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지돌출은 없다. 에베레스트산이 높은 이유는 히말라야에 있기 때문이라고 했던가. 40년 전 세상을 뒤흔들었던 대한조선공사 노동조합의 파업 역시 우리만의 힘으로 이룬 기적이 아니었다. 동란 속에 살아남은 ‘올드 프로그레시브(old progressive)’의 지혜와 4월의 월계관을 쓴 ‘영 제너레이션(young generation)’의 패기가 경제개발의 제물이 된 노동자의 분노와 삼위일체가 되었다.

조선공사 노동조합은 닫혀 있지 않았다. 그 열려진 틈 사이로 스며든 지성과 양심이 노동자의 육체에 정신을 불어넣었다. 노동자들의 파업은 그것에 대한 보답이자 승화였다. 성난 노동자들이 만들어낸 인간애의 집단적 구현은 그 어떤 이론보다 밝게 빛나 세상을 밝힌다.

그래서 노동조합의 사회적 평판이 떨어졌다는 소식에 접할 때면 나는 선배들로부터 받기만 하고 후배들에게 준 것은 없는 게 아닌지 모골이 송연해지곤 하는 것이다. 영도는 부산 남쪽 끝에 있는 섬이다. 영도(影島), 그림자섬이라는 뜻인가. 처음 부산에 왔을 때 지명 한번 고약하고나, 하는 생각을 얼핏 했다.

사람 사는 마을에 밑도 끝도 없이 그림자만 덩그러니 붙여놓다니. 나중에 알고 보니 절영도(絶影島)였다. 이 섬의 말들이 그림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리 달린다고 해서, 또는 말들이 너무 많아 그림자가 끊긴다고 해서 절영도라고 불렀다고 들었다. 일제시대 때 ‘絶’자가 떼어지고 ‘影’자만 남았다.
 
영도의 ‘황태자’

1934년 7월 영도는 육지가 됐다. 항구로 드나드는 배가 다리 아래로 지날 적이면 상판이 반으로 갈라져 번쩍 들렸다. 이 신기한 광경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 들었다고 하던가. 영도다리로 정작 이익을 크게 본 사람은 영도 땅 대부분을 소유했던 하사마와 오이케라는 두 일본인들이라고 한다.

영도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이 섬이 육지와 왕래하는 수단은 나룻배였다. 영도 사람들은 나룻배를 타고 뭍으로 다녔다. 큰 나룻배 두 척을 마련하고 배에서 나오는 이익금을 모아 영도 최초의 신식학교인 옥성학교(현 영도초등학교의 전신)를 만든 이가 김용근씨다. 이 분의 사위인 이영언씨는 1930년대 초반 부산부협의회 의원(현 시의원)을 하면서 영도다리가 놓이는데 공을 적잖이 세웠다고 한다.

이승만 정권 시절, 국회의원이 된 이영언씨가 ‘내 고장의 젊은이들을 키워야 된다’는 신념을 갖고 발굴한 인물이 동아대와 서울대 대학원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부산지역의 대학에서 경제학 강의를 하고 있던 예춘호씨다.

영도 동삼동에 실향민 난민주택을 세우는 지역개발사업을 성공시켜 ‘큰 인물’로 인정을 받은 예춘호씨는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정계 진출 제의를 받게 되고 정계에 입문해 공화당 사무총장까지 지냈다. 이후에는 삼선개헌 반대로 공화당에서 제명되고,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뒤 재야운동을 했다.

말하자면 예춘호씨는 당시 영도 주류세력의 ‘황태자’격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 ‘황태자’에게는 주류와는 어울리지 않는 이력의 소유자인 세 명의 ‘동지’가 있었다.
 

‘레프트 두목’

그 가운데 한 분이 안효덕씨다. 안효덕씨는 예춘호씨(1927년생)보다 서너 살 위 연배로 고향은 김해였다. 이 안효덕씨가 영도에 터를 잡게 된 사연이 드라마틱하다면 드라마틱하다. 안효덕씨는 해방 직후 좌익 노동운동의 본산이었던 전평의 조선부문 대표자였다고 한다.  어쩌면 안효덕씨는 조선공사와 군소 조선소가 있는 영도와 인연을 맺은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안효덕씨는 이십대 중반에 전평의 조선부문 대표를 맡았을 만큼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에 관한 한 ‘역전의 용사’였다. 권오덕과 나를 비롯한 조선공사지부의 젊은 간부들은 그런 그를 농담반 진담반으로 ‘레프트 두목’이라며 따랐다. 하지만 안효덕씨는 말이 없는 편이었다. 해방 직후 혼란기에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다 그 뜻이 꺾이고 난 뒤 많은 사연을 가슴 한 구석에 묻고 살아야 했을 그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처세였을지도 모른다.

대신 안효덕씨는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다. 우리는 답답한 일이 있으면 안효덕씨를 찾았다. 그리고 노동조합부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까지 닥치는 대로 보따리를 풀어놓았는데, 빙그레 웃기만 하는 안효덕씨 얼굴 앞에서 한참 동안 침을 튀기다 보면 우리는 뭔가 한 수 배웠다는 이상야릇한 뿌듯함에 사로잡혀 집으로 돌아오곤 하는 것이었다.

또 한 분은 부성수씨였다. 부성수씨는 영도가 고향으로 예춘호씨와는 동년배였다. 부성수씨는 영도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던 1960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활동을 했고, 다음해 군사정권에 의해 해직됐다. 부성수씨는 해직된 뒤 1965년 예춘호씨가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도서관, 영도도서관의 관장을 지냈는데, 이 도서관은 암암리에 영도 지식인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전평의 추억

이 도서관은 또한 우리 조선공사지부 간부들의 사랑방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박정부씨가 우리 젊은 후배들을 그곳으로 이끈 것이었다. 박정부씨는 예춘호씨와는 영도초등학교 동기로 아주 젊어서 철공소에 입사해 일을 배운 뒤 조선공사에 입사한 분이었다. 안효덕씨처럼 드러나게 활동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역시 전평 시절을 겪었을 것이다.

사실, 조선공사에는 전평을 경험했던 노동자들이 상당수 남아 있었다. 그들은 어떻게 해방 직후의 아수라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을까.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조선공사 노동자들 가운데 전평 활동을 했던 이들이 좌익으로 몰려 보도연맹에 편입되자 당시 이연제 사장과 박옥규 전 사장이 해군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유는 ‘군함을 수리할 기술자는 이 사람들뿐’이라는 것이었다. 이연제씨는 이승만 대통령의 양아들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 대통령의 측근이었고, 박옥규씨 또한 뒤에 해군참모총장을 지낸 실력자였다. 이리하여 몽땅 총살당할 위기에 놓였던 이분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박정부씨는 비록 학력은 낮았지만 대단히 똑똑한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가 조선공사지부 활동을 할 때 영도의 많은 지역 선배들이 그에게 관심을 갖고 지켜봤다고 한다. 안효덕, 부성수, 박정부, 이 세 분은 우리 젊은 간부들에게는 정신적 지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큰 산에 가야 골짜기가 깊다고 했다. 조선공사 노동조합 뒤에는 역사와 지역이 키워낸 이 땅의 선배들이 있었던 것이다.

안효덕씨, 부성수씨, 박정부씨, 이 세 분은 예춘호씨가 공화당을 선택한 것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는 했지만 친밀한 관계에 변화가 생길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한편, 예춘호씨는 ‘진보적인’ 친구들을 둔 덕분인지 노동운동에 대해서도 이해가 깊었다. 우리가 의도한 바도 기대했던 바도 전혀 아니었지만, 영도에 지역구를 둔 현직 공화당 사무총장이 노동운동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갖고 있었다는 것은 조선공사 노동조합에게는 상당한 힘이 됐던 것도 사실이었다.
 
‘혁신계’ 지식인들과의 만남

또 영도에는 나의 연배로 4월혁명의 세례를 받은 학생운동권 출신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부산대학교 출신의 김영대씨, 조평래씨, 최석환씨가 있었고, 중앙대학교를 중퇴하고 낙향해 있던 권오덕씨가 있었다.

부산대 정치학과 출신인 김영대씨는 4월혁명 직후 부산대학교 정치학과 이종률 교수의 영향력 아래 결성된 민족민주청년동맹(민민청)의 영도지부 위원장이었다. 군사쿠데타로 민민청이 깨어지고 이종률 교수가 구속이 되자, 김영대씨는 조선공사 노동자로 일을 했다. 80년대식으로 하면 ‘위장취업’을 연상할 수도 있겠는데, 그런 것은 아니었다. 김영대씨는 신분을 숨기지도 않았고, 영도경찰서에서도 속속들이 다 알고 있었다. 현장에서 민민청 조직사업을 하지는 않았던 것 같고 일만 열심히 했다.

당시는 ‘진보’라고 하지 않고 ‘혁신’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다. 4월혁명 이후 혁신계 청년·학생운동단체였던 민민청은 1960년 6월 부산에서 결성됐지만 전국 조직이었다. 이 민민청의 대구지역 멤버들이 서도원, 도예종, 송상진씨들이다. 1975년 2차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으로 사형을 당하신 그 분들이다. 나야 그 때는 ‘민민청’이라는 단체가 있고 내 주변에 그 일에 열성인 지인들이 있다고만 알고 있었는데, 나중에 보니 엄청나게 큰일이어서 놀라웠던 기억이 있다.

1961년 2월, 민민청과 통민청이 연합하고 사회대중당·한국사회당 같은 진보정당들과 종교계가 가세해 결성된 것이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이다. 당시 영도 침례병원 외과 수련의로 있던 조평래씨는 부산대 의대 시절에 민민청을 민자통으로 엮는 작업에 관여했다고 한다.

조평래씨는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병원에서 근무하면 정보부나 경찰의 감시가 덜 할 것으로 생각돼 영도 침례병원에 자리를 잡았는데, 수술을 잘한다는 평판이 높아서 환자들이 많았다. 조평래씨도 조선공사지부의 활동을 눈여겨보던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다. 멀지 않아 나는 그와 안면을 트게 되었고, 시간이 날 때마다 병원에 들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인연이 이어져 그는 훗날 내가 국회의원을 할 때 후원회 회장을 맡아 물심양면으로 나를 도와주웠다.

민민청 활동을 했던 인사들 가운데 또 나와 인연을 맺게 된 분으로 김금수씨와 김상찬씨가 있다. 김금수씨는 조평래씨와 친분 관계를 갖고 있었고 서울에서 민민청 활동을 했다. 김상찬씨는 부산에서 통일운동을 이끌었다. 특히 김금수씨는 한국노동운동의 산 증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분으로 내가 금속연맹 부산지부 사무국장을 할 때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김금수씨는 노무현 대통령 때 노사정위원장을 지냈다.
 
‘대통령도 철강노조한테 꼼짝 못한다더라’

그리고 ‘후진성극복연구회’라는 써클 활동을 했던 부산대 법대 학생회장 출신 최석환씨가 있다. 최석환씨는 부친께서 조선공사 주물공장에서 일을 하고 계셨기 때문에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 최석환씨의 부친 역시 내게 각별한 애정을 주셨다.

이 대목에서 내 친구 권오덕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솔직히 말하면 조선공사 노동조합이 우리나라 노동운동사에서 누리고 있는 영광과 찬사의 많은 부분은 그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대학도 들어가기 전에 고등학교 은사 따라 민민청 발기인에 이름을 올렸던 그는, 중앙대학에 입학한 뒤 중퇴하고 조선공사에 임시공으로 입사했다.

나는 영도 출신인 그와 내가 부산에서 조선기술고등학교 다닐 때 처음 만났다. 신세를 지던 집안 친척 동생과 그가 고등학교 동기라는 인연이었다. 나중에 조선공사에서 한솥밥을 먹게 됐을 때 왜 현장으로 왔느냐고 물었더니 그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노동운동 하려고 왔다나. 고등학교 은사의 ‘아이젠하워 대통령 때 철강노조의 머피가 대통령도 꼼짝 못하게 했다, 이런 게 노동운동이다’라는 말씀에 감명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숙연해졌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이처럼 조선공사지부는 영도와 부산의 지식인, 혁신계, 학생운동권 등과 씨줄, 날줄로 촘촘히 엮여져 있었다. 많은 눈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고, 나는 그 덕을 톡톡히 본 것 같다.

모임이라는 형식을 굳이 만들지는 않았지만, 지부 사업과 관련해 중요한 일이 있거나 궁금한 일이 있을 때면 언제든지 찾아가 상의하고 조언을 구할 수 있었다.
만남이 늘어날수록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했던 나의 좁은 세계가 하루가 다르게 넓혀졌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 만남은 내가 1963년 군에서 제대하고 복직해 정밀기계공장으로 발령을 받으면서 시작됐다. 이것이 40년에 걸친 내 노동운동의 출발점이었다.<계속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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