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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 40년, 박인상 회고록③제1부 제3편 완벽한 승리, 그 앞에 놓인 것은?
낡은 것은 새로운 것을 이기지 못한다. 새로운 것에 취할 게 없어도 낡은 것에 버릴 게 없어도, 낡은 것은 사라지게 마련이고 새로운 것이 앞으로 나서게 된다. 하지만 새로운 것도 시간이 지나면 낡은 것이 된다. 예전에 낡은 것을 밀어냈던 새로운 것이 이번에는 낡은 것이 돼 더 새로운 것을 가로막는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낡은 것은 새로운 것을 이기지 못한다. 40년 전, 나의 노동운동은 ‘임시공’(그때에는 비정규직이라는 말이 없었다)의 투쟁으로 시작됐다. 그것은 당시의 노동운동에게는 새로운 것이었다.
언제나 처음처럼. 나는 후배들을 만날 때마다 이 말을 한다. “초심을 지켜라!” 세상의 이치는 같다. 낡은 노동운동은 새로운 노동운동을 이길 수 없다. 낡은 것이 새로운 것에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면, 고통은 모두의 것이 된다.


임시공 전원에게 해고예고통보가 떨어진 그날 서울로 올라간 지부장은 이런 일이 벌어진 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요즘처럼 핸드폰이 있던 시절도 아니었다. 다음날 권오덕과 나는 본사에서 교섭 중인 지부장에게 보고를 했고, 노조는 기왕의 교섭 내용에 임시공 전원 해고 철회를 포함시키기로 했다. 그런데 돌연 남궁련 사장이 외국에서 돈을 빌려와야 경영이 정상화된다며 외국으로 나가 버렸다.

“임시공 1천명이 아니라 가족까지 5천9백명이 죽는 겁니다”

현장은 난리였다. 발빠른 조합원들은 금요일 저녁부터 조선소 내 주요 시설물을 챙기기 시작했고, 월요일부터 현장의 모든 작업이 중단됐다.

12월 5일, 집행부는 외유 중인 사장이 돌아올 때까지 모든 것을 집행부에 일임하고 현장에 복귀해 달라고 조합원을 설득했다. 사장이 없는데 파업이 길어지면 힘에 부치지 않겠는가라는 게 집행부의 고민이었다. 하지만 조합원들은 ‘빨리 파업에 들어가야 사장이 정신 차리고 돌아온다’며 완강한 분위기였다. 그럴 만도 했다. 승전고는 계속 울려져야 했다. 회사는 전면전을 걸어온 게 아닌가. 다음날 부랴부랴 정식으로 쟁의결의를 하고 쟁위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우리 근로자 한 명에 딸린 식구가 몇입니까? 현재 우리나라 가구 평균인원이 5.9명입니다. 임시공 1천명이 죽는 게 아니라 5천9백명이 죽는 겁니다. 조선공사가 적자라고 합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도둑놈들이 있습니다. 고위간부라는 사람들이 일본에서 철강재 수입하면서 엄청나게 비싼 가격으로 계약을 하고 커미션을 챙겼다고 합니다.…”

조합원 2천여명, 본공과 임시공이 하나 되어 아우성을 쳤다. 당시 사진을 보면 다들 새까맣고 광대뼈가 툭툭 불거질 정도로 깡마른 데다 남루하기 짝이 없는 작업복을 입고 있다. 모기소리조차 낼 힘도 없어 보이는데 무슨 기운으로 하루 종일 소리를 질러대고 쉴 새 없이 연설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때 내 눈에 비친 대한조선공사 노동자들은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똑똑하고 용감한 노동자들이었다.

낮에는 규탄대회를 열고 밤에는 공장을 지켰다. 당시 조선공사에는 대만에서 발주한 어선 한 척이 인도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나라가 최초로 수출한 배라고 해서 신문에도 난 그 배였다. 조합원들은 그 배 옆에서 돌아가며 밤을 새웠다.

파업 15일째, 노조는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다. 단식농성을 결정한 것이다. 현도장에 모인 조합원만 1천여명이었다. ⓒ 매일노동뉴스

“1명을 끌어내려면 4명이 필요한데…”

‘아우성’을 친 것은 노동자만이 아니었다. 선박을 발주한 선주들도 발을 굴렀다. 고려원양의 어선(353t), 흥국상사의 유조선(3,500t) 등 주요 대형선박의 건조작업이 중단됐고, 수리를 맡긴 선박들도 발이 묶였다. 선박의 출고지연으로 배상해야 할 손해액도 하루가 다르게 늘어났다. 특히 노동자들이 지키고 있던 배는 대만에서 수주한 총 다섯 척 가운데 1호선이어서 자칫 하면 계약 자체가 깨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여론은 노동자들 편이었다. 부산 사람들은 다 우리 편이었다. 언론도 고마웠다. 부산일보는 매일 심층보도를 내보내며 노조를 지원했다. 조그만 몸집의 김수만 기자는 정말 열심이었다. 논설위원들까지 조합원들을 방문해 대화를 나누었다. “임시공 문제가 쟁점 … 법 악용, 채용·해고 멋대로 … 노조서 착취라고 반발” 조선공사 파업을 다룬 당시 부산일보 기사 제목들인데, 지금 생각해도 핵심을 정확히 짚은 것 같다. 뒤에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당시 부산의 양심적 지식인들과 조선공사 노동조합은 이심전심으로 연결돼 있었다.

사태가 장기화되자 정보부, 보안대, 경찰 등은 관계기관대책회의를 열어 강제해산을 검토했지만, 강제해산은 없었다. ‘1명을 끌어내려면 4명이 필요한데, 4천명의 경찰을 동원하는 것은 불가능’이라는 실무자의 보고 덕분이라는 사실을 나중에 들었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파업이 열흘을 넘겼지만 외국 갔다는 사장이 돌아왔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고, 사측은 강 건너 불 보듯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않았다. 회사는 일부 조합원들을 회유해 노노 갈등을 꾀했지만 그 정도 공작에 흔들릴 조선공사 노조가 아니었다.

그러나 시간을 끌수록 불리한 쪽은 노동자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솔직히 프로그램도 변변한 게 없었다. 요즘처럼 노동가요가 있는 것도 아니고, 선동할 사람도 모자랐다. 파업 15일째 되던 날, 권오덕과 나를 비롯한 젊은 간부들 몇 명은 마지막 승부수를 꺼냈다.

마지막 승부수

우리는 조합원들과 함께 굶어 죽기로 했다. 단식농성이다. 쟁의대책위원회를 열어 공식적으로 결정하면 회사의 방해공작이 거셀 것 같아 집행부, 현장 선배들과 먼저 상의해 응락을 받았다. 조합원들에게 알리는 역할은 지부장이 맡았다. 지부장의 설명이 끝나자 직장, 반장들을 중심으로 ‘가족들에게 말을 해야 하니 집에 갔다 와야 한다’는 소리들이 많았다. 지부장은 차마 반대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결국 조합원들은 옷도 껴입고 나올 겸 삼삼오오 흩어져 집으로 돌아갔다. 아직 경찰이 현장을 봉쇄하지 않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젊은 우리들의 생각은 달랐다. 혹시 있을지 모를 경찰의 야간 급습을 피해 공장을 빠져 나와 인근 여관에 몸을 숨겼지만 잠이 올 리가 없다. 조합원들이 얼마나 모일까. 내일 아침에 안 모이면 어떻게 하나. 경찰이 막는 것은 아닐까. 눈 앞이 깜깜했다. 겨울밤은 길었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여관을 나왔다. 불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문득 노조에 동정적이던 영도경찰서 정보과 김 형사가 생각났다. 전화를 돌렸더니 웬걸 집에 있는 게 아닌가. ‘경찰은 움직임이 없다. 그렇다면? 이제 조합원들만 모이면 된다….’ 절반은 성공했다는 생각에 온몸에 소름이 돋는데 수화기 너머로 김 형사의 이죽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야, 너거 뭐 때매 전화했는지 다 안다이. 별 일 없고 조합원들 모이고 있단다. 자슥들.”

무사히 모인 조합원들의 수는 1천명이 넘었다. 우리가 농성장으로 점찍은 곳은 현도장이었다. 현도장은 선박의 도면을 실물 또는 적당한 축척으로 확대해 모형 등을 만드는 작업장으로 천명이 넘는 조합원이 농성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조합원들이 모두 들어온 것을 확인한 우리는 소금 한 가마와 물을 들여놓고는, 출입구를 용접으로 막아버렸다. 외부와 연락에 필요한 단 한 곳만 남기고.

막상 단식에 돌입하자 배고픈 것보다 더 큰 문제가 생겼다. 그날 밤 기온이 뚝 떨어지더니 다음날 새벽에는 영하 3도까지 내려갔다. 그 해 들어 가장 추운 날이었다.

요즘에야 장정들이 하루 이틀 굶는다고 쓰러지지는 않을 테지만 당시는 영양 결핍 시대다. 노동자 대부분이 영양실조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추위 속에 단식 이틀째가 되자 쓰러지는 조합원들이 생겼다. 바깥에 대기하고 있던 앰뷸런스가 탈진한 조합원을 병원으로 실어 날랐다. 이불을 전해주러 공장에 들어왔다가 이 광경을 보게 된 가족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내 남편, 내 자식 살려내라’며 도로를 점거했다.

ⓒ 매일노동뉴스

“대한조선공사 노동조합 만세!”

단식농성 3일째, 마침내 남궁련 사장이 영도경찰서 경찰들의 호위를 받으며 회사로 들어왔다. 이윽고 남궁련 사장과 협상을 위해 조공지부 간부 10명이 올라갔다. 사장실 문을 걸어 닫았다. 협상이라고는 하지만, 사장이 회사에 모습을 드러낼 때 이미 노조의 승리는 예고돼 있었다. 임시공 해고예고 철회, 3/4분기 상여금 지급, 김장값 지급 등, 사장은 노조의 모든 요구를 수용했다.

협상을 끝난 뒤 사장은 조합 간부들과 함께 조합원 가족들이 모여 있는 본관 앞으로 향했다. 나는 마이크를 사장에게 들이댔다. 합의사항을 사장의 입으로 직접 발표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합의사항이 한 구절 한 구절 사장의 입에서 나올 때마다 가족들은 함성을 질렀다. “대한조선공사 노동조합 만세!” 소리가 터져 나왔다.

조합원들은 아직 현도장 안에서 농성 중이었다. 집행부는 사장의 신변을 책임질 것을 먼저 약속한 뒤 사장에게 현도장 안으로 들어가 가족들에게 했던 것처럼 조합원에게도 직접 합의사항을 발표하라고 요구했다.

사장이 들어가니 천명이 넘는 조합원이 줄지어 누워 있었다. 사장이 합의사항을 발표한 뒤 마지막으로 ‘질문 없냐?’고 묻자, 한 조합원이 ‘단식을 했기 때문에 일을 하려면 휴식이 필요하다’면서 유급휴가를 요구했다. 물론 거절할 수는 없었다. 사장은 ‘호구’에 들어 와 있는 것이었다. 노조의 완전한 승리였다.

이윽고 조합원들이 현도장 바깥으로 나왔다. 가장의 얼굴이 보일 때마다 가족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이불 보따리를 하나씩 메고 가족들에게 둘러싸인 채 공장문을 나서는 조합원들의 모습. 개선의 나팔소리도, 열병과 사열도 없는, 어쩌면 난민 행렬과도 같은 그 모습이 내 눈에는 그 어떤 승리의 진군보다 위풍당당하게 보였다.

파업 15일 동안, 지부 간부라고 힘들지 않았으랴. 우리인들 무섭지 않았으랴. 불안하지 않았으랴. 우리를 옥죄었던 그 모든 고통들은 승리의 그 순간, 모두 지난 일이 되었다. 텁수룩한 얼굴들을 매섭게 휘감던 한겨울 바닷바람조차 시원하게 느껴졌다. ‘아! 이 맛에 노동조합을 하는구나!’ 승리의 환희가 다짐으로, 한 계단 올라서는 순간이었다. 권오덕과 나, 그리고 지부 간부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이빨을 드러내고 웃었다.

“야, 우리도 남포동에 가서 소주 한잔 하자.”
지부 간부들은 그동안 고생한 일들을 지우기라도 하듯이 소주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어! 저 봐라, 봐라! 데레비에 우리 나온다. 와, 빠르네. 합의됐다고 막 나오네.”
우리들의 무용담은 끝이 없었다.

“남궁련 사장이 청와대 불려갔다 카대. 박정희가 당신 한국에서 사업할라카몬 빨리 내리가서 해결해라꼬 압력을 막 넣었다 카더라.”
“꼭 위에서 압력을 넣어야 움직이나? 대만 수출 선박 때매 똥쭐깨나 탔을 낀데 알아서 퍼뜩 퍼뜩 움직이지. 사람을 이 고생을 시키고.”

ⓒ 매일노동뉴스

다음날 공장으로 돌아와 단식농성을 했던 현도장을 치웠다. 빈 소주병이 한 가마니나 나왔다. 단식농성 시작할 때 감찰을 서면서 그렇게 꼼꼼히 살폈는데, 대체 어디로 어떻게 소주병을 들여왔는지. 감찰들 눈을 피해 어떻게들 마셨는지. 정말 못 말릴 대한조선공사 노동자들이었다.

1968년은 조선공사지부의 완벽한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정작 싸움은 이제부터라는 사실을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계속 이어짐>

박미경 객원기자  labortoday@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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