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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 도입 후 높아진 직업병 불승인율

지난해 11월6일 조선소에서 용접 작업을 하던 김성식(가명·42)씨는 배에 머리를 정면으로 부딪히는 사고를 당했다. ‘4·5번 경추 추간판 탈출증’과 ‘경추염좌’라는 진단을 받은 김씨는 근로복지공단에 요양을 신청했다. 공단 지사는 조사 과정에서 김씨가 불안정한 작업 자세로 업무를 하다가 사고를 당한 사실을 인정했다. 지사의 자문의사도 “당일 재해로 인한 발병 가능성이 높다”며 업무관련성을 인정했다. 사업주도 산업재해라고 인정했다. 하지만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는 반대의 결론을 내놨다. 김씨의 작업력과 의학적 소견·경추부 필름 등을 종합적으로 심의한 결과, 4·5번 경추 추간판 탈출증은 퇴행성 병변으로 판단돼 업무와 신청 상병과의 인과관계를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대신 경추염좌는 재해 경위로 보아 요양을 승인됐지만, 추간판 탈출증은 불승인됐다.

지난해 전면 개정된 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 따라 같은해 7월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질판위)가 도입됐다.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는 노동자의 질병이 업무상 질병인지 아닌지를 심사해 산재보상 여부를 심사하고 결정하는 곳이다. 법이 개정되기 전에는 공단이 자문의사협의회의 의견을 수렴해 독자적으로 결정했다. 산재보상금을 지급하는 공단에서 산재 여부를 판단하도록 해 공정성 시비가 끊이지 않아 도입된 것이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다.

하지만 도입 1년을 맞은 현재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 역시 노동계의 비판을 받고 있다. 질판위가 도입된 후 오히려 산재불승인율이 높아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 2일 민주노총 내부 토론회에서 김용규 산업의학전문의(가톨릭대 성모병원 산업의학센터)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질판위가 도입되기 이전인 지난해 1월부터 6월 사이의 업무상질병 불승인율은 39.2%였다. 반면 질판위가 도입된 같은해 7월부터 12월 사이에 질판위가 심의한 3천482건 가운데 1천926건이 불승인됐다. 불승인율이 55.3%에 달했다. 7월에서 12월은 공단(자문의사협의회)이 담당하던 업무상질병 판정 업무가 질판위로 넘어오는 시기였다. 표에서 공단과 질판위가 심사한 것을 모두 합쳤을 때의 불승인율은 42.8%, 질판위가 심사한 것만 분류하면 55.3%다.

 

 ⓒ 매일노동뉴스


뇌심혈관계질환 불승인율 높아져

직업병 가운데 뇌심혈관계질환에 대한 불승인율이 부쩍 높아진 것이 눈에 띈다. 도입 전(1월에서 6월) 뇌심혈관질환 불승인율은 62.3%였지만, 질판위의 불승인율은 78.3%로 높아졌다. 질판위가 도입되면서 강화된 뇌심혈관계질환 인정기준과도 무관치 않다. 지난해 7월1일 산재보험법 개정에 따라 뇌심혈관질환과 근골격계질환의 업무상 질병 인정 기준을 개정한 고시가 시행됐다.
 
원래 뇌혈관 또는 심장질환에 대해 시행령은 △업무와 관련한 돌발적이고 예측 곤란한 정도의 긴장·흥분·공포·놀람 △급격한 업무 환경의 변화로 뚜렷한 생리적 변화가 생긴 경우 업무상 질병으로 명시하고 있었다. 이런 기준이 △발병 전 1주일 이내 업무량이나 업무시간이 일상 업무보다 30%이상 증가 △업무 강도·책임 및 업무 환경 등이 일반인이 적응하기 어려운 정도로 바뀐 경우로 제한하고 있다. 또 시행령에서 ‘급격한 업무변화에 따른 과중한 업무’도 3개월 이상 연속적으로 일상적인 업무에 비해 과중한 육체적·정신적 부담을 발생시켰다고 인정되는 업무적 요인이 객관적으로 확인되는 상태에만 산재로 인정할 수 있다고 한정시켰다.

김용규 산업의학전문의는 이에 대해 “업무상 질병 인정에 대해 철저하게 정량적인 기준이 적용되고 있다”며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가 도입되면서 뇌심혈관계 질환 인정기준이 대폭 강화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노동자 참여 기회 부족 지적도

산재보험법(108조)에 따르면 산재 당사자는 질판위 위원에게 심리·재결의 공정을 기대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을 경우 기피신청을 할 수 있게 돼 있다. 또 질판위 운영규정(14조)에 따르면 위원회는 필요하다고 인정하면 심의사건의 신청인 또는 청구인·주치의사와 해당전문가에게 심의회의에 출석해 의견을 진술하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질판위 도입 후 이런 운영절차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는 게 민주노총의 주장이다.

이에 대해 공단은 “신청인 등이 위원명단을 알지 못해 제도를 활용하지 못했다”며 “신청인 등이 위원 명단을 확인할 수 있도록 공개할 예정”이라고 답했다. 또 의견진술 기회 부여에 대해 “판정위원회가 필요한 경우와 신청인이 회의참석을 요청하는 경우 의견을 진술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해 신청인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사전에 회의 일시와 장소에 대해서는 신청인에게 문자메시지 등을 통해 알려주도록 개선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김용규 전문의는 “질판위에서 본인에 대해 어떤 내용이 나왔는지 인지해야 하는데 정보공개를 청구해야 심의 내용을 알 수 있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민주노총은 이 밖에도 질판위의 심의회의가 부실하게 운영되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김용규 전문의가 밝힌 자료에 따르면 질판위의 회의 1회당 15건에서 20건을 처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회당 3시간이 소요된다고 봤을 때 건당 처리시간은 10분에 불과하다. 회의 5일 전에 관련 자료를 받고 회의 당일에 10분 만에 업무상 질병 판정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검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전국 6개 질판위 가운데 경인지역 질판위의 1회당 심의건수가 21.4건으로 가장 많았고, 서울은 18.6건, 대전 15건 등이었다.

 

지난해 7월8일 한국노총∙한국경총∙대한의사협회 대표 등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중구 쌍림동에서‘서울지역 업무상질병 판정위원회’ 개소식이 열리고 있다.자료사진=매일노동뉴스 ⓒ 매일노동뉴스


‘노동자 건강권’ 강화 활동 펼쳐야

업무상 질병 불승인율이 높아지자 현장의 노동안전보건활동가들의 고민도 커지고 있다. 점점 직업병으로 인정받기 어려워지자 노동자들이 산재가 아닌 공상으로 처리할 수 없느냐고 묻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마산창원거제 산재추방운동연합에서 활동하는 김경훈씨는 “활동가들이 노동현장 문제를 개선하지 못하고 산재 인정을 위한 브로커로 활동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라며 “산재신청도 못하고 그 여파로 현장의 노동강도도 개선되지 않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노동자의 건강권은 양보할 수 없는 권리라는 인식을 확산시키고, 작업환경 개선 투쟁을 확대해야 노동자들에 대한 산재인정도 쉬워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민주노총은 “업무관련성이 있다면 산재로 인정하고 불승인을 위해서는 그 입증책임을 근로복지공단이 지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산재보험법을 전면 개정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조현미 기자  ssal@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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