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현장에서 산업재해가 발생할 경우 공사장에 들어오는 응급차는 경고음을 울리지 않는다는 얘기가 있다. 워낙 사고가 많이 일어나기 때문에 사업주가 이를 은폐하기 위해 갖은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다.

실제로 산업재해 통계를 보면 건설 산업재해 발생건수는 제조업보다 낮지만 사망건수는 훨씬 높다. 사망사고처럼 중대재해가 아니면 산업재해 발생신고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다. 손·발이 절단되는 사고가 발생해도 사업주는 법에 무지한 건설 일용직과 보상합의로 어물쩍 넘기기 일쑤다. 이번에 소개할 판례는 건설노동자가 업무중사고로 숨지자 사업주가 산재보험과 손해보험 보상금을 가로채고 유족에게 일부 합의금을 지급한 것은 무효라는 내용이다.

회사가 합의금 지급하고 산재보상금 가로채

이아무개씨는 ○○산업과 일용직 근로계약을 체결한 제관공이다. ○○산업은 2008년 이씨를 피보험자로 하는 ‘무배당 제일 좋은 직장인 단체보험’에 가입했다. 일반상해사망후유장애의 경우 7천만원, 업무중상해사망후유장애의 경우 3천만을 지급하는 조건이다. 그해 3월19일 이씨는 경남의 한 공사장에서 철선을 망치로 자르는 작업을 하다가 사고를 당했다. 작업 중이던 이씨의 뒤쪽 구조물 버팀대(2천640킬로그램가량)가 쓰러져 몸이 눌린 것이다.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같은 날 오후 10시30분 다발성 장기손상으로 사망했다.

사망 직후 ○○산업의 부사장은 이씨의 유족을 찾아갔다. 이번 사고가 이씨의 중과실로 인한 것이므로 손해배상에 관해 함부로 문의하면 오히려 불이익이 있을 것이라고 이씨의 부인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대신 회사가 2억2천만원의 보상금을 지급할테니 일체의 민·형사상 소송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합의서를 쓰도록 했다.

그러나 이씨의 사망사고로 지급되는 보상금은 산재보험(장의비 1천153만1천470원, 유족연금 1억6천940만원)과 단체보험 1억원 등 총 2억8천90여만원이며, 모두 유족에게 지급하도록 돼있다. 이씨의 부인은 ○○산업과 작성한 합의서가 무효라며 소송을 냈다.

유족과 회사의 합의, 불공정한 법률행위이므로 '무효'

이 사건의 원고는 이씨의 부인 신아무개씨다. 피고는 ○○산업과 보험회사다. 재판부는 이씨의 유족과 ○○산업 간에 체결한 합의는 불공정한 법률행위에 해당하므로 무효라고 판결했다. 판결요지는 이러하다.

“민법 제104조에 규정된 불공정한 법률행위는 객관적으로 급부와 반대급부 사이에 현저한 불균형이 존재하고, 주관적으로 균형을 잃은 거래가 피해 당사자의 궁박·경솔 또는 무경험을 이용해 이뤄진 경우 성립하는 것이다. 남편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정신적 충격에 빠져 있던 이씨의 부인과 회사가 맺은 합의는 불공정한 법률행위에 해당하므로 무효다.”

이 사건의 쟁점은 크게 두 가지다. 우선 이씨의 유족과 회사 간 약정이 급부와 반대급부 사이의 현저한 불균형이 존재하는지의 여부다. 회사는 이씨의 사망으로 산재보험과 단체보험의 보상금 2억8천800만원을 받고 대신 유족에게는 2억2천만원만 지급했다. 산재사망사고로 지급된 보험금에서 약 5천800만원을 회사가 챙긴 것이다. 따라서 현저한 불균형이 존재한다.

두 번째는 이처럼 균형을 잃은 거래가 유족의 궁박·경솔·무경험을 이용해 이뤄졌느냐의 여부다. 회사는 전업주부인 신씨에게 손해배상에 관해 문의도 하지 못하게 하면서 신속하게 합의할 것을 권유했다. 갑작스레 남편을 잃어 황망한 상태에서 신씨는 손해배상금마저 받지 못할 수 있다는 불안감에 빠졌을 것이다. 그래서 신씨는 정당한 손해배상금이 얼마인지조차 따져볼 겨를 없이 회사와 섣불리 합의를 한 것으로 보인다. 재판부는 이는 신씨의 궁박·경솔 또는 무경험을 이용해 이뤄진 불공정한 법률행위라고 판단했다.

관련판례
창원지방법원 제5민사부 2009년 5월20일 판결 2008가합4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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