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 탈출’이라는 주장을 하면 공장은 버려야 할 곳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공장과 직장을 모두 버리고 밖으로 나가자는 말이 아니다. 노동조합이 주목해야 할 활동이 무엇인지를 냉철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는 뜻이다. 임금의 노예, 임금실리만을 추구하는 ‘공장귀신’이 아닌 ‘잠일술 인생’에 대한 전반적인 성찰과 이를 통해 삶의 시간적 재편, 건강권에 대한 새로운 인식, 가족과 사회관계 및 문화적 영역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만들어 가야 한다.
 
그럼 공장은?

‘공장 탈출’이라는 주장을 하면 공장은 버려야 할 곳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치 ‘노동해방’을 아예 노동을 하지 않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과 같다. 노동해방이란 자본에게 노동력을 팔아 생산하고 일부를 임금으로, 나머지 일부를 이윤으로 자본에게 주는 방식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자본가에게 노동력을 파는 것이 아니라 생산수단을 사회적으로 소유하는 상황에서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다.

공장 탈출의 의미도 그렇다. 공장과 직장을 모두 버리고 밖으로 나가자는 말이 아니다. 노동조합이 주목해야 할 활동이 무엇인지를 냉철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는 뜻이다.

공장은 노동자들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며 일상적인 관계를 맺는 곳이다. 모든 조직과 활동이 공장에서 시작된다. 당장 모든 것을 때려치우고 밖으로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공장 안의 현장정치, 현장의 활동은 임금투쟁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핵심은 노동시간을 둘러싼 투쟁이다. 메이데이로 불리는 노동절 또한 하루 8시간 쟁취투쟁을 기념해 시작된 것이다.

잔업·특근으로 지친 노동자들은 지역과 삶터에서 주체가 될 수 없다. 일에 지친 노동자들이 가족과 지역사회에서 원만한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겠는가. 시간에 대한 착취, 건강에 대한 착취, 관계에 대한 착취, 문화에 대한 착취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노동시간을 줄여야 한다.

노동시간을 단축하되 노동강도를 무자비하게 증가시키는 것은 동일한 결과를 낳기 때문에 노동시간에 대한 투쟁과 노동강도에 대한 투쟁은 공장에서 제1의 목표로 진행돼야 할 활동이다. 3더 운동(더 적게, 더 쉽게, 더 안전하게)과 같은 작업장혁신을 통해 공장을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바꾸기 위한 일관된 전략이 필요하다.

임금의 노예, 임금실리만을 추구하는 ‘공장귀신’이 아닌 ‘잠일술 인생’에 대한 전반적인 성찰과 이를 통해 삶의 시간적 재편, 건강권에 대한 새로운 인식, 가족과 사회관계 및 문화적 영역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만들어 가야 한다.
       
임금 탈출

공장 탈출의 본질은 임금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공장에 갇히기 시작한 것은 임금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노동자에게 ‘노동력을 팔아 임금을 받고 사는 것만이 유일한 생존법’이라는 철의 법칙을 강요했다.

노동자는 ‘임금노동’을 위해 공장에 들어가야만 한다. 이는 정리해고의 쓰린 경험으로 말미암아 거역할 수 없는 규율이 됐다. 해고와 실직은 생존만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자격마저 박탈한다. ‘무능한 인간’으로 낙인찍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얼마나 좋은 직장을 갖고 있는가’나 ‘얼마나 많은 연봉을 받는가’를 기준으로 인간의 능력과 가치를 평가할 뿐이다. 어른들은 임금이나 연봉으로 줄을 세우고, 아이들은 일제고사의 성적으로 줄을 세우는 사회다. 돈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에서는 재벌회장 같은 돈 많이 버는 사람이 1등이 된다. 그들이 숱한 비리를 저질렀다고 해도 사회적 위치는 요지부동이다.

‘공장감옥’이라는 프레임의 원천에는 ‘임금노동’이라는 철의 법칙이 자리 잡고 있다. 이 프레임을 가지고 본다면 노동자는 ‘임금을 벌어 오는 현금인출기’이고, 노동조합은 ‘임금을 따 오는’ 자판기가 될 수밖에 없다.

임금노동이라는 철의 법칙은 노동자들을 공장에 얽매이게 함으로써 ‘공장감옥’의 프레임을 한없이 강화한다. 고용이 불안해질수록 해고되기 전에 더 많은 임금을 벌어야 하는 노동자, 월급제와 같은 고정임금이 보장되지 않는 시급제 노동자는 더 많은 임금을 위해 ‘더 많은 잔업·특근’을 해야 한다. 

주 40시간, 주 5일 근무제를 요구해 온 노동운동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실질 노동시간이 줄기는커녕 오히려 늘어났다. 노동운동은 시간단축 투쟁에서도 실패한 것이다.
여기에 ‘일부만 일어서기’가 작용한다. 대공장 정규직이 잔업·특근까지 함으로써 일자리를 독점했기 때문이다.

노동운동은 임금에 사로잡힌 ‘낡은 프레임’을, 노동자들은 ‘낡은 마음의 창’을 벗어야 한다. 경제위기야말로 절대적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는 노동시간을 제도화할 호기이지만, 줄어드는 임금이 이러한 발상을 어렵게 한다.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임금 구좌제’ 도입을 검토할 수 있다. 일이 줄어들어도 임금은 그대로 받고 나중에 일이 늘어날 때 일을 많이 해서 갚는 방식이다. 기업의 외부, 즉 국가의 제도를 통해 일부의 임금을 국가에서 지급하고 나중에 생산이 회복되면 이를 되갚는 방식도 생각할 수 있다.
 

해결책은 기업 외부에서 찾아야 한다. 임금에서 탈출하는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유럽의 경우 사회복지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능력이 없더라도 일정한 생활을 국가가 보장한다. 고령자나 실업자·미성년자에게 주어지는 무상교육을 포함해 상당한 수준의 사회복지를 보장하는 것 자체가 노동하지 않더라도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하는 것이다. 이를 확장한 것이 최근에 소개돼 논의되기 시작한 ‘기본소득제’다. 기본소득제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국가가 모든 국민에게 임금을 주는 제도다. 

어려울 것 같지만 기본소득제와 유사한 제도가 이미 세계 각국에서 적극적으로 검토되고 있다. 한국 정부도 쿠폰이나 현금지급을 추진하는 등 현실의 문제다.

기본소득제가 도입된다면 취업 여부에 상관없이 돈이 지급되기 때문에 임금만이 유일한 생존방법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서는 노동을 해야 한다. 그러나 최소한의 기본생계만 유지돼도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 이와 함께 기업으로부터 받는 임금이 아닌 +α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실업급여 액수와 지급기간의 확대, 교육·의료·주택 등 필수 생계비용의 사회적 부담을 위한 투쟁은 결과적으로 ‘공장 탈출’ ‘임금으로부터의 탈출’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제도는 제한된 자격의 제한된 사람들에게 적용된다. 게다가 각 영역별로 분산돼 있다. 제도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하더라도 해당 조건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

예컨대 최저임금제도가 있지만 최저임금 수준을 받는 사람들에게만 절실한 제도다. 다수의 노동자와 민중이 함께 투쟁하기는 어렵다.

노동운동이 모든 방법을 동원해 ‘개별임금’이 아닌 ‘사회적 임금’을 확대하기 위한 노력을 필사적으로 진행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개별 임금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많이 받는 사람은 ‘기득권자’ ‘배부른 귀족노동자’로 낙인찍힌다. 비정규직이 고임금 정규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도 따지고 보면 개별 임금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프레임에 갇혔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장하는 주체만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달라진, 이미 실패한 정규직 운동의 반복일 뿐이다.

개별 임금이라는 프레임을 벗어날 때 착취는 더 이상 임금의 크기로만 판단되지 않는다. 상대적 고임금에도 불구하고 시간적·문화적·관계적 측면에서 착취받는 모든 노동자를 포함해 생각할 때 비로소 노동자는 하나의 계급이 될 수 있다. 

곳간 털기

“옛날부터 민초들이 심각한 가난에 허덕이면 부자 양반들의 곳간을 털어서 해결했다. 드라마 ‘일지매’도 있지 않나. 재벌과 부자의 곳간을 털어서라도 국민의 생존을 보장하라고 요구해야 한다.”
 
2009년 1월 경제위기를 토론하는 자리에서 나온 한 조합원의 주장이다. 현실은 반대로 가난한 사람들의 곳간을 털어 부자 곳간을 채우는 세상이다. 아직도 MB정권은 종합부동산세 폐기 등 부자 감세 정책을 쓰고 있다. 실업대책 따위는 립서비스에 불과하다.

재벌회사는 엄청난 이익잉여금을 쌓아 두고 있다. 경제가 어려워도 스스로 곳간을 열어 “함께 살자”고 하지 않는다. ‘혼자 살기’만을 하고 있는 세상은 ‘곳간 털이’를 부른다. 그러나 곳간을 털 때도 법도가 있다. 누가 누구의 곳간을 어떻게 털 것인가에 대한 원칙이 없다면 우리는 그냥 상상 속의 일지매를 기다려야 한다.

배를 쫄쫄 굶고 있는 민초들이 곳간을 털면 그것은 민란이고 저항이며 변혁이다. 그럭저럭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곳간을 털면 그것은 범죄다. 당사자들은 억울하겠지만 대공장의 노동자들이 재벌회사에 대해 임금을 더 내놓으라고 하면 욕먹는다. “배부른 투쟁”이라는 비판이 지겨울 정도다.

일지매가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 부자 곳간을 털었다면 좀도둑일 뿐이다. 훔친 재물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썼기 때문에 ‘의적’이 된 것이다.

여론의 몰매를 맞는 현대차 노동자들이 비정규직과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를 위해 현대재벌을 털고자 한다면 그건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오히려 칭찬받을 일이다. 재벌회사에서 임금을 따내 그 일부를 비정규직에게 돌리자는 얘기가 이런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 대공장노조 일부에서 “내 임금은 단 한 푼도 내놓을 수 없다”는 이기적인 발상으로 반대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계급적 원칙을 주장한답시고 “그것은 시혜적 운동이다”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대신하는 대리적인 운동이다”고 비난한다. 과연 이것이 상식일까? 운동권 논리에 매몰돼서는 안 된다. 민초의 감성과 민초의 상식과 서민의 언어로 생각해야 한다.<계속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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