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직에게도 강력히 작용하는‘고용불안증’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고용게임’을 강요한다. 정규직의 선택은 뻔하다. 비정규직을 고용의 방패로 삼는다. 결국‘고용게임의 링’위에서 노동자는 서로에게 경쟁자가 된다. 자본이 이런 상황을 방치할 리 없다. 정규직을 비정규직의 표적으로 세우는 것이다. 결국 범인이 바뀌었다. 비정규직 문제와 사회양극화의 주범은 자본이 아니라 정규직 노동자가 된 것이다.

 

오래된 악몽

 

동족상잔의 비극이라는 얘기가 있다. 같은 민족끼리 싸워서 200만 명 이상이 죽은 그 참혹한 6∙5 전쟁을 이렇게 말한다. 그 어떤 사건과도 비교할 수 없는, 다시는 없어야 할 일이다.

98년 외환위기와 함께 찾아온 기아차∙현대차∙만도∙대우차를 비롯한 구조조정을 돌이켜 볼 때마다  ‘동족상잔의 비극’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대부분의 기업이 그랬다. ‘우리는 한가족’이라면서 ‘한마음, 한뜻’을 늘 외쳤다. 현장의 부서 회식 때라도 되면 관리자와 노동자 할 것 없이 형님∙동생이라면서 가족처럼 지내자고 했다. 하지만 경제가 어려워지자 갑자기 태도가 바뀌었다.

 

“배가 난파하려는데 모두가 살려면 일부는 뛰어내려야 한다.”

누군가는 배(기업)에서 버려져 바다에 내동댕이(정리해고)쳐지는 상황, 난파선의 아비규환이 시작됐다. 평소에는‘한가족’이라면서 온갖 난리를 치다가 어려워지니까‘짐’이라며 버렸다.

 

제대로 된 선장과 선원들이라면 결코 승객을 버려선안 된다고 호소했다. 배와 함께 침몰하더라도 승객을 먼저 구조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야멸차게 버렸다. 집안이 어렵다고 자식을 버리는 모습과 다를 바 없는 자본의 냉정한 모습을 똑똑히 봤다.

 


정리해고된 노동자들은 절망에 못지않게 배신감과 분노를 억누를 수 없었다. 정리해고 통보를 받은 조합원들은 조합사무실로 통지서를 가지고 집결하라는 지침을 받고도, 대부분 조합사무실로 오지 않았다. 어디로 갔을까? 바로 현장이었다. 현장의 관리자 사무실을 부수며 그 분노와 배신감을 표현하는 모습을 수없이 목격했다.

 

노동의 분열도 가슴 아팠다. 대부분은 단결해 싸웠다. 그러나 살아남은 자와 잘린 자 사이에는 큰 장벽이 있었다. “일부가 희생할 수밖에 없다”거나“회사가 잘되면 다시 불러들이면 된다”며 자신을 합리화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일부이지만 노동조합의 간부까지 했던 사람들의 그런 행동에서 절망을 느꼈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다’는 말이 그토록 사무친 적은 없었다. 잘될 때 부르고 어려울 때 버리겠다는 사람들이 동료인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려울 때 버려진 사람들은 그 어려움을 어떻게 견디라는 것인지…….

 

참혹함은 단지 공장 안 문제에 그치지 않았다. 목숨을 넘나들며 투쟁을 했던 한국 민주화투쟁의 영웅으로 칭송받던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한 98년, 만도기계의 정리해고 반대투쟁은 경찰력에 의해 짓밟혔다. 노벨평화상까지 받은 김 대통령은 2001년 대우자동차의 정리해고 반대를 외치던 노동자들을 또다시 경찰력을 투입해 진압했다. 민주주의의 화신인 대통령이 과거의 독재시대에나 봤던 충격적인 장면을 경험하게 한 것이다.

 

경제위기의 찬바람이 몰아치고 있는 요즘, 8년 전 악몽이 반복되려 한다. 구조조정이 시작되고 또다시 난파선의 아비규환의 조짐이 보인다. 법정관리에 들어간 기업의 현장이 뒤숭숭하다.

“간접부서가 너무 많으니 그쪽 좀 내보내야 하는 거 아냐?”

“정년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이 나가 줘야 하는 것 아냐?”

“비정규직부터 자를 수밖에 없다.”

‘함께 살자’는 길이 아니라 나라도 살기 위해 너도나도 희생자를 찾고 있다. 살기 위해서는 일부가 뛰어내려야 한다는 난파선의 악몽이 되살아나려 한다.

 

고용불안증


악몽은 외환위기가 지났어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한판 미친바람 같은 경제위기와 구조조정이 휩쓸고 갔지만, 혹독한 경험은 노동자들의 가슴 속에 그대로 상처로 남았다. 상처는 단순히 개인의 마음 속에 보이지 않는 무엇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 놓았다. 노동자들의 마음에 ‘새로운 창=새로운 프레임’이 생긴 것이다.
 

첫 번째의 창은‘고용불안증’이다. 고용불안증은 정리해고라는 과거의 혹독한 악몽이 키운 것이다. 외환위기를 겪기 전만 해도‘대마불사’라고 했다. 그랬던 대기업이 무너졌고 안정된 직장이라는 대공장 노동자들의 고용도 한순간에 흔들렸다. 대기업을 포함한 전체 노동자들에게“언제 잘릴지 모른다”는 생각이 자리 잡았다.

 

고용불안감을 한시라도 떨쳐 버리기 힘든 세상이 됐다. 바로 곁에서 일하는 비정규직을 면서“잘리면 언제라도 저렇게 된다”는 것을 깨달을 뿐이다.

미래에 대한 우울한 예측도 언제든지 잘릴 수 있다는 불안을 키웠다.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세계적 차원의 경쟁이 일어났다. 중소사업장은 언제든지 중국이나 동남아로 공장을 이전할 수 있게 됐다. 굴지의 대기업들이 세계 곳곳에 공장을 짓게 되면서 그동안 생산하던 물량이 언제든지 해외로 빠져 나갈 수 있다는 얘기들이 떠돌았다.

 

노동조합 간부나 활동가들도‘고용불안’의 위기감을 부추기는 데 한몫했다.“ 상시적 고용불안에 응하기 위해 노조로 뭉쳐야 한다”고 외쳤지만, 대안 없는 위기에 대한 강조는불안감만 키웠다.

조합원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늘 1순위에‘고용안정’이 있다.

 

“고용만 보장된다면 뭐든 한다”는 생각, 언제 잘릴지 모르기 때문에“있을 때 벌자”는 생각이 뼛속 깊이 박혀 있다. 오륙도∙ 사오정∙삼팔선∙ 이태백……. 외환위기 이후 고용불안이 만성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공장감옥

 

두 번째 창은 공장감옥이다. 공장감옥? 과도한 표현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정리해고되거나 희망퇴직을 한 노동자들은‘통닭집’,‘ 음식점’을 차렸지만 대부분 실패했다.

일자리가 늘지 않는 세상에서 취업도 어려워졌다. ‘공장에서 잘린다’는 것은 곧 삶의 벼랑에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공장은 어쩌면 삶의 벼랑에서 구해 주는‘천국’일지 모른다.

 

노동자의 삶은 갈수록 공장에 더 얽매이게 됐다. 애초에 노동자는 몸뚱이밖에 없기에 노동하고 임금을 받아 살아왔다. 여기에 구조조정을 겪으면서 언제 잘릴지 모르니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더 악착같이 일하게 됐다. 밀려올 고용불안에 대한 유일한 보험인 셈이다. 노동강도가 강화돼 근골격계 질환이 늘어도 참으며 일한다. 몸이 골골대도 보약 먹어가며 잔업∙!특근을 한다. 노동시간을 단축해서 주 40시간, 주 5일제가 도입돼도 주말특근을 한 대가리라도 더 하려고 한다. 일거리가 부족해도 노조에게 잔업∙특근을 어떻게든 만들어 내라고 요구한다.

 

이제 공장에 모든 걸 의존해 살아온 노동자는 마치 무기징역을 받고 평생을 감옥에서 지내던 죄수가 가석방돼도 바깥세상에서 살수 없어 결국은 스스로 목숨을 끊듯이, 공장에 갇힌 장기수의 신세가 되고 만다.(영화 -쇼생크 탈출)

 


감옥∙-군대∙공장∙학교는 따지고 보면 비슷한 점이 꽤나 많다. 철저하게 규율에 의해 움직인다. 하루 일과가 비슷하게 돌아간다. 일어나는 시간, 일과 시작 전 조회, 같은 시간에 같은 메뉴 같은 식판을 들고 밥을 먹는다. 규율을 어기면 그에 따른 체벌이 이미 정해진 규칙에 따라 시행된다.


공장노동을 하지 않으면 더 이상 살 수 없는 노동자의 신세를 새장 밖에서는 먹이를 구하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새장으로 돌아와야만 하는‘갇힌 새’라고 하면 과장일까? 87년 폭발한 노동운동이 높이 내걸었던 ‘노동해방’의 깃발은 사라지고 있다. 거꾸로‘노동속박’이 강화된 현실이 다가왔다. 마르크스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얘기해 온‘임금노예’의 세상이 강화되고 있는 것이다.

경기장에서 일어서기
 

세 번째 창은‘경기장에서 일어서기’다. ‘경기장에서 일어서기’란, 경기를 구경하던 관중 속에서 한 사람이 더 잘 보려고 일어서게 되면 너도나도 일어서 결국 모두 서서 구경하게 되는 모습을 말한다. 모두 편히 앉아서 볼 때나 모두 일어서서 볼 때나 보는 시야는 결국 같다. 그럼에도 고단하게 서서 봐야 하니 모두가 불행해진 꼴이다.

 

흥청망청하다 폭삭 가라앉게 된 세계 자본주의가 바로 이런 모습이다. 미국의 부시 전 대통령은 경제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부자 감세 정책을 폈다. 돈이 남아도는 부자들은 더 큰 집과 더 비싼 물건을 소비하게 된다. 부자들만 그럴까?

 

중산층도 소비기준이 달라진다. 소득은 늘어나지 않았는데 더 크고 더 비싼 물건을 사게 된다. 가난한 사람들은 돈이 없으니 더 큰 집을 살 수 없다. 그런데 신용도가 낮아도(서브프라임) 대출을 해 줬다. 집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거품이 일었고 금리를 높이니 돈 갚을 길 없는 사람들이 신용불량자가 됐다. 대출해 준 투자은행도 무너졌다. 이것이 바로 전 세계적 금융위기다.

 

여기에 ‘경기장에서 일어서기’라는 원리가 작용하고 있다. [부자 아빠의 몰락](로버트 H. 프랭크∙2007∙창비)에서 저자의 설명을 요약하면 이렇다.

먼저 다음의 두 세계 중 어떤 세계를 선택할 것인지 질문을 던진다.

 


약간 다른 내용으로 다음 두 세계 증 어떤 세계를 선택할지 묻는다면 어떻게 답할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세계1’을 택하고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세계 2’를 선택한다고 한다.

 


집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지위재’이고, 따라서 남보다 더 큰 집에 사는가가 중요한 것이지 내가 절대적으로 더 큰 집에 사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휴가는‘비지위재’다. 남보다 많이 쉬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더 많이 쉬는 것이 중요하다.

아파트가 많은 신도시에서 아이들은 몇 평짜리 아파트에 사는가가 중요하다.

 

차도 마찬가지다. 크고 비싼 차인가 작고 싼 차인가는 곧 신분을 나타내는‘지위재’이기 때문이다. 부자들이 더 크고 비싼 지위재를 사면 중산층도 소비의‘준거’가 바뀌어 더 큰 집을 사게 되지만 그 결과 행복이 증대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미국인이지만 단지 미국만의 얘기는 아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 원리가 작용한다.

 

죽어라 일해서 버는 돈은 갑자기 뛴 집값에 비하면 껌값에 불과하다. 그러니 대출을 받아서라도 아파트를 사게 된다. 부동산투자는 일부 복부인의 행위가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부동산투자에 목을 맨다. 뿐만아니다.

 

“나도 대출을 받아서 가족들이 아파트 사는 것을 도와주기도 했다. 그러니 대출이자 갚으려면 더 많이 벌어야 한다. 잔업∙특근이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한푼이라도 더 벌어야 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다른 건 몰라도 성과금 조금 더 받는 것을 바라는 조합원들이 많아지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A자동차회사의 조합원)

 

주식으로 수억원씩 벌었다는 소문에 나도 좀 여유가 있으면 그쪽으로 가지 않을 수 없다. 자본주의 투기경제는 일부의 부동산과 주식투자에 머물지 않고 사회전체를 투기에 끌어들였다. 경기장에 앉아 있던 모두 를 일어서게 한 것이다.

 

아파트 평수가 늘고 주식투자를 할수록 행복해지는 가? 아니다. 오히려 장시간 노동을 해야 한다. 가족과 함께할 시간은 줄어들고, 부부간 의사소통이 힘들어지며, 자식과의 유대감이 약화될 수밖에 없는 삶으로 빠져 든다.

 

일부만 일어서기

 

네 번째 창은‘일부만 일어서기’다. 문제는‘경기장에서 일어서기’의 원리가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모두가 다 일어서서 볼 수 있다면 비록 다리는 아플지라도 보는 시야는 같을 수 있다. 모두 일어서서 보는데 일어서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 경기를 보려고 경기장에 왔건만 모두 일어서서 보는데 일어설 수 없으니 경기를 볼 수 없다.

 

통계를 살펴보면 양극화∙빈부격차를 손쉽게 확인 할 수 있다. 단지 사회 전체만이 아니라 노동 내부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난다.정규직 중에서도 대공장만이 일어서기를 할 수 있을 뿐이다. 다수의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들과 비정규직들은 시야가 막힌 채앉아 있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정규직 대비 비정규직 임금을 보여 주는 통계청 자료는 근속연수 등을 무시한 비교이기 때문에 정확하다고는 볼 수 없다. 그렇지만 노조가 직접조사한 자료에서도 격차는 분명하게 확인된다.

임금비교만이 아니라 4대 보험을 비롯하여 단체협약을 통해 보장되는 후생복지제도의 차이는 물론이고 노조 유무에 따라 달라지는 작업장 권리의 차이까지 고려한다면 차별의 심각성은 더 커진다.


1등보다 미운 10등의 법칙
 

다섯 번째 창은‘1등보다 미운 10등의 법칙’이다.

빈부격차의 확대는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에게도 치명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노동자 내부의 격차가 커져 서로 단결하기 어려운 조건이 발생한다는 점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결코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상당수의 사례가 보여 주듯이 노동현장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간 갈등이 심각하다. 현장에서만이 아니다. 사회적으로 모든 문제에 대한 책임이 마치 대공장 정규직 노조에 있는 것처럼 왜곡된다. 조금만 생각한다면 문제는 쉽게 풀릴 듯하다. 언제든지 해고할 수 있고 더 싸게 쓸 수 있는 노동자를 필요로 한 자본이 비정규직을 확산시킨 주범이 아니던가. 대공장 정규직을 비난하는 것은 누가봐도 자본의‘책임 떠넘기기’다. 왜 이 거짓말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일까?

 

바로 ‘1등보다 미운 10등의 법칙’때문이다. 11등을 하는 사람에게는 1등이 누구인지 중요하지 않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앞에 있는 10등이다. 같은 현상이 노동자 사이에서도 벌어진다. 비정규직을 만든 자본은 비정규직에게는 먼 1등의 위치에 있다. 비교대상은 매일 현장에서 같이 일하는 정규직이다.

 

정규직에게도 강력히 작용하는‘고용불안증’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고용게임’을 강요한다. 경제가 성장해도 일자리는 늘지않고 언제 닥칠지 모르는 해고의 불안 속에서 정규직의 선택은 뻔하다. 비정규직을 고용의 방패로 삼는다. 결국‘고용게임의 링’위에서 노동자는 서로에게 경쟁자가 된다.

 

자본이 이런 상황을 방치할 리 없다. 정작 비정규직을 확산시켜 온 자신들은 뒤로 쏙 빠진다. 대신 정규직을 비정규직의 표적으로 세우는 것이다. 2009년 2월11일 중앙일보에 실린 한 교수의‘시론’을 보자. 제목은‘민주노총이불신 받는 진짜 이유’다.

 

(생략) …… 우리 사회의 현안인 소득 양극화 문제를 생각해 보자. 양극화 문제의 근저에는 민노총으로 대표되는 대기업 정규직 노동조합이 있다. 대기업 노동조합이 막강한 교섭력을 바탕으로 생산성을 초과하는 임금인상을 요구한다. 대기업은 … 과도한 임금인상으로 인해 발생한 비용을 낮은 납품단가 형태로 중소기업과 하청기업에 전가한다. 중소기업과 하청기업은 납품단가를 맞추기 위해 근로자의 임금을 삭감하거나 고용을 줄인다. 이러한 왜곡된 노사관계와 산업구조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임금격차를 발생시키고 소득 양극화의 주된 원인으로 작용하여 왔다. 따라서 민노총을 중심으로 한 대기업 노동조합의 과도한 교섭력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소득 양극화 문제는 해결되기 어렵다. …… (생략)

 

결국 범인이 바뀌었다. 비정규직 문제와 사회양극화의 주범은 자본이 아니라 정규직 노동자가 된 것이다. 단순히 한 교수의 얘기나 보수언론의 얘기를 넘어 사회적으로 정규직 노동자를 양극화의 주범으로 바꿔치기하고 있는 것이다.

 

2001년 5월1일 광주의 캐리어 공장에서 농성 중이던 비정규 노동자들을 일부 정규직 조합원들이 가세해 폭행했던 사건과 2007년 8월31일 기아차 화성공장에서 집회 중이던 비정규직을 정규직들이 폭행한 사건은‘1등보다 미운 10등의 법칙’이 아예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적대적인 충돌로 극단화되는 모습을 보여 줬다.

 

가장 치졸하고도 악랄한 체벌이라고 할 수 있는‘서로 뺨 때리기’를 닮았다. 군대나 학교에서 가해졌던‘서로 뺨 때리기’는 학생이나 병사들을 불러내 서로의 뺨을 때리게 하고 약하게 때리면 벌

칙을 주는 체벌방식이다. 서로 세게 치게 함으로써 학생과 병사 내부에 씻을 수 없는 상호 모멸과 적대감을 남긴다.

 

자본은 슬쩍 빠지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같은 노동자라는 생각을 까맣게 잊은 채 서로를 공격하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계속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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