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사고가 터질 때마다 방송을 비롯한 언론은 ‘안전불감증’을 질타한다. 지난해 40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천 냉동창고 화재사건, 최근 철길을 덮친 타워크레인 붕괴사고에서도 뉴스 앵커들은 ‘안전불감증이 억울한 희생을 만들었다’며 대책을 촉구했다.
하지만 안전불감증을 전파하는 데 오히려 텔레비전이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을까. 텔레비전을 켜 보자.

생활의 달인 되려다 산재 환자 될라

지난달 1일 SBS를 통해 방영된 ‘생활의 달인’ 굴통조림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하루에 9천개의 통조림을 포장하는 장면이 나온다. 종이박스 위에 쭈그려 앉아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손가락, 연신 ‘대단하다’, ‘놀랍다’는 나레이션과 자막이 흐른다.
하지만 ‘굴통조림의 달인’은 근골격계질환을 앓고 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장시간 불편한 자세로 인한 요통 발생 위험과 반복된 작업으로 인한 손목과 손가락에 부담이 갈 수 있다.

이어 ‘초절정 상자 접기의 달인’이 나온다. 접지기계 사이로 종이를 후다닥 끼어 넣는 노동자의 모습이 위태롭다. 진행자 역시 ‘기계가 상당히 위험해 보인다’고 말한다. 묘기에 가까운 ‘상자 접기 달인’의 노동과정은 언제든지 협착(끼임)사고로 이어질 듯 아슬아슬해 보인다.

요즘 최고 상한가를 치고 있는 리얼리티 쇼프로그램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달 7일과 14일 방영된 SBS ‘패밀리가 떴다’를 보자. 낚시배를 타고 고기를 잡는 장면이 나온다. 진행을 맡은 유재석씨를 비롯한 출연진의 모습이 위험해 보이기는 하지만 붉은 구명조끼를 입고 있다. 그런데 간간히 보이는 제작진의 모습에서 구명조끼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출연진을 촬영하기 위해 배 후미에서 카메라와 마이크·조명을 들고 다닥다닥 붙어있는 모습이 위태로워 보인다. 더구나 이날은 기상상태도 좋지 않았다. 내리치는 비를 피하기 위해 제작진 모두 우의를 착용하고 있다. 정작 목숨을 살려줄 구명조끼는 벗어놓고 말이다.

장수 프로그램인 KBS ‘체험 삶의 현장’. 6월14일 방영분에서 가수 배일호씨와 이혜리씨가 양은냄비 제조공장을 찾았다. 안전모 위에 양은냄비를 얹어 코믹한 모습을 연출했다. 키득키득 웃음이 터질 듯한 모습이지만 보호장구의 바람직한 착용은 결코 아니다. 은색 냄비가 황색 냄비로 바뀌는 ‘표면처리’ 과정이 나온다. 펄펄 끓고 있는 화학물질이 가득 찬 기계 주변에 안전을 위한 장치는 보이지 않는다. 선풍기 한 대만 돌아가고 있을 뿐이다.

재미만 쫓는 방송, 산안법 위반 수두룩

한국노총 산업환경연구소(소장 정영숙)는 올해 방송 프로그램에 대한 모니터링을 꾸준히 하고 있다. 산업안전보건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안전보건방송평가위원회를 구성해 방송에서 무절제하게 방영되고 있는 위험천만한 작업환경을 개선하겠다는 취지다.

21일 두 번째 회의가 열렸다. 굴통조림 달인의 반복작업은 산업안전보건법 제24조(보건상의조치) 위반이다. 법에서 하루에 총 2시간 이상 목이나 어깨·팔꿈치·손목을 사용할 경우 건강장해를 예방하기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하지만 제작진은 그저 ‘놀라운 기술’이라고만 밝히고 있다. ‘상자 접기의 달인’ 편에서도 절단사고의 위험으로부터 작업자를 보호해야 하는 방호장치가 없어 산업안전에 관한 규칙 제52조를 위반한 것으로 드러났다.

생활의 달인의 제작의도는 소시민들이 자기 분야에서 최고의 경지에 이르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노동의 숭고함을 일깨우는 데 있다. 그렇다보니 위험천만한 작업환경이 그대로 노출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절단이나 허리디스크 등 재해는 최고의 경지에 이르는데 불가결한 희생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백승렬 인천대 교수는 “생활의 달인에서 회전톱날에 검지손가락이 잘린 경험이 있는 노동자가 여전히 목장갑 한 장만 끼고 일하면서 ‘과거에 아픔을 겪었다’는 식으로 나오는 모습을 보면서 아찔했다”며 “제작진도 최고가 되기 위한 희생으로 당연시 하면서 보호장구만 제대로 갖췄어도 충분히 예방가능하다는 점은 간과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사업장을 찾아가는 생활의 달인이나 체험 삶의 현장 같은 프로그램과 달리 리얼리티 쇼프로그램은 시청자가 그대로 모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의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백 교수는 “요즘 인기가 많은 패밀리가 떴다나 1박2일 같은 경우 젊은이들이 그 장소를 찾아 똑같이 게임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며 “그런데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연구소는 11월까지 4차례 방송모니터링을 실시하고 그 결과를 방송사에 전달할 예정이다. 단지 지적사항만 늘어놓는 것이 아닌 개선방향도 제시할 계획이다. 예를 들어 산재에 취약한 영세사업장이 많이 나오는 생활의 달인이나 체험 삶의 현장 같은 경우 잘못된 작업과정과 바른 작업과정을 비교하면서 ‘이렇게 하면 안전사고를 방지할 수 있다’는 자막 한 줄만 나와도 시청자들의 안전의식을 상당히 고양시킬 수 있다.

정영숙 연구소 소장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시청자들에게 미치는 파장력이 매우 큰 매체”라며 “지금은 위험한 장면들이 그대로 노출되고 있지만 조금만 신경을 써서 제작한다면 국민들의 안전의식이 획기적으로 전환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연구소는 올해 말 이와 관련된 토론회도 준비하고 있다. 텔레비전이 안전불감증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주목된다.

헛발질 하는 방송 사전심의제도
우리나라 방송은 사전심의를 거치도록 돼 있다. 정부기관인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이 기능을 담당하는데 사전검열이라는 무수한 비판 속에서도 존치하고 있다. 최근에는 정치 검열기능이 강화돼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을 침해하고 있다는 비판마저 듣고 있는 상황이다.
위원회가 지난 3월 발표한 ‘출범 1년간의 주요 추진성과와 향후 추진과제’에 따르면 “방송내용 심의를 통해 방송의 공공성과 공정성을 제고, 건전한 방송환경 조성에 기여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에 따르면 위원회 출범 이후 1년 동안 지상파 방송에 대한 심의제재 건수는 총48건(권고포함 194건)이다. 제재 사유는 △협찬고지 위반 45건(17.8%) △간접광고 41건(16.2%) △방송언어 25건(9.9%) △품위유지 23건(9.1%) 등이었다.
케이블TV와 위성방송에 대한 심의제재 건수는 총 195건(권고포함 302건)이었으며, 제재 사유는 △어린이 및 청소년 보호(14.8%) △품위유지(7.8%) △성표현(7.7%) △방송언어(6.7%) △건전한 생활기풍(3.6%), 폭력묘사(2.7%) 등이 다수였다.
기업의 간접광고와 성표현 등에 대해서는 대단히 민간하게 반응하지만 정작 사람의 목숨을 좌우하는 위험천만한 작업환경에 대한 심의제재는 찾아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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