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것은 새로운 것을 이기지 못한다. 새로운 것에 취할 게 없어도 낡은 것에 버릴 게 없어도, 낡은 것은 사라지게 마련이고 새로운 것이 앞으로 나서게 된다. 하지만 새로운 것도 시간이 지나면 낡은 것이 된다. 예전에 낡은 것을 밀어냈던 새로운 것이 이번에는 낡은 것이 돼 더 새로운 것을 가로막는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낡은 것은 새로운 것을 이기지 못한다.

40년 전, 나의 노동운동은 ‘임시공’(그때는 비정규직이라는 말이 없었다)의 투쟁으로 시작됐다. 그것은 당시의 노동운동에게는 새로운 것이었다. 언제나 처음처럼. 나는 후배들을 만날 때마다 이 말을 한다. “초심을 지켜라!”세상의 이치는 같다. 낡은 노동운동은 새로운 노동운동을 이길 수 없다. 낡은 것이 새로운 것에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면, 고통은 모두의 것이 된다.


 

1968년 11월29일 금요일 오후. 대한조선공사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듯했다. 불꽃을 뒤집어쓴 채 강판을 잇고, 주물틀에 쇳물을 붓고, 선반에 쇳덩이를 물리고, 공구와 자재를 나르는 손들. 2천명이 넘는 노동자들은, 언제나 그랬다는 듯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군사정권이 들어선 뒤 일감은 확실히 늘었다. 설립된 지 30년이 지난 국내 유일의 강선(鋼船) 조선소라지만, 현장이 놀지 않고 돌아가는 것은 자유당 때였다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3년 전인가, 500톤급 상선 동명호를 진수할 때는 대통령까지 행차했다. 일이 많다는 것은 노동자에게는 어쨌든 고마운 일이다.
 

“싹 다?!?”
 

작업을 재촉하는 고함소리와 호각소리가 요란하다. 어쩌면 지금이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이때쯤이면 노동자의 마음은 절반은 집으로 가 있다. 하지만 내일은 내일의 일이 있다. 초겨울의 짧아진 해가 영도다리에 걸려 있다. 헤밍웨이의 소설처럼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 그런데 그 해는 누구의 것일까. 일손을 정리하는 노동자의 마음은 그래서 복잡하다.

하지만 조선공사 노동자들의 마음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정작 다른 데 있었다. 일감은 늘었지만 회사는 여전히 적자였다. 결국 회사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견디다 못한 정부가 회사를 ‘한국의 오나시스’라 불리던 극동해운 사장 남궁련에게 넘긴 것이다. 국영 대한조선공사가 민영화된 것이다. 그게 불과 20일 전의 일이다.
 

‘사장이 바낏다는데 밸 일은 없을라나….’

갑자기 무슨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환청 같던 그 소리는 현장으로 가까워질수록 마치 비탈을 구르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노동자들의 고막을 때렸다.

“싹 다?!?”
 

이날 오후 5시 5분 전, 대한조선공사는 임시공 1천175명 전원에게 해고예고통보를 했다. 이 소식은 선박공장·기계공장·주물공장 등 현장으로 순식간에 퍼졌다. 놀라움으로 휘둥그레진 노동자들의 얼굴이 불신의 표정으로 가득 찼다.
 


‘올스톱’된 현장
 

조선공사가 민영화되면서 현장에서는 해고에 대한 불안감이 있었던 게 사실이었다. 주인이 바뀌니 관리자들의 눈빛부터 달라진 것도 그런 예감을 부채질했다.

일부 조합 간부들은 인사관리 실무자들에게 임시공 인원감축이 있을지 모른다는 정보를 듣기도 했다. 그러나 조합이나 현장이나 바짝 엎드려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작업물량이 계속 늘어나는 게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적자를 면치못하는 회사 형편이 노동자들의 마음 한구석을 불편하게 만들었다고는 해도, 몇 년 동안의 노동조합 활동으로 적자의 원인이 사내의 고질적인 비리 때문이라는 사실을 다들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조선공사에서는 임시공도 조합원이었다. 1964년 새 집행부가 들어선 뒤 노조의 전략은 ‘본공과 임시공을 하나로 묶는다’는 것이었다.

몇 차례 싸움 끝에 노조는 임시공에게 조합원 자격을 부여하는 데 성공했고, 이 과정에서 다져진 본공과 임시공 사이의 의리는 회사의 생각보다 훨씬 더 단단했다. 그랬기에 민영화되자마자 임시공을 몽땅 잡을 것이라고는 조합원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터였다.
 

“임시공들 참말로 다 집에 가야 되나?”

“작년매로 도로 부르는 거 아이가?”
 

해마다 연말이면 회사는 퇴직금을 주지 않기 위해 일부 임시공들을 잘랐다. 그러나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연초에는 어김없이 이들을 다시 불러들였다. 그런 사실을 잘 아는 임시공들이기에 이런 기대도 해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뭔가 달랐다. 애써 마음을 달래 보려던 조합원들도 서서히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메아리 없는 자문자답이 몇 번인가 반복된 뒤, 불신은 절망으로, 절망에서 분노로 바뀌고 있었다.

“아이다. 머시 이상하다. 그때는 이래 시끌벅적하구로 싹 다 자른다 하지는 안아따꼬!”

“니기미. 나랏님이 조선공사 주인인데도 본공은 안 쓰고 임시공만 쓴다고 욕을 했는데, 남궁련이가 주인이 되께네 있던 임시공마저 다 자른다 카네.”
 

해고예고통보가 전해지자 현장은‘올스톱’됐다. 직장·반장들이 먼저 나섰다. 이때만 해도 현장에서 권위만큼은 관리자들보다 직장·반장들이 높았다. 공장별로 부서별로 땅바닥에 주저앉은 노동자들이 회사를 성토하기 시작했다.
 

파업, 시작되다
 

임시공 전원 해고예고통보가 전해진 이날 노동조합 사무실에 있던 상근간부는 조직부장 권오덕과 청년부장인 나, 그리고 상근 전문직 진윤술 등 젊은 사람들뿐이었다. 민영화 직후 노조는 새 경영진에게 노사협의회를 열자고 요구했다.
 

노사협의회 개최를 차일피일 미루던 회사는 갑자기 서울에서 만나자고 제안을 해 왔다. 사장이 너무 바빠 부산에 내려올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그래서 노조는 전날 지부회의를 열고 허재업 지부장과 박정부 상임부지부장을 서울 본사로 올려 보냈다.
 

노조는 뒤통수를 맞은 셈이 됐다. ‘이거 혹시?’만 30세도 안 된 청년부장과 조직부장은 서로 눈을 마주치고는 약속이라도 한 듯 용수철처럼 튕겨 일어났다. 우리는 한달음에 하영환 상무실로 뛰어들었다. 현장에 있던 간부들도 올라왔다.

“사장과 지부장이 아직 교섭 중인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이 조선소는 남궁련이 만든 게 아니라 일본놈이 만든 걸 우리 선배들이 피와 땀으로 일군 겁니다!”

“조선소 잘되라고 민영화시켰는데 오자마자 살육전을 벌이겠다는 겁니까! 빨리 취하하십시오!”
 

우리 두 사람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 상무의 코앞에 들이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하 상무는 태연자약, 대꾸도 하지 않았다.

우리만 핏대만 올리고 있었다. 이럴 게 아니었다. 다시 현장으로 갔다. 조합원들은 도크 앞 널찍한 공터에 모여 있었다. 우리가 모습을 드러내자 이미 마음을 정한 듯 조합원들의 표정은 차분했다. 이런 눈치는 오히려 본공들이 더했고, 몇몇 선배들은 젊은 우리를 안심시키려 몇 마디씩 던졌다.
 

“이기 벌써 몇 번째고?”

“인상아, 우리 또 한판 해야 되긋다, 그쟈?”

“당연히 붙어야지예. 그런데 지금 지부장님 부지부장님 두 분 다 안 계시는데…. 우선 연락부터 하고….”

“의장단이 업다꼬 안 싸울끼가? 마찬가지 아이가?”

“그래도….”
 

법적 절차를 밟고 말고 할 상황이 아니었다. 여기에서 김이 빠지면 안 된다. 조합원들이 공장문 바깥으로 나가는 순간 ‘아웃’이다. 하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1964년 새 집행부가 들어선 뒤 한 번도 져 본 적이 없는 노동자들이었다. 조합원들은 집행부를 뛰어넘고 있었다. 임시공이 잘렸는데, 본공이 들고 일어섰다. 역시 조선공사노조는 우리나라 최고의 노동조합이었다. 성난 파도가 도크를 메웠다. 파업이 시작됐다.
 


되찾은 노조, 예고된 운명
 

1960년 4월 혁명이 일어나자 조선공사에도 혁명의 기운이 몰아쳤다. 같은해 5월28일 조합원의 직접투표로 임한식 위원장이 선출됐다. 임한식 위원장은 1958년 6개월치 밀린 임금을 받아 내기 위한 파업의 중심에 있었던 분이었다.
 

4월 혁명으로 새로이 등장한 노동조합 집행부가 회사에 제일 먼저 요구했던 것은 ‘임금인상’과 ‘임시공의 본공화’ 그리고 ‘하청청부회사 폐지’였다. 노조는 자신의 힘으로‘임금인상 45%’와 노동자들에게는 ‘공공의 적’이나 다름없던 청부회사 금영사를 몰아냈다. 비록 6명의 임시공을 본공으로 전환하는 데 그쳤지만, ‘본공과 임시공이 함께 싸운다’는 조선공사노조의 전통은 일찌감치 세워졌다.
 

그러나 혁명의 기운은 오래가지 못했고, 군사쿠데타로 노동조합은 해산됐다. 1963년 5월25일 한국노총 해상노동조합 대한조선공사지부의 1기 집행부(지부장 유철수)가 들어섰다.
 

이것이 바로 ‘재건노조’였다. 군사정권은 노동조합과 노동단체들을 모조리 해산시킨 뒤 산업별 노동조합 조직책임자를 직접 지명해 ‘한국노동단체재건조직위원회’를 발족시켰고, 이 위원회가 산업별 노동조합 조직위원을 위촉해 12개 산업별 노동조합을 결성하도록 했다. 하지만 ‘재건노조’도 오래가지 못했다. 짧았지만 강렬했던 4월의 봄을 잊지 못하던 조선공사 노동자들은 1년 뒤 재건노조를 ‘노동조합이 아니라 회사 앞잡이’라며 대의원대회에서 불신임시켜 버렸다.
 

이 일은 기계과 출신의 현장 노동자인 박정부씨가 주도한 것이었다. 박정부선배는 해방 후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시절을 경험한 몇 안 되는 진짜배기 노동운동가였다. 박 선배는 직장․반장이 된 후배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에 다시 관심을 갖도록 설득했고, 회사에 불만이 많았던 젊은 활동가들을 조직했다.


 

그 가운데 특히 양성소 출신들의 움직임이 두드러졌다. 양성소란 내가 다녔던 조선기술고등학교가 없어지면서 1961년 사내에 세워진 기술원 양성소를 말한다. 여기에는 고등학교 졸업자들도 들어갈 수 있었다.
 

양성소 출신들은 당시로서는 고급인력임에도 임금이나 직급체계에서 불이익을 받았다. 더 심각했던 것은, 1964년 이후부터는 양성소 출신들이 본공으로 채용되지 못하고 임시공으로 취업이 됐다는 사실이다. 이들이야말로 조선공사노조의 핵심 중의 핵심이었다. 1964년 6월, 조선공사노조 2기 집행부 선거가 있었다. 이 선거에서 조선공사 노동자들은 마침내 노동조합을 되찾았다.
 

허재업씨가 지부장에 당선됐고, 박정부 선배가 상임부지부장을 맡았다. 대개 조선소의 노동조합 위원장은 선박부에서 나오고 부위원장은 기계부에서 선출되는데, 군사쿠데타 분위기가 아직 남아 있던 당시로서는 현장 노동자 출신이 전면에 나서기 어려웠다.
 

그래서 사무직 출신이지만 강직한 성격에 청렴한 허재업씨를 지부장으로 올리고, 박 선배가 상임부지부장으로 뒤를 받친 것이었다. 부지부장들도 재건노조 때인 1기 집행부와는 달리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현장출신이 됐다. 무엇보다도 2기 집행부는 1960년 조합원의 직접투표로 탄생했던 노동조합이 채끝내지 못한 사명을 이어 가고자 했다.
 

조선공사노조는 4월 혁명의 직접적인 계승자였다. 이렇게 볼 때 조선공사노조의 험난한 앞길은 이미 결정돼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계속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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