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이든 노동이든 생존게임에 빠져 들고 있다. 경제위기에 대한 모든 내용을 단순하게 요약한다면 두 가지 길 중 어느 길을 갈 것인가다. 첫 번째 길은 약육강식·적자생존·승자독식의 길이다. 두 번째 길은 함께 사는 나눔과 연대의 길이다. 첫 번째 길은 그야말로 야만의 길이다. 두 번째 길은 ‘양극화’와 ‘승자독식’을 낳은 ‘야만의 경쟁’을 넘어 사회 전체가 추구해야 할 길이다.
 
전 세계 자본의 실패
 
미국발 금융위기에 대한 원인분석이나 전망은 식상할 정도로 많다. 2008년 말이나 2009년 초에는 일부 전문가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V자형 전망’을 통해 조만간 경제가 회복될 것이라고 했다. 그 다음의 낙관적인 분석이 ‘U자형 전망’이다. 2009년에는 어렵더라도 2010년이 되면 경제가 회복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비관적인 얘기를 하는 사람들은 ‘L자형 전망’을 말한다. 장기적인 불황이 지속돼 1929년 공황보다 더 길게 갈 것이라고 우려한다.
이 과정에서 약간의 좋고 나쁨이 있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각 나라에서 앞 다퉈 경제회복을 위한 대대적인 자금 퍼붓기와 경기부양책을 쓰고 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회복될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심각한 공황으로 다시 빠질 것이라는  ‘M자형 전망’도 있다.

어떻게 예측하든 모두들 ‘시장 만세’를 부르며 ‘자유로운 경쟁’ ‘국경 없는 경쟁’을 떠들던 자본주의 정책은 망했다고 한다. 사회주의 국가에나 있을 법한 은행과 기업의 ‘국유화’가 자본주의 선두국가인 미국에서 추진될 정도다. 더 비관적인 전망을 하는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파국에 이를 것이라고 내다본다.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지만 여기서 다룰 얘기는 아닌 것 같다. 어떤 경우든 이미 닥친 경제위기와 앞으로 닥쳐올 수도 있는 공황시기를 어떻게 이겨 나갈 것인가? 경제위기 한파가 일자리를 끊임없이 위협하는 상황에서 노동조합운동은 무엇을 할 것인가? 중요한 것은 구조조정으로 당장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노동자 입장에서는 ‘자본의 실패’니 ‘노동의 위기’니 하는 거시적인 분석이 흰소리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생존게임


기업이든 노동이든 생존게임에 빠져 들고 있다. 아무리 큰 대기업이라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현금을 확보하려고 난리를 친다. 비용절감은 물론이고 구조조정의 깃발을 높이 들고 있다.

노동자들도 생존을 걱정한다. 물론 느끼는 정도는 천차만별이다. ‘가뭄에는 얕은 곳부터 마른다’고 했다. 자영업자들과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와 비정규직부터 무너지고 있다.
경영상태가 취약한 쌍용자동차를 비롯해 대기업들도 구조조정의 회오리에 휩쓸린다. 위기의 찬바람은 순식간에 확산돼 점점 뼛속을 파고든다.

장기적인 경제위기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가 모든 이들의 고민이다.
생존에도 법칙이 있다. 전국의 수많은 노동조합이 구조조정 관련 교육을 진행한다. 법적인 것도 알아야 하기에 ‘법률학교’가 열리고 ‘구조조정 대응매뉴얼’이 발간되고, ‘구조조정 대응 학교’도 개최된다.

경제위기에 대한 모든 내용을 단순하게 요약한다면 두 가지 길 중 어느 길을 갈 것인가다. 첫 번째 길은 약육강식·적자생존·승자독식의 길이다. 두 번째 길은 함께 사는 나눔과 연대의 길이다.

첫 번째 길은 그야말로 야만의 길이다. 두 번째 길은 ‘양극화’와 ‘승자독식’을 낳은 ‘야만의 경쟁’을 넘어 사회 전체가 추구해야 할 길이다. 공황까지 우려되는 상황에서 폴란드 태생의 사회주의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1871~1919)의 얘기를 빌리면 우리는 지금 “혁명이냐, 야만이냐”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세 가지 방향

최근 노동조합에서 경제위기 대응에 대한 논의가 잇따르고 있다. 노동조합이나 노동자들이 경제위기 상황에 대응하는 방향은 크게 세 가지 정도다.

첫째는 구조조정 반대투쟁이다. 이미 외환위기 과정에서 구조조정의 폭풍을 경험한 바 있다. 경제위기는 구조조정이 핵심이기 때문에 구조조정에 대한 대응을 논의하게 된다. 그런데 구조조정 반대투쟁이라는 과거의 경험은 오늘에 맞게 발전했을까? 노조 내부의 논의를 볼 때 후한 점수를 주기 힘든 실정이다.

둘째는 전혀 다른 비전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세계경제의 전망을 분석하는 전문가들은 물론이고 노동운동을 하는 노조간부나 활동가들 또한 공황을 얘기한다. 말 그대로 “100년 만에 올까 말까한 위기”라면서 심각하게 상황을 진단한다. 그러나 대응은 터무니없다. 기껏해야 매년 노조가 해 온 임금·단체협상밖에는 눈에 띄는 것이 없다.

셋째는 새로운 메시지다. 새로운 비전을 만들어 가는 것과 별개의 문제는 결코 아니다. 새로운 메시지는 말이 아닌 행동에 의해 전달되는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비전을 향한 행동계획이 있어야만 한다.

눈에 띄는 새로운 메시지는 뭘까?  2008년 12월 금속노조가 일자리 나누기를 중심으로 하는 대국민 선언을 준비하고 있다는 언론보도가 나왔다. 노조 내부에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지만 이렇다 할 선언은 없었다. 오히려 금속노조와는 전혀 다른 노사민정 합의를 통해 일자리 나누기는 임금삭감을 위한 수단으로 변질됐다.

2009년 2월28일 민주노총이 주최한 노동자대회에 색다른 깃발이 등장했다.
“저게 뭐야? 함께 살자? 전혀 금속답지 않은 구호 아냐?”
가장 투쟁적이라는 이미지를 가진 금속노조에서 내건 깃발을 본 몇몇 참가자들의 반응이었다. 붉지도 않은 연한 색깔이 선명함을 떨어뜨린다고 지적하는 조합원도 있었다. 구호에 대한 반응은 다양했다.

“나만 살자”는 것이 아니고, “정규직만 살자”는 것도 아니고, “노동자만 살자”는 것도 아닌 ‘노동자와 서민 살리기’를 위한 ‘함께 살자’라는 표현이 피부에 와 닿는 진정한 메시지가 될 수 있을까? 
 
기득권 지키기

진방스틸, 동서공업, 위니아만도, 대한솔루션, 파카한일유압……. 올해 들어 정리해고 사업장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노동조합들은 구조조정을 막기 위해 교육·토론·집회·파업을 비롯한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노동운동단체, 민주노총, 각 산업의 상급조직들은 구조조정에 맞서 “양보교섭은 절대 안 된다”는 내용의 지침을 현장에 내린다.

‘구조조정 반대’라고 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기득권 지키기’를 넘어서지 못한다. 꽤 이름이 알려진 대공장의 한 전직 간부이자 활동가는 2009년 1월12일 공개적인 글을 통해 이렇게 주장했다.
 
“……지금 우리는 현재의 위기에 대한 원인과 책임, 그리고 올바른 대책을 공개적이고 대중적으로 마련하고 ‘총고용 보장과 기득권 사수’라는 금속노조의 목표를 분명히 세우고, 현장에서부터 투쟁동력을 모아 자본의 공세에 맞서 선도적인 투쟁을 조직해야 한다.……”
 
기득권 사수? 그러나 만약 대공장 노동자들이 구조조정에 맞서 기득권을 사수하는 투쟁을 한다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노동자들에 대한 해고는 실업사태를 악화시키니 자제해야 한다는 얘기는 당연한 것인가?

2009년 4월3일 평택역. 쌍용자동차의 대규모 정리해고를 우려한 금속노조 조합원들이 시위를 했다. 당시 바로 옆 포장마차 안에서 만난 시민들은 이렇게 말했다.
 
“쌍용자동차 사람들이 데모한다고요? 우리는 관심 없어요. 우리가 겨우 100만원을 벌 때 그 사람들은 1천만원씩 보너스를 받았다고 합디다. 쌍용차 다니는 남편 덕에 턱 빳빳하게 들고 돈 쓰던 여자들이 요즘에는 우울증에 걸려 병원에 다닌다고 해요. 평택에서는 소문이 자자해요. 쌍용차 사람들은 좀 당해 봐야 해요. 우린 별로 관심 없어요.”  
 
별로 가진 것이 없는 열악한 노동자들은 물론이고 노조가 약하거나 노조가 아예 없는 곳에서는 ‘기득권’을 지킬 방법이 없다. 노동조합이 있다고 해도 규모가 작거나 조직력이 약하거나 회사의 상태가 최악인 경우 상급조직에서 아무리 강한 지침을 내린다고 해도 지킬 수 없다. 약자들이 지키기 어려운 지침은 그 자체로 더욱더 약자를 힘들게 한다. 경제위기 시대에 노조의 중앙에서 내리는 이런 지침은 의도와 반대로 조직된 노동자 내부를 양극화로 몰아갈 위험도 있다.

대기업인 G사의 경우 과거에 혹독한 구조조정을 경험했는데, 최근 또다시 회사의 경영상태가 악화돼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다. 구조조정을 걱정하는 상황에서 정작 현장의 조합원들 사이에서는 “고용만 보장된다면 학자금 지원만 빼고 다른 것을 다 내줘도 괜찮다”는 여론이 만만치 않았다. 상급조직이나 외부단체의 “양보 없이 기득권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은 비록 온전히 지켜지기 어렵다 해도 “양보할 것은 하자”며 순순히 기득권을 버리는 것보다는 후퇴 폭을 줄일 수 있다. 그렇다고 원칙적인 지침에 그친다면 자칫 원칙을 어기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현실적인 다수의 길’이 될 수도 있다.

경로의존성

구조조정이 닥치면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곤 한다. 흔히 “우리는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는데 왜 잘려야 하냐”고 한다. 어찌 보면 열심히 일만 했던 것이 죄는 아닐지라도 스스로의 권리를 포기한 것일 수 있다.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다 보니 구조조정이 닥치면 힘 없는 노동자는 ‘잘리는 것’이 냉정한 현실이다. 일만 하는 노동자가 아니라 경영에 대해 발언권을 가지고 참여하는 기업의 진정한 주인으로 거듭나야 한다.

하지만 반복되는 논란이 있다. 위기 상황에서 기업의 주인으로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의 문제다. ‘회사 살리기냐 노동자 살리기냐’는 논쟁이 벌어진다. 외환위기 때도 그랬지만 무엇을 핵심적인 목표로 할 것인가의 문제다.

“기업이 살아야 노동자도 산다”는 논리는 전 사회적으로는 “경제가 살아야 국민이 산다”는 강력한 프레임이다. 이명박 대통령도 바로 이런 프레임의 도움을 받아 당선된 것이 아니었던가.

대다수 활동가와 간부들은 ‘노동자 살리기’를 주장한다. 그러나 “노동자가 살아야 기업이 산다”는 것을 현실에서 증명하기가 너무 어렵다.

강력한 ‘경로의존성’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경로의존성이란 한번 만든 제도나 조직은 여간해서 바꾸기 어렵고 이미 만들어진 제도나 조직에 따르게 되는 현상이다. 운전대가 오른쪽에 달린 영국에서 차의 핸들 위치를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도로나 교통체계, 사람의 사고방식이 오랫동안 ‘오른쪽’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가진 것은 몸뚱이뿐이다. 때문에 노동력을 팔아 임금을 받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기업에 취직하는 것이 유일한 생존방법인 사회에서 회사가 망해서 잘리면 생계가 막연하다. 고용안정을 위해서는 회사가 잘나가야 하니 “회사가 살아야 노동자가 산다”는 말을 당연한 듯 받아들인다.  

회사가 어려워지면 어쩔 수 없이 일정하게 양보하더라도 일단 회사를 살려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경로의존성을 외면할 경우 피할 수 없는 분열에 빠진다. 몇몇 사례가 보여 주듯 원칙적으로 어떤 양보도 할 수 없다고만 주장한다면 현장 노동자들의 상당수가 노조로부터 이탈해 ‘회사 살리기 운동’에 참여하고 말 것이다.

반대로 회사를 살리는 것을 제1의 목표로 삼을 경우 일부를 자르는 한이 있어도 우선 회사를 살리자는 방향으로 의견이 모아진다.

답은 간단하다. 노동자를 살리기 위해 회사를 살리는 것이지 회사를 살리기 위해 노동자를 죽이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실제 구조조정 투쟁 과정에서는 이런 문제를 잘못 처리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100-50의 선택

노동자에게 기업 구조조정은 ‘100에서 50 빼기’의 선택이다.
예를 들어 기업이 가진 돈이 100만원이고 100명이 1만원씩을 나눠 가지며 살았다고 하자. 그런데 경제위기로 인해 경영이 악화되면서 갑자기 돈이 50만원으로 줄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세 가지의 길이 있다.
첫째, 100명이 5천원씩을 받고 사는 것이다.
둘째, 50명을 자르고 남은 50명이 1만원씩 받고 사는 방법이다.
셋째, 인력도 감축하고 임금도 삭감하는 방식이다.
당연히 자본은 세 번째 길로 간다. 35명을 자르고 임금도 3천500원씩 삭감해 50만원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42만2천500원만 소비하는 방식을 원한다.

그러면 노동자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①이 답이다.  ②, ③의 길은 막아야 한다. 고용만 보장된다면 나머지 모든 것을 희생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인력 구조조정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평소에 물어보면 대부분 ①을 선택한다. 그러나 실제 상황에서는 그렇지 않다. 구조조정을 앞둔 상황에서는 여러 가지 확인되지 않은 소문들이 떠돈다.
 
법정관리(회생절차)에 돌입한 경우에는 “○○회사로 매각한다” “청산한다더라” “○○○명을 해고한다” “○○부분을 해고한다” 등 회사 진로와 정리해고의 규모 및 대상에 대한 온갖 얘기가 난무한다. 마음이 복잡해진다. 누구든 내가 해고대상이 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하기 마련이다. 내가 잘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①을 선택할 것이다. 내가 잘리는 대상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②, ③을 선택한다.

준비된 희생양, 가벼워진 선택

외환위기 때도 정리해고를 앞둔 현장에서 “어차피 일부는 희생해야 하니 남은 사람들이 위로금이라도 좀 줘서 내보내야 한다”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 결국 그 희생양은 여성이나 힘 없는 집단이었다. 약자부터 우선 보호하는 미덕은 영화에서나 나오는 얘기일까. 

지금은 100명 모두를 지키는 것을 고민할 필요가 없게 됐다. 기업에 고용된 100명은 같은 100명이 아니라 상당수가 비정규직이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것을 나누기보다는 비정규직부터 자르는 것을 가볍게 선택하게 된다.

비정규직이 본래 쉽게 자르기 위해 만든 제도이니 너무나 당연한 것 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다. 오히려 반대일 수 있다. 비용절감을 위해서는 임금을 많이 받는 정규직을 먼저 자르는 것이 ‘합리적 선택’ 아닌가? ‘약자 우선 보호’라는 입장에서 보더라도 정규직의 양보를 통해 비정규직의 고용을 보장하는 것이 도덕적으로나 상식적으로 타당하다.

“함께 살자” “총고용 보장”은 100명 모두의 고용을 지키자는 것이다. 힘 있는 노조가 따낼 수 있다면 따내서 힘 없는 노동자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 그게 어렵다면 정규직 몫을 비정규직의 고용과 처우를 최대한 보장하는 쪽으로 돌려야 한다. 너무나 당연한 길이다.
현실에서는 여전히 ‘힘’의 논리가 크게 작용한다. 비정규직을 먼저 해고하는 기업이 훨씬 많다.
 
엉뚱한 주장도 있다. 강경한 노선을 가진 활동가들은 “정규직의 몫을 비정규직에게 돌리는 것은 자본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노동자 책임론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강변한다.

그들의 선량한 주장은 노동자 계급의식을 높이는 결과를 낳지 못했다. 자본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옳지만, 그것이 정규직 노동자의 이기심만 키울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는 최대한 기득권을 유지하면서도 비정규직을 잘라내는 데 동의한다. 그들의 주장은 오히려 이 같은 상황을 방치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양보교섭

구조조정 투쟁은 필시 양보교섭으로 끝난다. ‘100-50의 선택’은 그림에서 보듯 ①, ②, ③ 어떤 경우라도 노동자에게 피해를 준다.
미국의 AIG사례나 한국의 일부 대기업처럼 경제위기를 빌미로 임금삭감 등 노동자의 양보를 강요하면서 주주배당을 하거나 경영자에 대한 스톡옵션을 준다면 이는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다. ‘고통분담’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통의 전담’을 넘어 ‘노골적 착취’다. 착취한 것을 빼앗아 분배하는 투쟁이 필요하다. 투기자본이 매각이익금을 노리고 멀쩡한 기업에서 인력감축을 하는 경우도 있다.

경제위기 속에서 대부분의 구조조정 회사들은 판매와 매출이 줄어 적자 때문에 구조조정에 이르게 된다. 이런 회사에서 구조조정 반대투쟁이란 ‘몇 걸음을 더 나아갈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얼마나 덜 물러설 것인가’의 문제다.

투쟁의 완벽한 승리라고 해 봤자 제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이런 경우 물러서는 것은 ‘양보’가 아니라 ‘불가피한 선택’일 뿐이다. 노동자만의 고통을 요구하는 것은 합리적이지도 않고 불가피한 것도 아니다. 경영자와 주주에게도 마땅히 책임을 물어야 한다. 쌍용차와 같이 매각을 추진했음에도 기술유출을 막지 못한 정부 또한 책임을 져야 한다. 이러한 전제가 없다면 노동조합이 합리적 선택을 할 수가 없다. 불가피한 선택이 아닌 부당한 양보를 강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양보교섭’과 ‘불가피한 선택’을 구분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양보교섭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어거지’ 주장에 불과하며, 실현될 수도 없다. 구조조정 반대투쟁은 ‘새로운 것을 얻으려는 투쟁’이 아닌 ‘나빠지지 않기 위한 투쟁’이 대부분이다. 새로운 세상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다. 쫓겨나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다.
 
노동운동이 ‘구조조정 반대투쟁’을 통해 희망을 기대하면 실패한다. 공황까지 거론되는 상황이다. ‘나만 특별히 어려운 것이 아니라 모두가 어렵다면 그것은 고통이 아니다’고 한다. 이처럼 스스로 위로하고 인내한다면 노동자들은 투쟁하지 않을 것이다.

“왜, 정리해고가 여기저기서 진행되는데 전국적인 저항은 일어나지 않는 거지?” 간혹 듣게 되는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이 여기에 있다. ‘벼랑 끝 저항’은 위기가 더 깊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다.‘극복을 위한 투쟁’을 하기에는 희망과 대안이 분명치 않아 보인다.
<계속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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