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PDATE : 2019.7.21 일 08:00
상단여백
HOME 피플ㆍ라이프 인물
노동운동 40년, 박인상 회고록 ⑤[제2부]25세의 노동조합 상무 [제2편] “노동조합 간부를 맡으라꼬요?”
평지돌출은 없다. 에베레스트산이 높은 이유는 히말라야에 있기 때문이라고 했던가. 40년 전 세상을 뒤흔들었던 대한조선공사 노동조합의 파업 역시 우리만의 힘으로 이룬 기적이 아니었다. 동란 속에 살아남은 ‘올드 프로그레시브(old progressive)’의 지혜와 4월의 월계관을 쓴 ‘영 제너레이션(young generation)’의 패기가 경제개발의 제물이 된 노동자의 분노와 삼위일체가 되었다.

조선공사 노동조합은 닫혀 있지 않았다. 그 열려진 틈 사이로 스며든 지성과 양심이 노동자의 육체에 정신을 불어넣었다. 노동자들의 파업은 그것에 대한 보답이자 승화였다. 성난 노동자들이 만들어낸 인간애의 집단적 구현은 그 어떤 이론보다 밝게 빛나 세상을 밝힌다.

그래서 노동조합의 사회적 평판이 떨어졌다는 소식에 접할 때면 나는 선배들로부터 받기만 하고 후배들에게 준 것은 없는 게 아닌지 모골이 송연해지곤 하는 것이다.

조선기술고등학교에서 나의 전공은 정밀기계였다. 기계공장에서는 선박에 들어가는 정밀기계를 가공했는데, 나는 선반이나 호빙머신을 돌렸다.

“어이 봐라. 봐라. 쟈가 최무룡이가? 신성일이가?”
“절마가 양놈매로 생긴 기 아메리카 합중국에 케네디 대통령 비스무리 안 하나?”

‘낯짝이 반반하게 생기 묵은’ 나를 기계공장의 선배들은 ‘백’으로 들어 온 것으로 짐작하고는 처음에는 데면데면하게 대했다. 이 해 조선공사 입사 경쟁률은 13대1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배들은 내가 조선기술고등학교 모범생이었다는 알게 되었고, 내가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게 되자 기술을 하나씩 가르쳐 주기 시작했다.

ⓒ 매일노동뉴스


“우리는 왜놈들에게 망치 맞아가며 기술 배웠다”

현장에서 기능을 익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눈썰미가 좋아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어깨 너머로 배우든지, 아니면 직장, 반장 등 기술 좋기로 정평이 나 있는 선배들에게 사사(?)를 받는 방법이었다. 이런 구조다 보니 직장, 반장의 권한은 상당히 막강했고, 그들 눈 밖에 벗어나면 기름밥 먹기 어려웠다.

그때는 직장, 반장이 현장에서 왕이었다. 그들의 ‘권력’ 기반은 기술만이 아니었다. 월급이 워낙 낮은 시절이라 잔업을 하지 않으면 먹고 살기가 정말 힘든 때였다. 직장 눈에서 벗어나면 잔업은 기대하지 말아야 했다. 직공이 많은 직장은 명절 때 정종병 쌓아 놓느라 집 마당에 천막을 쳐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있었다.

내가 담당했던 선반은 자동 6척 선반이었는데, 재료를 물려 놓으면 자동으로 볼트, 너트가 가공되어 나오게 돼 있었다. 또 호브라는 절삭 공구를 끼워 기어를 깎아내는 호빙 머신을 돌리는 일도 했다.

조선기술고등학교에서 이론을 배우고 실습도 했지만, 막상 현장에서 기계를 보니 겁이 났다. 배운 대로 해도 생각처럼 쉽게 되지는 않았다. 나 같은 젊은 노동자들은 호빙 머신을 돌려도 번번이 느렸다.

이럴 때면 선배들에게 물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박영식 선배와 최성규 선배가 내 사부였다. 최성규 선배는 동아대학교를 졸업하고 기계과에 근무하고 있었다. 태평양 전쟁 막바지, 일본 배를 수리하던 조선중공업(조선공사의 전신)에서 일을 하면 징용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많은 젊은이들이 징용을 피해 대거 입사를 했고, 이 가운데에는 고학력의 고급 인력들도 상당히 있었다. 이 기계공장에서 박정부 선배도 알게 됐다.

선배들은 호브는 어느 곳에 걸고, 기어는 어디에 맞추어야 되는지 분필로 그림까지 그려서 설명해 주었다. 알려준 대로 해 보면 기가 찰 정도로 맞아 떨어졌다. 그래도 이 선배들은 착한(?) 편이었다. 가끔씩 성미가 고약한 선배들에게 물었다가 날벼락을 맞는 일도 있었다.

“야, 임마, 우리가 기술 배울 때는 왜놈들한테 망치로 머리 맞아가며 배웠다. 하루아침에 다 가르칠 수 있나?”

그래도 우리 같은 초짜들은 쑥떡 같이 참았다. 시쳇말로 무섭고 더러워서 참았다기보다는 직장, 반장들에 대한 존경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배들의 기술이란 경외의 대상이기도 했다.


ⓒ 매일노동뉴스

공구관리의 중책을 맡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설계과 엔지니어가 설계도를 제작해 현장으로 내려보냈다. 현장에서는 이 설계도대로 배를 만들었는데, 제일 중요한 스크루가 돌아가지 않는 것이었다. 현장은 뒤집어졌고, 설계과 엔지니어들이 달려와 설계도와 건조된 배를 일일이 대조하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살폈는데 도통 해결책이 서지 않았다. 이 소식을 듣고 직장, 반장들이 몰려 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실마리가 풀렸다. 설계도가 잘못됐던 것이다. 설계를 한 번도 배워본 적이 없는 직장, 반장들이 대학 나온 엔지니어들보다 배를 더 훤히 꿰고 있었던 것이다.

현장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이런 류의 무용담은 흔한 일이었다. 그만큼 그들은 자신의 기술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보도연맹에 편입됐다가 기술을 갖고 있다는 사실 하나로 살아남은 선배들이니, 그들에게 있어 기술은 밥벌이 이상의 그 무엇이었던 것이다.

나는 기계를 돌리다 ‘젊은 친구가 일을 잘한다’는 평가를 받았고, 몇 달 지나지 않아 정밀기계 공구실을 담당하게 되었다. 당시 조선공사 현장에 공구실은 조선 공구실과 정밀기계 공구실, 두 군데가 있었다.

정밀기계 공구실에서는 1밀리 드릴 같은 작은 것에서부터 용접기까지 카탈로그를 다 붙여 정리하고, 또 누가 어떤 공구를 가져가고 갖다 놓았는지를 확인하고, 오랫동안 반납이 되지 않은 공구를 찾아 놓는 일을 했다. 현장 노동자들의 신임이 없으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공구 관리 위주로만 일을 하면 현장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현장에만 맞추면 공구 관리가 엉망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공구실을 맡아서 내 딴에는 열심히 일을 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일을 하다 보면 공구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기계에 물리기 위해 가져 왔는데 잠시 어디 다녀 온 사이에 공구가 없어지는 것이다. 누군가 그 공구를 쓰기 위해 가져갔을 텐데, 회사에서는 이럴 때 경위를 따지지 않고 무조건 공구를 분실한 노동자에게 변상을 시키는 것이다.

이럴 때면 나는 분통을 터뜨리고 있는 동료나 선배에게 어디 가서 부러진 공구라도 하나 찾아오라고 말했다. 공구가 부러졌으니 여유분의 공구로 바꾸면 해결이 되지 않는가. 현장에서는 ‘인상이 절마하고 의논을 하면 된다’는 말이 나올 만큼 인정을 받았다.

사라진 호브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할까. 공구실에서 관리하고 있던 호브가 감쪽같이 사라진 일이 생겼다. 호브는 호빙 머신에 끼워 기어를 깎는 데 사용하는 절삭 공구로 독일에서 수입한 고가 부품이었다. 유리 상자에 넣어 놓은 호브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가의 부품이 사라지자 누군가 책임을 져야 했다. 공구실에는 공구실장 밑에 출납, 반납, 재고관리를 하는 직원들이 서너 명 있었다. 공구실장은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뒤 조선공사 사장이 된 대령 출신의 이영진 사장 사람이었다. 출납, 반납 업무를 맡았던 직원들은 상이용사 출신이었다.

재고관리 담당이었던 나는 없어진 호브를 찾기 위해 사라진 호브 카탈로그를 들고 호빙 머신이 있는 공장과 공구 가게를 찾아 부산을 다 뒤졌다. 영도경찰서에 협조를 요청해 형사와 함께 국제시장, 서면 등지를 다니기도 했다. 백사장에서 바늘 찾는다고, 서면의 기계공장에서 사라진 호브와 같은 독일제 호브 두 개를 가까스로 찾아냈다.

하지만 같은 호브라고 해서 공구실에서 사라진 호브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우리가 찾아낸 호브가 조선공사에서 수입한 호브인지 아닌지를 알려면 독일에서 이 호브를 수입한 업체를 찾아야 했다.

상공부에 호브를 수입한 업체를 알려 달라고 조회를 부탁했다. 그런데 일이 안 풀리느라 그랬던지 그 수입업체가 없어져버려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게 상공부의 답변이었다.

더 이상 찾을 방도가 없어지자 회사는 징계위원회를 열었다. 그 결과, 군 출신의 공구실장도 아닌, 상이용사 출신도 아닌 나에게 해고라는 가장 무거운 징계가 떨어졌다. 나는 이 결정에 수긍을 할 수가 없었다. 공구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과실이 있다손 치더라도 해고는 잘못된 결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백방으로 뛰었다. 부산지방노동위원회를 찾아갔다. 도난당한 물품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구제신청을 내봤자 복직은 힘들 것이라는 애매한 이야기만 들었다. 조선공사가 부산에서 제일 큰 사업장인 데다. 군사정권이 임명한 군 출신 사장의 눈치를 보는 기색이 역력했다.

부산시청 사회과 노정계도 찾아가 보았다. 성 계장이라는 분은 내 사연을 듣더니 “억울한 면이 있다”면서 회사로 찾아와 해고는 “너무 심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를 해 주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기계공장에서 알게 된 박정부 선배를 비롯해 권오덕과 친한 영도의 선배, 동료들과 의논을 해 보았지만 뾰족한 수는 나오지 않았다. 군사정권이 만든 재건노조는 가 봤자 소용도 없을 것 같아 생각하지도 않았다.

ⓒ 매일노동뉴스

“인상아, 노동조합에 들어와 복직투쟁해라”

자유당 시절만큼은 아니더라도 ‘빽’이 중요했다. 조선공사 관리직에 있는 사람을 알거나 조선공사 관리직을 움직일 수 있는 높은 사람과 사돈에 팔촌이라도 엮여 있으면 안 되는 일도 됐다.

내가 부산에서 누명을 쓰고 해고가 된다고 하니 사천에 계시던 큰형님께서 아는 사람이라도 찾아 동생 구명을 해 보려고 생각하셨던 것 같은데, 우리 집안은 이런 연줄이 전혀 없는 게다. 사실을 말하자면, 4월혁명 뒤 큰형님께서는 사천군 용현면의 민선 면위원이 되셨다. 그 덕분에 셋째형 결혼식 주례를 사천군 출신 국회의원이고 장면 정부에서 교통부장관을 지낸 정헌주씨가 섰는데, 군사쿠데타가 나자 집안에서는 셋째형 결혼식 사진은 꺼내놓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인상아, 니 노동조합 안에 들어와 복직투쟁을 하거라.”

호브 도난 사건으로 누명을 쓰고 해고돼 복직을 하기 위한 방도를 찾느라 동분서주 하던 어느 날, 박정부 부지부장으로부터 전갈이 왔다. 그 사이 재건노조는 불신임되고 새 집행부가 들어섰다는 소식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지부 일을 맡으라는 권유였다.
“부지부장님, 무슨 말씀입니꺼? 조합원도 아닌데 노동조합 일을 한다는 게 말이나 됩니꺼?”

그러나 부지부장은 이미 그림을 다 마련해놓고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지금 조합원들이 새 집행부에 대해서 기대가 얼마나 많겄노? 니 당해서 봐서 안다 아이가? 노동조합이 우리 편이 아이께네 얼마나 서럽더노? 우리가 인자 진짜 노동조합 함 만들어 보자.”

나는 고집을 한 번 더 부렸다.

“그렇지만서도 내는 복직하고 난 다음에 노동조합 활동을 하는 기 맞다고 봅니더.”
먼저 복직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새 집행부에 대한 믿음은 있었지만 노동조합 활동이라는 게 머릿속에 또렷하게 그려지지 않았던 것도 선뜻 답을 하지 못한 이유였다.

1959년 입사하던 해 사고로 석 달 가까이 쉬었고, 이듬해 군에 입대해 다시 3년 동안 공장을 떠나 있었고, 전역하고 복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절도사건으로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해고된 나였다.

기름밥을 먹기로 한 이상 현장에서 인정을 받는 게 먼저였다. 내가 잘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마치 뜨내기 같던 내 신세로 노동조합 일을 한다는 게 내 자존심을 건드렸다. 선배, 동료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결론은 노동조합이었다.

내 자존심도 중요했지만 가까스로 되찾은 노동조합도 소중했다. 1964년 9월1일, 나는 대한조선공사 노동조합 상무로 노동조합 활동에 첫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상무라면 어색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노동조합 간부에게 곧잘 그런 표현을 썼다.

상무(常務)에는 일상적 일 또는 책임이라는 뜻도 있다. 그때부터 노동조합은 내 일상이 되었으니 그것 또한 운명 아니었겠는가.<계속 이어짐>

박미경 객원기자  labortoday@labortoday.co.kr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박미경 객원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