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회사나 노동조합이 있다면 이를 둘러싼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 그 속에는 '단결과 화합'이 있지만 '이간질과 배신'도 있다.
2007년 5월, 한 노동자가 아세톤 한 양동이를 공장 바닥에 끼얹고 라이터에 불을 댕겼다. 공장의 불은 크게 번지지 않았지만 화마에 휩쓸린 노동자는 결국 숨졌다. 그는 2006년 초부터 회사의 지시와 지원을 받아 노조 탈퇴 공작에 앞장섰다.
그런데 노사 간 단체협약이 체결되고, 관계가 개선되자 그는 ‘왕따’가 됐다. 그는 밤에 잠도 이룰 수 없고, 식사를 해도 소화가 되지 않을 만큼 힘들었다. 결국 스스로를 불살라 억울함을 호소했는데 그의 죽음이 업무와 관련이 있을까.

잘 나가던 '반장'에서 '왕따’로…비관자살

이찬영(가명)씨는 공장 작업반 반장이다. 2006년 12월 회사로부터 ‘직원들이 노조를 탈퇴하도록 작업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는 이듬해 3월 중순까지 술자리에서 조합원들을 개별적으로 만나거나 야간근무수당을 받을 수 없도록 불이익을 주는 방식으로 노조 탈퇴를 유도했다. 때문에 그의 작업조에서 23명이던 조합원은 6명으로 줄었다.
하지만 3월 이후 사정이 달라졌다. 노사 간 단체협약이 체결되고, 유니온숍 조항까지 합의되면서 노사관계가 급격히 우호적으로 변했다. 단협 체결 이후 이씨는 ‘왕따’가 됐다. 노조는 그의 사퇴를 요구하고, 노조 탈퇴를 지시했던 회사는 노동조합 감싸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씨는 이 과정에서 심한 배신감과 패배감을 느꼈다. 이씨의 가족들은 그가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소화가 안 된다며 탄산음료를 자주 마셨다고 밝혔다. 또 자다가 새벽에 깨서 뜬 눈으로 밤을 지새기 일쑤였다. 친구나 동료들에게는 ‘모든 게 부질없다’, ‘나 하나만 떠나면 된다. 항상 사직서를 품에 넣고 다닌다’는 말로 자신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두통과 소화불량으로 한의원에서 침과 물리치료을 받으면서 한약도 지어 먹었다.
2007년 5월18일, 회사에서 회식이 열렸다. 그 자리에서 노조위원장과 관리이사가 러브샷을 하는 등 화기애애하게 술을 마시던 모습을 목격하고 이씨는 격분했다.

회사로 돌아가 총무과 사무실에 아세톤 한 양동이를 뿌리고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이겠다고 협박하며 남아있는 직원들을 모두 내보냈다. 동료들이 ‘참아라’고 말하는 순간 그는 라이터를 켜 분신했다.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져 응급치료를 받았지만 5월23일 오후 5시30분께 화염화상으로 인한 패혈증쇼크로 사망했다.
이씨는 자존심과 책임감·충성심이 강한 성격이지만 정신과 치료를 받은 전력은 없다. 유족들은 노조 문제로 스트레스에 시달려 정신적 인식능력이 현저히 저하된 상태에서 자살에 이르게 됐다며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 보상을 청구했다. 공단은 업무상재해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거부했다.

“정신적 스트레스 인정하지만 자살은 개인의 선택”

이 사건의 원고는 이씨의 유족이고, 피고는 근로복지공단이다. 서울행정법원은 “근로자가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스트레스로 우울증이 발생했고, 자살의 동기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정만으로 업무와 자살 사이에 상당 인과관계가 있다고 함부로 추단해서는 안된다”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판결요지는 다음과 같다.
“자살은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의사에 따른 것이다. 자살자의 나이와 성행 및 직위·업무로 인한 스트레스가 자살자에게 가한 긴장도나 중압감의 정도와 지속시간, 자살자의 신체적·정신적 상황과 자살사를 둘러싼 주위상황, 우울증의 발병과 자살행위의 시기, 기존 정신질환의 유무 및 가족력 등에 비춰봐야 한다. 자살이 사회평균인의 입장에서 보아 도저히 감수하거나 극복할 수 없을 정도로 업무상 스트레스와 우울증에 기인한 것이 아닌 한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없다.”

이 사건에서 재판부는 이씨와 마찬가지로 노조 탈퇴 공작을 벌였던 간부급 현장노동자들은 자살에 이르지 않았다는 것을 근거로 자살이 이씨 개인의 문제로 판단했다. 재판부는 이씨가 노사갈등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우울증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봤다. 하지만 이씨 외에도 5명의 반장들이 비슷한 처지였고 사회 평균인 입장에서 이를 감수하기 어려울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재판부는 “이씨가 우울증으로 정신병적 이상상태에서 자살에 이르렀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며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자살을 선택한 것”이라고 판결했다.

관련판례
서울행정법원 2009년 6월11일 2008구합20482 유족급여및장의비부지급처분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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