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것은 새로운 것을 이기지 못한다. 새로운 것에 취할 게 없어도 낡은 것에 버릴 게 없어도, 낡은 것은 사라지게 마련이고 새로운 것이 앞으로 나서게 된다. 하지만 새로운 것도 시간이 지나면 낡은 것이 된다. 예전에 낡은 것을 밀어냈던 새로운 것이 이번에는 낡은 것이 돼 더 새로운 것을 가로막는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낡은 것은 새로운 것을 이기지 못한다. 40년 전, 나의 노동운동은 ‘임시공’(그때는 비정규직이라는 말이 없었다)의 투쟁으로 시작됐다. 그것은 당시의 노동운동에게는 새로운 것이었다. 언제나 처음처럼. 나는 후배들을 만날 때마다 이 말을 한다. “초심을 지켜라!”세상의 이치는 같다. 낡은 노동운동은 새로운 노동운동을 이길 수 없다. 낡은 것이 새로운 것에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면, 고통은 모두의 것이 된다.

조선공사에서는 본공과 임시공, 요즘으로 치면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 일을 하고 있었다. 1950년대 국가가 대주주로‘반관반민’의 주식회사였던 시절에도 임시공은 있었다. 하지만 임시공이 본격적으로 늘어난 것은 1962년 군사정권이 조선공사를 국영화하면서부터다.

 

불어오는 ‘재건’바람, 늘어나는 임시공

 

군사정권은 온 나라에‘재건’바람을 일으켰다. 군사정권은 조선산업을 일으키기 위해 당시에는 국내에 하나뿐이던 강선조선소인 대한조선공사를 재건하기로 마음먹었다. 국영화하면서 8억원을 증자했고, 제1차 경제개발계획(1962~1966) 기간 동안 총 64억여원을 투자한다는 계획이었다. 일감 부족, 만년 적자에 시달리던 조선공사로서는 가뭄끝에 단비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곧바로 상황이 좋아지지는 않았다. 설립된 지 20년이 넘도록 사실상 투자는 전무했던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 때문에 조선공사는 시설 규모나 기술력 등에서 너무 낙후돼 있었다. 이문이 많이 남는 큰 배는 만들 엄두도 내지 못했고, 소형선박 역시 단가를 맞추는 게 쉽지 않았다.
 

당시 국내 해운업자들 사이에서는 조선공사 배가 국제시세보다 10% 이상 비싸다는 게 상식이었다. 연안여객선이나 상선을 운영하는 민간업자들은 조선공사에 배를 발주하기보다는 외국의 낡은 배를 수입해 쓰는 것을 선호했다.
 

보다 못한 군사정권은 이른바‘계획조선’이라고 해서 민간업자에게 저리의 금융을 제공하고 조선공사에 배를 발주하게끔 했다. 마침 제동산업이라고, 사모아를 기지로 하는 원양어업 회사가 떼돈을 벌어들이는 경사가 겹쳐 수백톤급 어선들의 발주가 줄을 이었다.“ 바다가 돈이다”라는 구호도 생겨났다. 

 

이에 힘입어 1962년에 4천636G/T였던 조선공사의 선박건조량은 1966년 1만7천683G/T으로 네 배 가까이 늘어났다. 당연히 일감도 늘어났다. 그러나 조선공사는 본공을 더 뽑지 않고 모자라는 일손을 임시공으로 때우는 정책을 폈다.
 

1963년에 173명이던 임시공이 1967년에는 1천348명으로 여덟 배나 늘어났다. 반면, 같은 기간 본공은 1천51명에서 877명으로 오히려 줄어들었다. 조선공사노조가 직면한 첫 번째 도전이었다.

 


 

“본공들은 새 수건으로 광내고 영화 귀경까지 하고 좋것타~”

1965년 3월10일 근로자의 날이 되자 회사는 직원들에게 수건과 영화관람권을 줬다. 그런데 임시공은 쏙 빼놓았다. 당시 본공∙임시공 할 것 없이 조선공사 노동자 가운데 절반 이상이 영도에 살았다. 
 

좁다면 좁은 영도 바닥이다. 요즘 울산 북구 같은 곳과 비슷한 사정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어느 집 아이는 아빠가 회사에서 받아 온 영화관람권을 들고 좋아서 깡총깡총 뛰며 돌아다니는데, 옆집 아이는 그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어야 하니 부모 마음이 미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작은 것들이 쌓이고 쌓이면 돌이킬 수 없는 미움과 질시가 된다. 

해마다 임시공들이 자꾸만 늘어나는 통에 노동조합 집행부는 그렇지 않아도 위기감을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아니 노동조합의 위기는 고사하고 인간에 대한 대접이 이래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집행부는 차근차근 작전을 세웠다. 우선 임시공들을 지부 소속이 되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해 7월, 조선공사지부는 부산시장 앞으로 한 통의 질의서를 보냈다. 임시공의 조합 가입에 관한 질의였다.
 

“…일용이나 상용으로 고용된 임시공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임금급료 기타 이에 준하는 수입에 의하여 생활하는 근로자인 경우 근로기준법에 의한 소정의 권익이 보장돼 있음은 물론 노동조합법에 의한 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을 가지는 것이므로 당해 사업장에 이미 조직된 노동조합의 규약에 임시공의 조합 가입을 제외하고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임시공이라 할지라도 노동조합에 가입할 수 있는 것…”

이 답변서가 앞으로 어떤 의미를 갖게 될지 몰랐던 것일까. 아무튼 부산시는 지부가 보낸 질의서에 선선히 답변서를 보내 왔다. 집행부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일찍이 4월 혁명 직후‘임시공의 본공화’를 위해 싸웠던 노동조합이었다.

지부 규약은 임시공 가입의 길을 처음부터 열어 놓고 있었고, 본공들 역시 반대를 하지 않았다.

임시공들이 조공지부에 가입하려는 움직임에 놀란 회사는 이를 막으려 했다. 그러나 부산시로부터 답변서를 받은 지부는 든든했다. 지부가 회사를 부당노동행위로 고발하겠다고 경고하자 회사는 그 뒤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지 않았다.

실은 회사는 다른 문제로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그것은 사내 비리였다. 군사정권은 군인 출신 이영진 사장에 이어 전 해병대사령관 김두찬씨를 사장에 임명해 회사 기강을 바로잡으려 했지만 부정은 끝이 없었다. 
 

오죽했으면 구매과에서 영수증을 받아다 국제시장에 나가 시세를 확인하는 게 노동조합의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였을 정도다. 임시공들은 속속 조합에 가입했고, 1967년에는 양성소 출신의 젊고 실력 있는 임시공들이 주축으로 자리 잡았다. 지부 대의원의 절반 이상을 임시공들이 차지하게 됐다.

임시공, 조합 속으로 들어오다

1966년 조공지부는임시공의 단체협약 적용을 요구했다. 사측은 ‘말도 안 된다’며 아예 상대도 하지 않으려 했다. 지부는 서서히 투쟁수위를 높여 가기 시작했다. 같은해 7월24일과 25일, 이틀에 걸쳐 본공과 임시공 전원이 잔업거부투쟁에 들어갔다. 본공들은 “야, 임시공 너거 때문에 이기 뭔 고생이고?”라며 툴툴댔지만, 그게 전부였다. 다들 배가 고팠던 시절이었다. 요즘 후배들이라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일 게다.

그러나 ‘본공과 임시공을 하나로 묶는다’는 전략은 겨우 한 걸음을 내디뎠을 뿐이었다. 지부는 쟁의 결의를 이끌어 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행동으로 옮기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회사의 태도가 완강한 것도 이유였지만 아직은 노조의 준비 태세가 부족했다.

조선공사지부 집행부는 한꺼번에 모든 것을 다 바꿀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지부는 ‘임시공의 단체협약 적용’을 연례행사처럼 계속 요구하는 한편, 사소하다면 사소하다고 할 수도 있는 현장의 작은 차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맞섰다. 수건 한 장도 양보하지 않았다. 1966년 8월, 군사혁명의 스폰서였던 고려원양 이학수 사장이 발주한 어선 광명호가 진수됐다. 선주가 진수 기념으로 수건을 돌렸는데, 역시 임시공의 것은 없었다.

지부는 즉각 수건 지급을 보류시키고 선주와 직접 교섭했다. 광명호를 만들 때 본공과 임시공이 함께 일했으니 수건을 줄려면 다줘야 한다는 얘기가 본공들 사이에서 먼저 나왔다. 결국 임시공들에게도 수건이 지급됐다. 조합원들은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수건을 집으로 갖고 갔다.

집행부는 1967년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단독 출마였다. 다시 집행부를 맡게 된 우리는 이만하면 때가 됐다고 판단했다. 8월7일, 조공지부는 6개항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부산지방노동위원회에 쟁의조정을 신청했다. 요구조건은 △임금 5천968원 일괄 인상(임시공 포함) △전체 종업원 급호(호봉) 조정 △임시공 단체협약 적용△용해공(전기등∙용선로) 연장근로수당 지급 △유급 하계휴가 실시(임시공 포함) △보수규정 개정에 따른 현직 반장 정원 감축 금지 등이었다.

‘임금 5천968원 일괄 인상’이라는 요구조건은 임시공과 본공 사이의 임금격차를 줄이기 위한 방편이었다. 몇 퍼센트씩 정률로 인상하게 되면 본공과 임시공의 임금격차는 줄어들지 않는다. 하지만 얼마씩 정액으로 인상하면 2만원을 받는 본공보다 1만원을 받는 임시공이 더 많은 혜택을 받게 된다. 본공들도 이것을 이해했다. 회사는 새로운 안을 제시했다. 첫술에 배가 부를 수는 없다. 지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합의안에 도장을 찍었다.

… △임시공에 대하여 사용자의 귀책사유로 인한 휴업 시에는 평균임금의 60% 해당액을 휴업수당으로 지급한다 △임시공에 대하여 국경일(광복절∙개천절), 공사창립기념일은 유급휴일로 정한다 △종업원에게 하계휴가를 3일 인정하되 그 가운데 2일은 유급으로 한다(임시공 제외) △임시공이 업무상 상병으로 인한 요양기간 중에는 평균임금의 100/100(산재보험수당 포함)에 해당하는 금액을 휴업수당으로 지급한다 △급호 조정은 68년 3월13일까지 기능검정을 실시하고 시행일자는 68년 1월1일로 한다 △임시공에 대한 임금조정은 67년 10월31일까지 실시하고 시행일자는 67년 10월1일로 한다 △상반기 현재 적치된 연월차 휴가에 대하여 단체협약 제24조 및 25조에 정하는 바에 따라 통상임금의 해당액을 추석전에 현금으로 지급한다. …

우리의요구조건이 다 관철되지는 않았다. 임금 정액 인상도 그랬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믿었다. 노동조합 활동에서 집행부의 의지와 실천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현장의 참여다.


본공이 선배라면 임시공은 후배
 

조선공사 본공들이 노동자의식이 높았기 때문에 임시공과 함께 투쟁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먹고살기가 너무 힘든 때였다. 부산에서는 조선공사 본공이 되기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다는 말도 있었다. 요즘 정규직 노동조합 조합원들 사이에서 나오는 얘기들이 그때라고 없었을까. 그때도 있1었다. 본공들은 나이가 많았고 임시공들은 어렸다. 임시공을 본공으로 전환시키고 나면 회사가 어려워질 때 누구더러 나가라고 하겠는가.

앞에서도 말했듯이 노조의 전략은‘본공과 임시공은 함께 가야한다’는 것이었다.

이 전략을 바탕으로 본공을 설득했고, 임시공을 이해시켰다. 설득은 인간적 도리나 의리로 출발했다. ‘그래도 조선공사에서 같이 근무하는데 임시공은 휴일도 없다’, ‘ 가족들이 뭐라고 생각하겠느냐?’, ‘ 영도 바닥이 뻔한데’, 이렇게 말하면 본공들은‘그거는 일리가 있다’고 받았다. 그리고는 ‘이름만 본공, 임시공으로 다를 뿐이지 노동자로 같이 사는데 함께 가야 하지 않겠느냐’로 결론이 모아졌다.

임시공에게는 ‘당장 본공과 똑같이 되기는 어렵다’, ‘ 점진적으로 개선시켜 나가자’고 했다. 조공지부는 사측에‘임시공의 본공화’를 끊임없이 요구했다. 그것은 지부의 목표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우리는 임시공 전원을 한꺼번에 본공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임시공의 점진적인 본공화’, 이것은 본공과 임시공의 의식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본공이 임시공을 자신의 후배 노동자, 일종의 ‘예비 본공’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또 하나 중요했던것은 회사 내 크고 작은 잦은 분쟁의 선두에 선 게 임시공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본공들은 투쟁을 거듭하면서 임시공들이 노동운동의 ‘화선(火線)’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본공들은 후배들을 위해 작은 양보에 인색하지 않았고, 임시공들은 본공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기다릴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조선공사 노동조합의 힘이었다. <계속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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