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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위기와 구조조정에 대한 저항 ②
  • 조건준 금속노조 정책국장
  • 승인 2009.08.07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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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에게도 강력히 작용하는 ‘고용불안증’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고용게임’을 강요한다. 정규직의 선택은 뻔하다. 비정규직을 고용의 방패로 삼는다. 결국 ‘고용게임의 링’ 위에서 노동자는 서로에게 경쟁자가 된다. 자본이 이런 상황을 방치할 리 없다. 정규직을 비정규직의 표적으로 세우는 것이다.
결국 범인이 바뀌었다. 비정규직 문제와 사회양극화의 주범은 자본이 아니라 정규직 노동자가 된 것이다.

너는 타협성, 나는 선명성

전진공격은 승리를 위한 희망이다. 삶의 과정에서도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은 즐겁다. 하지만 전투에서 후퇴는 혹독하다. 생활 속에서도 무언가에 실패해 물러날 때는 쓰라리다. 87년 이후 저임금·무권리·무노조의 벽을 부수고 전진하던 노동운동은 희망이 넘쳤다. 잃을 것은 없고 하나라도 쟁취하기 위한 공격이었다.

외환위기로 정리해고가 밀려든 97~98년, “공격 앞으로”가 갑자기 사라졌다. 공격에 익숙할 뿐 후퇴는 경험하지 못한 노동자들은 주춤거렸다.
구조조정이 한창이던 2000년 한 회사에서 가장 강성이라는 사람이 위원장에 당선됐다. 그 후 경찰력이 공장에 밀려들어 올 때의 치열한 전투, 공장에서 밀려난 정리해고자들과 전국에서 연대를 위해 달려온 모든 노동자들이 함께 투쟁했다.

그러나 회사·정부·언론의 집중공격으로 정리해고를 막지 못하는 상황에 처했다. 수많은 투쟁 끝에 결국 단계적인 복직에 합의했지만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수년간 싸워서 만들었던 단체협약의 몇몇 조항을 내줘야 했다.

치열한 투쟁을 했음에도 후퇴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 누가 후퇴명령을 내릴 것인가? 신나는 결정이 아니다. “물러선 놈”으로 찍혀 살게 될 운명, 누구든 쉽게 나설 리 없다.

후퇴결정은 공격명령보다 더 많은 용기와 책임감이 필요하다는 것을 몰랐다. 그러나 투쟁이 끝난 후 오랫동안 “나는 결코 단체협약을 후퇴시킨 적이 없다” 혹은 “나는 끝까지 투쟁을 주장했다”며 후퇴결정을 내린 동지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뼛속 깊은 안타까움을 느꼈다. 혹독한 투쟁은 노동자들을 단련시켜 준다. 반대로 동지였던 노동자들 사이에 너무나 큰 상처를 남기고 갈라서게 만들기도 한다.

부도와 법정관리, 정리해고라는 극단적인 상황을 겪은 노조들은 대부분 이러한 부작용을 감내했다. 노동조합의 계파갈등을 비난하는 언론에 가끔씩 등장하는 조직계보도를 보면, 예전에는 하나였는데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갈라진 조직들이 많다.

세월이 지나 2008년 말, 한 대기업이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하지만 상급조직의 지도부 가운데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아무리 투쟁을 한다고 해도 결국은 후퇴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고통스런 결정을 해야 한다. 평소에 그토록 원칙적이고 선명한 주장을 했던 간부도 쉽사리 나서지 못했다.

애정 어린 충고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차피 양보하게 될 것이니 굳이 그런 나쁜 역할을 할 이유가 없다.” 뻔한 정치를 하라는 것이다. 내가 아닌 누군가를 그곳에 밀어 넣으라는 것이다. ‘너는 타협성, 나는 선명성’을 가지겠다는 비겁한 정치다.

노조 상층은 원칙적인 지침을 발표하고 현장은 그 지침을 지키지 않는다. 아니, 지킬 수 없다. 반대로 현장에서 사고 치고 중앙에서 비판한다. 그것도 잠시다. 결국 은근슬쩍 넘어간다.

현장을 시궁창에 밀어 넣고도 중앙은 때를 묻히지 않는다. 결국 신뢰는 무너지고 현장과 중앙이 따로 놀게 된다. 이런 행동을 비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몇 발자국이든 물러설 수밖에 없는 구조조정 반대투쟁의 본질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을 뿐이다.

돈이 아니다

자본은 위기를 빌미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한다. 강한 노동조합이 있는 회사에서는 경제위기를 틈타 노동조합을 공격한다.

연월차 수당, 명절에 주는 귀향비 명목의 수당, 체육대회 지원금, 작업복이나 양말 등 각종 피복지원비, 장기근속자에 대한 각종 혜택을 포함해 임금반납을 요구한다.
정말로 어려워진 기업에서 이런 것을 요구하는 것은 그나마 이해가 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꽤 있다.

자본의 이러한 공격에 맞서는 노동조합은 방어적 위치에 선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이 방어투쟁은 수세적일 수밖에 없는, 얼마나 덜 물러설 것인가의 문제다. 이런 수세적인 상황을 되돌리기 위해서는 임금이 줄어든다고 해도 역으로 뭔가를 얻어 내려는 ‘되치기 전략’이 필요하다.

노사 간에 쟁점이 돼 온 임금체계를 보자. 대부분의 제조업 현장 노동자들의 임금은 시급제다. 시간당 임금을 계산하기 때문에 월급제와 비교하면 고정급의 비중이 매우 낮다. 노동자들은 낮은 고정급을 보충하기 위해 잔업과 특근을 원한다. 임금투쟁을 통해 연말성과금을 비롯한 각종 보너스를 요구한다. 하지만 이런 요구들은 고정급을 높이는 방안이 아니다. 변동급 비중만 높일 뿐이다.

임금이 다소 줄어들긴 하겠지만, 그래도 월급제처럼 고정임금을 높이는 쪽으로 임금체계를 개편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훨씬 유리하다. 당장 임금이 줄어든다고 해도 전략적으로 유리한 제도를 따내는 지혜가 필요하다.

자동차산업에서 노사 간 논란이 되는 주간연속 2교대제도 마찬가지다. 심야근로를 철폐함으로써 그만큼 전체 노동시간이 줄고 생산량도 줄어든다. 회사는 부족한 생산량을 채우기 위해 노동강도를 높여 생산성을 높이려 한다. 노동시간이 줄어들기 때문에 임금도 줄이자고 한다.

터무니없이 노동강도를 높이거나 임금을 깎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지만, 당장의 돈이 좀 줄어들더라도 체계를 바꾸는 것이 전략적으로 훨씬 유리하다. 생산량이 줄어들 때 노동시간상한제를 도입하거나 노동강도를 약화시켜 ‘일자리 나누기’를 제도화하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은 구조조정 반대투쟁은 그 어떤 경우든 수세적인 후퇴로 귀결된다.

멈춰 있는 운동, 달리는 자본

“자본과 정권은 경제위기를 빌미로 노동자의 고통분담을 주장하면서 고통전담을 강요할 것이다.”
경제위기가 다가오자 수많은 노동운동 단체와 노동조합이 분석했던 얘기다.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고통분담론’이라는 것은 대체 언제 나온 얘기일까? 1993년 5월1일,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는 [신경제 정책 비판-새 정부의 이른바 고통분담론의 허구성을 밝힌다]라는 제목의 자료를 발행했다. 물론 그 이전에 떠돈 ‘고통분담’이라는 얘기를 비판한 자료이니 벌써 16년 전의 일이다. 고통분담론이 그 힘을 한껏 떨친 시기가 1998년 외환위기 때라고 해도 벌써 10년이 지난 얘기다.

수십 년, 수백 년이 지나도 현실에서 여전히 통용된다면 과거의 일이라고 할 수 없다. 문제는 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지금에 와서도 고통분담론을 경계할 뿐 그것을 극복할 대책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고통분담론이라는 낡은 자본의 레퍼토리에서 한발도 나아가지 못하고 묶인 모습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중앙일보는 2008년 12월 금속노조가 일자리 나누기에 관한 대국민 선언을 할 것이라는 내용을 1면 톱기사로 보도했다. 정작 금속노조의 일자리 나누기에 대한 논의는 공개된 것이 없는 상황에서 임금삭감 등이 포함되는 것처럼 보도됐다. 중앙일보의 보도로 금속노조 내부에서 ‘일자리 나누기’에 대한 논쟁이 불붙었다.

“경제위기에 생산은 줄고, 임금도 줄고, 그러면 비정규직을 자르고, 정규직 안에서도 일부를 희생해서 ‘나’라도 살자는 식으로 간다. 그러니 일자리를 나눠 함께 살자고 해야 하는 것 아냐?”

“무슨 소리냐. 일자리 나누기는 결국 일이 줄어든 만큼 임금도 줄어드는 양보교섭이다. 임금삭감이나 양보를 절대 인정해서는 안 된다.”

논란 끝에 결국 금속노조의 2009년 1월8일 기자회견은 알맹이 없는 내용을 나열하는 데 그쳤다. 이어 2월23일 노사민정비상대책회의가 ‘일자리 나누기’에 합의했다. 그러나 노사민정 합의는 결과적으로 ‘임금삭감을 위한 수단’에 머물렀다.

힘 없는 신입사원에 대한 연봉삭감은 여론의 지탄을 받았고 합의에 참여한 한국노총마저 부분적이나마 불만을 표시했을 정도다. 과연 이 과정에서 ‘일자리 나누기’를 저지한 것은 누구일까? 왜 중앙일보는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던 금속노조의 논의를 그토록 신속하게 보도한 것일까?

금속노조에서 시작된 ‘일자리 나누기’ 화두는 결국 맥없이 움츠러들었다. 엉뚱하게 노사민정 합의를 통해 되살아났지만 상당 부분 왜곡됐다. 정부는 일자리 나누기가 ‘제2의 금모으기 운동’이라고 부추겼다. 그러나 상황은 멈추지 않고 다시 뒤바뀌기 시작했다.

2009년 2월 초,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는 총고용 보장을 위한 방법으로 일자리 나누기를 제안했다. 하지만 새로 선임된 법정관리인은 ‘일자리 나누기’로는 현 사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2천646명을 정리해고하겠다고 발표했다.

2009년 4월22일 노동부장관은 아예 일자리 나누기를 무덤 속으로 집어 넣기 시작했다. 그의 얘기를 언론 보도 그대로 옮겨 보자.

“경우에 따라 (일자리 나누기가) 기업에 경영부담을 줘서 경쟁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
“배가 난파를 당하지 않아야 다시 살 수 있다. 배가 풍랑을 만나면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해 짐을 내려야 하듯 잔뜩 끌어안고 가라앉는 것은 무리가 아니냐는 얘기도 있을 수 있다.”

“일자리 나누기가 어떻게 보면 시장 논리에는 꼭 맞는 것은 아니다.”

“(일자리 나누기가) 반드시 모든 기업이 해야 하는 하나의 극복 체계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위기에 처한 쌍용차 노동자들은 총고용 보장을 위해 일자리 나누기를 살리려 하고, 일자리 나누기를 낚아챘던 정권과 자본은 화두를 빼앗아 왜곡시키더니 이제는 아예 폐기처분하는 희한한 스토리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결국 노동조합은 ‘고통분담론’ ‘양보교섭불가론’이라는 과거의 악몽에 붙잡혀 일자리 나누기를 정치적으로 선점할 수 있는 명분을 잃었다. 그러면 양보교섭은 절대 안 된다고 했던 만큼 실리라도 지키고 있는 것일까?

이미 수많은 현장에서 주춤주춤 물러서면서 그들의 원칙은 곳곳에서 무너지고 깨지고 있다. 명분과 실리 중에서 아무 것도 챙긴 것이 없다.경제위기 폭풍 속에서 아직 상대적으로 안전하다는 현대자동차조차 일자리 나누기는커녕 비정규직을 팽개치는 ‘일자리 독점’으로 가고 있다. ‘함께 살자’는 주장이 흔들리고 있는 셈이다.

정치적으로 무력한 노조가 취할 것은 ‘결사항전’이라는 마지막 카드다. 과연 이런 카드가 ‘비장한’ 카드가 될까? 아니면 ‘비참한’ 카드가 될까? 사후적인 평가는 쉽다. 일자리 나누기를 반대했던 사람들은 단 한 마디면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할 수 있다.

“설혹 일자리 나누기를 추진했다고 해서 정리해고와 양보교섭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웃기는 일이다. 자본은 냉정하다. 오직 노동자들의 무기는 투쟁일 뿐이다. 투쟁을 조직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다.”

이때의 투쟁이란 오직 ‘물리적 힘’일 뿐이다. 투쟁에 필요한 이슈와 명분을 먼저 틀어쥐는 정치적 능력 등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으로 치부된다. 또 하나 금속노조의 일자리 나누기 논의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이슈를 선점하고, 정치적 명분을 장악하는 지도력이 쉽게 탄생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일자리 나누기’는 양보논란에도 불구하고 이슈를 주도하는 효과만큼은 낼 수 있었다. 일자리 나누기도 팽개치고 급기야 ‘난파선론’을 들이대는 노동부장관의 한가한 얘기를 틀어막는 무기가 될 수 있었다. 노조에게는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의 전략일 수 있었다. 일자리 나누기를 둘러싼 금속노조의 논란은 당장의 후퇴는 후퇴일 뿐 미래를 대비하는 것으로 믿지 않는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 줬다.

‘함께 살기’vs ‘같이 죽기’

“회사가 당장 망하게 생겼는데 구조조정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배가 난파하게 생겼는데 몇 사람은 내려놓고 나중에 데려가는 것이 상식 아닙니까?”
2009년 3월, 절대 정리해고는 없어야 한다는 노조의 주장에 대해 모 기업의 경영자가 한 얘기다.

배가 난파될 것이니 잠시 섬에 내려놓자고 하지만 어떤 섬에 내려놓는다는 것일까? 물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 섬에 내려놓는다면 죽으라는 얘기다. 사회안전망이 튼튼해서 해고되더라도 생존의 벼랑에 내몰리지 않는다면 기를 쓰고 정리해고에 맞서 싸울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이 사회는 그런 정도의 섬이 없다. 그림(90p)에서 보듯 한국이라는 나라는 해고되면 사회적 지원이 바닥상태이기 때문에 알아서 살아야 한다. 해고되면 생계의 벼랑에 내몰릴 뿐만 아니라 무능한 남편이자 부모로 취급돼 사회적·심리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처한다.

설혹 살아남았다고 해도 다시 데리러 올 것이라고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98년 현대자동차나 2001년 대우자동차나 그런 논리로 노동자를 설득해 희망퇴직을 시켰다. 정리해고자들은 끝까지 투쟁해서 복직을 했지만, 회사의 협박과 설득 때문에 희망퇴직을 했던 사람들은 끝내 복직하지 못했다. 나중에 복직을 요구하면서 투쟁을 하지만 스스로 나간 사람들이니 복직시킬 의무가 없다고 잡아떼면 그만이다. 말이 좋아 ‘희망’퇴직이지 실제로는 ‘절망’퇴직이었다. 차라리 강제로 잘리는 것만도 못하다는 것을 자본이 경험으로 가르쳐 주지 않았던가!

아무리 어려운 기업이라고 해도 사람을 자르지 않고 운영하는 방법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인건비가 문제라면 어려운 시기에는 그만큼 임금을 줄이거나 순환휴직을 통해 인력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경영자들은 사람을 자르지 않으면 구조조정을 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한다.

“어쨌든 법원이 볼 때도 그렇고 정부가 볼 때도 몇 명이라도 잘라야 구조조정을 했다는 소리를 들을 것이고, 그래야 회생시켜 줄 것이 아닙니까? 그러지 않으면 청산됩니다. 청산되면 다 죽습니다.”

그 경영자는 밖에 보이기 위해서라도 몇 명을 잘라내야겠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청산이라는 협박카드까지 꺼내 들고 핏대를 세웠다. 대통령이나 지식경제부장관이나 늘 입에 달고 다니는 얘기가 바로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하지 않으면 지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노조가 말을 듣지 않으면 항상 ‘청산’이라는 협박카드를 내놓는다.
그런데 청산이라는 협박카드는 회사나 정부만이 쓸 수 있는 카드가 아니다.

“청산이요? 그게 회사만이 들이미는 협박카드인줄 아세요? 생각해 보십시오. 정리해고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경제위기 시대에 잘리는 것은 삶의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어차피 잘렸는데 회사가 망하든 말든 무슨 상관입니까? 만약 몇 천 명 잘라내 보세요. 밀려난 사람들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공장에 몰려가서 싸우면, 누가 선뜻 살리려 하겠습니까. 망합니다.”

합리적인 선택을 통해 사람을 자르지 않고도 비용을 줄이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그럼에도 비합리적인 선택을 한다면 비합리적인 선택의 피해자들은 비정상적인 행동을 할 수밖에 없다.

‘함께 살자’고 했는데 누군가를 죽이면서 살겠다고 한다면 잘리는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같이 죽자”는 선택이야말로 가장 합리적인 결론이다. 착한 노동자들은 정든 회사에서 잘린다고 해서 원한을 품고 회사가 망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극단적인 상황에 몰리면 모든 방법을 사용한다.

2001년 대우차의 상황이 그랬다. 정리해고자들은 끈질기게 공장진입을 시도했다. 경찰이 있어야 공장을 지킬 수 있는 회사를 누가 인수하겠는가. 노사는 결국 단계적 복직에 합의했고, 몇 년 후 정리해고자들은 모두 복직했다. 나중에 회사가 잘돼 복직한 것이라고 평가하는 것도 전혀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회사가 아무리 잘됐다고 해도 그 험한 갈등이 없었다면, 그 숱한 투쟁을 통해 우선 복직과 이후 단계적 복직합의라도 없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회사는 공장을 비정규직들로만 가득 채웠을 것이다. 희망퇴직자들의 복직이 거부된 사례가 이를 방증한다. 그럼에도 그런 상황을 되풀이하는 것은 경험으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어리석은 짓이다. <계속 이어짐>

조건준 금속노조 정책국장  labortoday@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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