 게 마음에 걸렸는데, 병수 형은 옷보따리 하나 달랑 들고 객지로 나가는 내가 오히려 측은하게 보였던가 보다. 열일곱 살 먹은 나는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치 날개를 단 기분이었다. 내가 엄청난 ‘학구파’였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땅에 묶여 있고 싶지 않았다. 나는 대처로 나가고 싶었다. 농사짓는 것보다는 공부하는 게 훨씬 더 선택의 기회가 많을 것이라는 사실은 ‘이팔’을 갓 넘긴 내게도 자명한 일이었다.

조선기술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공장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된다는데 내 ‘야망’이 거기에서 멈출 리 없다. 내심 염두에 두고 있던 게 있었다. 도회지로 나가면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나는 그 길을 찾아내고야 말 테다. <계속 이어짐>

박미경 객원기자  labortoday@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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