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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 40년, 박인상 회고록 ⑥[제2부]25세의 노동조합 상무 [제3편]노동조합은 나의 노동대학
평지돌출은 없다. 에베레스트산이 높은 이유는 히말라야에 있기 때문이라고 했던가. 40년 전 세상을 뒤흔들었던 대한조선공사 노동조합의 파업 역시 우리만의 힘으로 이룬 기적이 아니었다. 동란 속에 살아남은 ‘올드 프로그레시브(old progressive)’의 지혜와 4월의 월계관을 쓴 ‘영 제너레이션(young generation)’의 패기가 경제개발의 제물이 된 노동자의 분노와 삼위일체가 되었다.

조선공사 노동조합은 닫혀 있지 않았다. 그 열려진 틈 사이로 스며든 지성과 양심이 노동자의 육체에 정신을 불어넣었다. 노동자들의 파업은 그것에 대한 보답이자 승화였다. 성난 노동자들이 만들어낸 인간애의 집단적 구현은 그 어떤 이론보다 밝게 빛나 세상을 밝힌다.

그래서 노동조합의 사회적 평판이 떨어졌다는 소식을 접할 때면 나는 선배들로부터 받기만 하고 후배들에게 준 것은 없는 게 아닌지 모골이 송연해지곤 하는 것이다.

내가 조합에 들어갔을 때, 조선공사지부 사무실의 상근 멤버는 모두 다섯 명이었다. 지부장·상임부지부장·총무부장·나 그리고 경리 업무를 담당하는 여직원.

노동조합 활동을 하기는커녕 구경조차 해본 적이 없던 내가 제일 먼저 해야 했던 일은 노동법 공부였다. 우리 지부 간부들은 <근로기준법 해설>(신태식) 같은 책들을 펼쳐놓고 함께 읽고 토론했다. 때로는 저자를 모시고 강의도 들었다.

ⓒ 매일노동뉴스

사장을 날려버린 노조

우리는 공부와 조사를 바탕으로 재건노조가 방기했던 조합원의 권리를 하나씩 하나씩 되찾아 나갔다. 당시에는 잔업수당이 중요했다. 직장이나 반장에게 막걸리 몇 잔을 사고 잔업을 청탁했을 정도였다. 우리는 잔업수당을 단체협약에 명시할 것을 요구해 관철시켰다. 지금에야 당연한 것이지만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던 토요일 오후 휴무와 하루치 임금 지급, 퇴직금 누진제 등도 따냈다.

회사는 우리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당시 조선공사를 관할했던 상공부에서 예산이 내려오면 지부는 그걸 면밀히 분석해 임금 협상에 들어갔다. 예를 들어 상공부의 예산은 본공 1천500명과 임시공 800명에 대한 임금, 임금인상분 3%, 이런 식으로 정해져 내려오는데 이게 현장 상황과 정확히 맞을 리 없었다. 노조가 집계해 보면 본공 1천200명, 임시공 800명, 이런 식이었다. 당연히 상공부 예산만으로도 임금을 3% 이상 올릴 수 있었다. 회사는 상공부 눈치를 보느라 “우리는 상공부 가서 말 못한다”고 뻗대었지만 그럼 지부는 “우리가 상공부에 가서 얘기해주께”라고 응수했다.

할 일은 많고 고칠 것은 널려 있었다. 규탄대회는 일상적인 것이 됐고, 이러다 보니 쟁의발생보고서를 끼고 살아야 했다. 당시에는 현장에서 무슨 일이 발생하면 쟁의발생보고서를 노동위원회에 즉각 제출하고 심사를 받아야 했다.

회사는 늘 적자 타령을 하는 법이다. 지부는 적자의 이유를 대라고 했다. 하지만 사측이 적자의 이유를 고분고분 알려줄 이유가 없다. 군사정권 시절의 국영기업체라 비리가 많았다. 지부가 나섰다. 조선공사에 납품하는 업체 명단과 물품 영수증을 구매과에서 받아서 국제시장을 열흘 동안 돌아다니며 조사를 했더니, 50원짜리 전구가 150원에 들어 온 것을 발견하게 됐다. 규탄대회를 열어 조사 결과를 발표하며 ‘정부가 비리를 막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더니 당시 공화당 사무총장이던 예춘호씨가 이영진 사장의 연임을 막았다. 막말로 사장을 날려버린 것이다.

노동조합은 나의 노동대학

조선공사지부가 이렇게 원리원칙대로 나설 수 있었던 비결은 우리 스스로 비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허재업 지부장은 조합비에 관해서는 철두철미했다. 허재업 지부장은 육군 대위 출신으로 원래는 이영진 사장의 ‘사람’이었다. 인사계장으로 일을 했는데 사람이 워낙 맑다 보니 어찌어찌 하다 좌천이 됐다. 회사에 불만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허 지부장은 조합원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지부장은 담배를 피워도 제일 싼 담배를 태우고, 택시 한 번 타는 법이 없었다. 당시에는 정보부나 보안대에서 지부 사무실을 수시로 드나들었는데, 이 양반들이 술값을 달라고 하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 그럴 때면 지부장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난리를 쳤다. 오히려 박정부 상임부지부장이 “술값이라도 주면 사무실 바깥으로 나갈테니 어떻게 해서든 내보내자”고 설득했을 정도였다. 우리가 노동조합 활동 한답시고 조합비를 함부로 썼다면 회사에 약점도 잡히고, 투쟁비가 없어서라도 68년과 69년의 큰 투쟁은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조선공사 지부는 나의 노동대학이었다. 노동법·단체협상·임금협상 등 각종 노동조합 실무에, 조합 간부로서 자기관리를 배울 수 있었던 도량이었다. 그러나 가장 소중한 가르침은 현장을 뛰는 일이었다. 2기 집행부는 ‘조합에서 무엇을 하는지 조합원들이 모르고 있다’는 반성 끝에 점심시간을 이용해 30분 동안 간부들이 각자 담당 부서로 가서 설명을 하기로 방침을 세웠다.

날마다 현장에서는 노조 업무 설명회가 열렸다. 집행부의 활동사항을 거짓 없이 공개했고, 비판이 나오면 노조는 수용했다. 의도적으로 교육하는 것보다 훨씬 나은 효과를 가져왔다. 상황이 확실하게 전달되니까 조합원들은 조합 간부들이 지나가면 “아, 요새 그거 때매 고생 많제? 술 한 잔 하자.”며 노조가 추진 중인 사업에 대해 먼저 아는 척을 했다.

퇴근 후 조선공사 건너편 골목길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조그만 술집에서 연탄불에 돼지고기를 구워 막걸리 한 사발을 죽 들이키며 조합원들과 많은 대화를 했다. 점심 설명회 시간에 다 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술자리에서 쏟아져 나왔다. 아무래도 고충이나 불만이 많은 임시공들과 더 자주 만나게 되었는데, 때로는 본공들이 “야, 임마, 임시공만 챙기지 말고 우리도 챙기주라이.”라면서 관심을 호소하기도 했다.

1964년 9월부터 노동조합 상무로 일하던 나는 그 다음해 임시공으로 복직이 되어 조합원 신분으로 대의원, 상근집행간부로 일하고 있었다. 과거에는 본공이었지만 지금은 임시공이 되었으니 본공이나 임시공, 양쪽 다 이야기가 잘 통했다.

ⓒ 매일노동뉴스

“스님이 되면 대학도 갈 수 있다는데…”

엉덩이를 땅에 붙이고 있을 새도 없이 바쁘게 뛰어 다니면서도, 내 가슴에서는 다른 바람이 불고 있었다. 대학에 진학해서 공부하고 싶었던 ‘나’가 슬며시 꿈틀대기 시작했다.
노동조합 활동에 빠져드는 게 무서웠던 것일까? 이와 정반대로 노동조합 활동이 성에 안 차는 측면도 있었다.

근로기준법이라고 해 봤자 최저선인데 지키지 않아도 그만 아닌가. 맹물 같은 근로기준법 붙들고 앉아 달달 외워봤자 노동자들의 처지가 과연 얼마나 나아질까. 세상은 근본적으로 잿빛이었다.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본공으로 들어왔다가 임시공이 되고, 내가 그토록 가고 싶었던 대학은 가지도 못하고 이게 뭔가. 차라리 절에 들어가자.’

군대 시절 조계사에서 발행하는 <불교사상강좌>라는 책을 열심히 읽었다. 스님이 되면 동국대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소리에 귀가 솔깃하기도 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내 자리가 마치 절인 것만 같았다. 사천에 있는 고향 집에 가서 어머니와 큰형님께 절에 들어가겠다고 말을 꺼내자 그 자리에서 어머니께서 쓰러지셨다. 큰형수, 시집갔던 누님들까지 득달같이 달려와서는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어른들의 반대가 컸다. 9남매 가운데 막내인 내가 절에 가는 게 뭐 그리 큰 문제일까 생각했는데…. 다음날 아침 큰 형님께서 부르셨다.

“어머니 돌아가시는 거, 니 눈으로 봐야 되것나?”
“….”
“아버지 돌아가실 때 마지막 말씸이 뭐였노? 인상이는 여자 나타나몬 즉시 혼인시키주라고 안 하드나.어무니가 니 혼인시킬라꼬 주빈에 색시덜 찾아보고 계신데 무신 소리하는 기고?”
“아예 입산을 하겠다는 게 아이라 1년만 절에 가서 수도 생활 해 보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말고. 차라리 니 지금 하는 노동조합 활동이나 열심히 해라. 그것도 사회를 위하고 국가를 위하는 기고. 스님이 중생을 위하고 백성을 위하는 기나 비슷한 거 아이가?”
“예에?”
큰형님께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실 줄은 몰랐다. 어느 자리에서 무슨 일을 하든 제대로 하면 사회를 위하고 국가를 위하는 것이니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용맹정진 하라는 뜻 아닌가.
“니 신경 못 써 준 거 안다. 그렇다고 니가 이러면 안 된다.”
“그런 기 아입니더.”

동란으로 폴싹 주저앉은 집안 사정 때문에 나는 공부를 계속 할 수 없었다. 큰 형님의 말씀은 그것을 염두에 두신 것이었다. 절로 간다고 더 고집을 부렸다가는 내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어머니에게는 물론이고 큰형님께도 상처가 될 것 같았다. 사흘만에 입산을 포기하고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더니 박정부 상임부지부장이 “야, 인상아, 방황 다 했나?”라며 반겨주었다.

내 인연은 노동조합?

그 시절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휴일이면 박정부 상임부지부장은 지부 간부들을 자주 불러 모았다. 일종의 소모임이다. 영도도서관으로 가면 관장인 부성수씨와 안효덕씨가 벌써 자리를 잡고 있다.

“월남 가믄 돈 번다 카던데….”
“와? 니도 갈래?”
“한국이 베트남전에 참전한 대가로 경제적 이익이 꽤 된다 카지예?”
“1965년에 우리 정부가 미국하고 체결한 브라운 각서에 보면 미국이 한국한테 1억5천만 달러 장기차관을 제공하기로 했다 카더라. 그라고 한국이 베트남에 수출해서 벌어들이는 돈이 한 해 6천만 달러는 되고…. 이기 다 가난뱅이들 피값 아이것나?”

대화는 언제나 젊은 간부들의 객쩍은 농담으로 시작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진지해진다. 누가 묻고 누가 답을 하는지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나를 비롯한 젊은 간부들이 신문에서 본 화제를 꺼내면 박정부 상임부지부장이나 부성수 관장이 살을 붙여 주었다.

“미국이 베트남전에 뛰어든 것은 미국 내에서도 최악의 실수다 카는 말이 나오는데, 우리는 남의 나라 전쟁터에 가서 떡고물이나 얻어 묵고 있으니.”
“앞으로 우리 경제는 미국한테 엄청나게 예속이 될 끼다. 이래 되면 통일은 더 멀어지는 기고.”
“4·19 다음에 와 5·16이 왔는지…. 혁신계는 그 좋은 때 단결도 못하고 어영부영하다가 몇 석 얻지도 못하고. 그 생각만 하면 너무 안타깝십니더.”
“매사를 냉철하게 판단해야지.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패배의식에 젖어서 아무 일도 못한다. 문제는 박정희 정권이 통일 문제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민주적인 기본권들을 더 심각하게 제약시킬 것 같구만은. 노동운동하기도 더 어려질 끼다.”
“아이고 벼룩이 간을 빼 묵지. 노동자들이 최소한 묵고 살구로 해 달라는 요구마저 못하게 하면 그게 오데 사람입니꺼?”
“이번 임단협 때 회사에 식당 만들라꼬 요구해야 안 되것십니꺼?”
“하모. 하모.”
“식당 문제 하나만 가꼬 싸우몬 따낼 수도 있것지만은 임시공들 문제가 급한데…. 뭐를 우선순위로 할지 현장에서 토론을 한 번 해 봐야지.”

이런 저런 얘기를 마치고 나면 산보 삼아 영도를 한 바퀴를 돌았다. 해가 질 때쯤 되면 우리는 바닷가에 퍼질러 앉아 안주 없는 막걸리를 마셨다.

석양과 취기에 주홍빛으로 물든 선배와 동료들의 얼굴. 어쩌면 세상은 근본적으로 장밋빛인 게 아닐까. 우리는 할 일이 많았다. 깨어 있는 노동자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속세에서 나의 인연이다. 방황은 끝났다. 대학이 별 거냐. 이게 대학이다.<계속 이어짐>

박미경 객원기자  labortoday@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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