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달 1일 계약기간 종료를 앞두고 공공부문이 비정규직 해고에 앞장서고 있다. 마치 '100만명 해고설'을 제기한 정부 주장을 뒷받침하는 듯한 모양새다.
정부 산하기관인 KBS는 420명의 연봉계약직 가운데 222명을 재계약하지 않고, 나머지는 자회사로 전출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일선 학교에서도 계약직 직원을 재계약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한다. 공공기관 성격이 강한 농협중앙회는 지역농협에 계약기간이 만료된 직원과 재계약하지 말라는 내용의 공문을 내려 보냈다. 지역농협에는 1만명가량의 비정규직이 일하고 있다.

공공기관들이 현행 비정규직법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참여정부 시절, 정부가 앞장서 정규직 전환을 유도하겠다며 '공공부문 비정규직대책'을 추진했던 것에 비하면 180도 달라진 모습이다.

공공기관들의 두 얼굴은 정부 탓이 크다. 노동부가 100만명 해고설을 제기하며 기간제 노동자의 사용기간을 현행 2년에서 4년으로 연장하는 내용의 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야당과 노동계의 반론을 무시했다. 여당에서조차 의견이 엇갈리는 것도 고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국민의 고용불안 공포만 부채질했다. 정부가 비정규직법의 효용성을 외면하자, 눈치를 보던 공공기관들이 너도나도 본심을 드러낸 것이다.

만약 비정규직법이 무리없이 그대로 시행된다면 공공기관들은 어땠을까. 아마 비정규직 일부를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하는 시늉만 냈을 것이 분명하다. 사실 기업들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시정 문제만 골머리를 앓았을 뿐 사용기간 문제는 신경 쓰지 않았다. 계약기간 종료일 전에 비정규직을 계약해지하는 손쉬운 방법을 고수해 왔기 때문이다. 다른 비정규직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이미 사용기간이라는 장치는 기업들에게 의미가 없다. 언제든지 뚫을 수 있는 허망한 방벽에 불과하다. 파견업계에서는 계약기간이 만료된 직원을 교환하는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이 오래된 관행이었다. 파견업체 간 비공식적 구인·구직망이 가동돼 온 것이다.

사용기간을 연장하면 비정규직 해고는 막을 수 있다고 한 정부가 순진한 건가, 아니면 그렇게라도 '면피'하겠다는 건가. 그런데 국회에서도 비슷한 모습이 엿보인다. 여당인 한나라당은 비정규직법 시행을 2년 유예하되 1조원가량의 정규직 전환지원금을 조성하겠다는 방안을 내놓았다. 비정규직법 3년 유예안을 던졌던 한나라당은 "야당과 노동계를 위해 수정안을 냈다"고 밝혔다. 야당인 민주당은 1년 미만, 자유선진당은 1년6개월 유예하자는 입장이다. 여야가 사용기간 제한이라는 허망한 방벽에 여전히 기대고 있는 것이다.

비정규직법 5인 연석회의에 참여하고 있는 양대노총이 강하게 반발하는 것은 당연하다. 연석회의는 첫 회의 때 △사용사유 제한 △차별시정 개선 △특수고용직 노동3권 보장 △정규직 전환지원금 등 다양한 의제를 논의하기로 했다. 하지만 결국 사용기간 제한에 머물렀고, 그것도 시행조차 못한 법마저 유예하는 방향만 논의했다. 이대로 가면 양대노총이 참여한 가운데 모처럼 형성된 사회적 대화는 물거품이 될 것이 분명하다.

국회는 '비정규직법 시행(사용기간 제한) 유예'라는 프레임으로 논의를 제한해서는 안 된다. 비정규직법을 개정하려면 사용기간뿐 아니라 사용사유 제한과 차별시정의 문제까지 광범위하게 논의해야 한다. 여야는 잘못된 '기간제한의 프레임'에서 허덕이지 말고, 법 전반을 충분히 논의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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