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한때 ‘모범적인 사용자’로 자처한 적이 있었다. 여기서 ‘모범적’ 이라는 것은 비정규직 문제해결에 앞장선다는 의미다. 참여정부 시절, 정부가 발표한 공공부문 비정규직 종합대책을 두고 하는 얘기다.

당시 정부는 비정규직 남용을 막고 차별을 해소하기 위해 민간부문을 선도하겠다고 선언했다. 정부는 2006년 8월 종합대책을 수립해 이듬해인 2007년 6월에 무기계약 전환, 외주개선 및 차별시정 계획을 확정했다. 국무총리실 산하에 교육부·행자부·기획예산처·노동부·중앙인사위원회로 구성된 공공부문 비정규직대책 추진위원회(추진위)를 설치했다. 실무추진단이 발족됐고, 총리훈령으로 이를 제도화했다.

종합대책 적용 대상기관만 1만714곳에 달했다.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기간제 노동자는 꿈에 부풀었다. 다소 미흡하더라도 고용이 보장되는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종합대책 대상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기간제 노동자만 20만6천742명이었다.

노동부에 따르면 정부의 종합대책에 따라 1일 현재 전환대상 8만8천11명 가운데 약 94%(8만3천990명)가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됐다. 2007년 6월 말 1차로 7만1천861명이 무기계약직 전환대상자로 확정된 이래 2년 동안의 실적이다.
실무추진단은 1일로 사용기간 2년이 된 2만8천명의 기간제노동자를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추정했다. 공공기관 1만714곳의 기간제노동자 규모를 고려할 때 무기계약직 전환자는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런데 여기까지다. 계획만 있지 실행 여부가 불투명해졌다. 모범적인 사용자를 자처했던 정부가 꼬리를 내린 것이다. 정부가 기간제 노동자의 사용기간 제한을 연장(2년→4년)하는 것을 뼈대로 비정규직법 개정안을 추진하면서부터다. 무기계약직 전환대상자 선정기준은 ‘2년 이상 근무자’였다. 비정규직법의 사용기간 제한(2년)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정부가 방향을 틀어 버리자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돼 버렸다. 실무추진단이 무기계약직 전환 대상으로 추정했던 기간제 노동자 2만8천명의 전환 여부도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공공부문 선진화방안도 한몫했다. 정부가 선진화방안의 일환으로 정원 10% 감축을 추진하자 공공기관들은 기간제 노동자에 대한 무기계약직 전환을 미루거나 중단했다. 무기계약직 전환자는 공공기관 정원에 반영돼야 하는데 이를 감축했기 때문이다. 공공기관들이 정규직마저 고용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어떻게 하냐며 몸을 사린 것이다.

공공기관들이 과거를 잊고 본심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과 KBS는 기간이 만료된 기간제 노동자를 해고하는 데 앞장섰다. 해양수산개발원·산재의료원·한국토지공사·대한주택공사도 마찬가지다. 무기계약직 전환계획을 책상서랍 속에 넣어 두고 외면한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참여정부 시절의 공공부문 비정규직 종합대책을 사실상 용도 폐기한 셈이다. 실제 정부는 최근 국무총리실에 훈령으로 설치된 실무추진단마저 해체했다. 비정규직법 개정의 근거로 제시한 ‘100만명 실업대란설’의 진위를 차지하더라도 모범적인 사용자로서 정부의 역할마저 포기한 것이다. 민간부문을 선도하기는커녕 되레 정부가 비정규직 해고를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종합대책에 따르면 무기계약직 전환기준은 ‘상시·지속적인 업무에 종사해 근속기간이 2년 이상인 자’다. 지난 2년 동안 이 기준은 ‘사회적 약속’으로 취급됐다. 공공기관뿐 아니라 금융권과 대기업은 이 기준에 따라 무기계약직 전환을 추진했다. 정부가 먼저 사회적 약속을 깨 버린다면 지난 2년간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정부가 사회적 약속을 지키지 않는데 어떤 민간기업이 따르겠는가. 정부부터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 정부는 공공기관에 해고 자제를 넘어 당초 예정된 무기계약직 전환을 추진하라고 권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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