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재정부는 지난달 ‘2차 공기업 선진화 추진실적 점검 워크숍’을 열어 “129개 공공기관에서 2만1천명의 정원감축이 완료됐다”며 “앞으로는 노사관계 선진화를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공기업 선진화방안의 경제적 효과는 무엇인가. 정원감축에 따른 각종 부작용과 사회적 갈등비용을 따지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을’ 가능성이 높다.

지난 25일 서울 을지로입구역.
지하철 승객에게 표를 내 주고 길을 안내하는 역무실은 불이 꺼진 채 굳게 잠겨 있다. 직원 대신 ‘매표소 폐쇄 안내문’이라는 공문 한 장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불 꺼진 지하철 역무실

지방에서 올라왔다는 김자영(28)씨는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그는 “지난달만 해도 매표소에서 종이승차권을 구입했는데 역무실 문이 잠겨 있어 당황스럽다”며 “1회용 교통카드 발급기 앞에서 5분 넘게 기다렸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노인들이 많이 찾는 종로3가역의 사정은 더 심각하다. 서울지하철 1·3·5호선이 만나는 이곳에는 교통카드 발급기 사용에 서툰 노인들의 항의가 하루에도 몇 번씩 쏟아진다. ‘월급은 받으면서 일은 안 한다’고 호통치는 목소리도 들린다.

지하철 노동자도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2호선과 7호선이 만나는 대림역에서 일하는 역무원 김철수(가명)씨는 “원래 하던 매표업무가 중단된 대신 자동화기기에 매일 200만원어치의 500원짜리 동전을 채워 넣고 교통카드를 일일이 세어 정산해야 한다”며 “업무가 오히려 늘어났다”고 말했다.

개통 앞둔 경의선, 달릴 수 있을까?

서울메트로와 서울도시철도공사는 이달부터 아예 매표업무를 직무규정에서 없애버렸다. 서울메트로는 지난해 정원의 20.3%인 2천88명을 내년까지 단계적으로 감축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정년퇴직(479명)과 희망퇴직(342명)을 제외하면 분사화(267명)·민간위탁시 전출(815명) 등 업무를 줄이는 방식이다. 매표업무 무인화가 대표적인 예다.
한국철도공사는 다음달 1일부터 성산~문산 40킬로미터 구간에 복선전철을 새로 개통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기관사나 역무원 등 전동차 운영에 필요한 최소한의 인력조차 확보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철도공사는 경의선 신규개통에 따라 역무원 108명을 비롯해 총 344명의 인력이 필요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공기업 선진화방안에 따라 정원의 16%가량인 5천115명의 인력을 감축시키기로 지난 4월 이사회에서 의결했다.
경의선 복선전철을 비롯해 2012년까지 637킬로미터의 철도가 새로 만들어진다. 여기에 필요인력만 2천615명(철도공사 추산)이다.

사상최대 토목공사 벌여 놨지만…

규정에 따라 신규노선 개통 한 달 전에 인력배치를 모두 끝내고 시험운전 등 사전점검을 해야 하지만 공사는 지난 23일에서야 전환배치를 통해 일부만 발령 낸 상태다. 또 새로 만든 선로가 휘어지고 지반이 내려앉는 등 1천여곳에서 이상이 발견되고 있다. 철도노조는 “이대로 개통을 강행하면 9명이나 사망한 ‘워싱턴 전동차 추돌사고’처럼 대형사고가 터질 수 있다”며 “충분한 사전점검과 인력충원이 이뤄질 때까지 개통을 연기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한국가스공사는 다음달부터 17개 천연가스(LNG) 미공급지역에서 배관건설 공사에 착공한다. 총 1조3천90억원이 투여되는 사상 최대 규모다. 정부의 사회간접자본(SOC) 확대를 통한 일자리 창출 정책에 따라 애초 계획보다 3년이 앞당겨졌다. 보통 1년가량 필요한 설계·준비기간도 정부의 예산 조기집행 지침으로 절반(6개월)이 줄었다.
문제는 아직까지 인력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가스공사는 정부의 4차 공기업 선진화방안에 따라 정원 2천848명의 10.7%인 305명을 감축했다.

공기업 해외진출도 곳곳서 차질

이번 천연가스 미공급지역 배관건설 공사에 필요한 인력은 170여명. 다음달부터 공사를 시작해야 하지만 현장감독을 비롯해 공사를 주관할 인력은 아직 미정이다. 또 강원 삼척가스저장기지 건설(30명)과 러시아·나이지리아·이라크 등 해외자원개발 사업에 90명 등 올해만 290여명의 인력충원이 필요한 상황이다.

황재도 공공노조 가스공사지부장은 “정부가 국책사업으로 미공급지역에 가스배관망 건설사업을 조기에 추진하라고 압박하면서도 인력충원은 하지 말라고 한다”며 “모든 공기업에 획일적 잣대로 구조조정을 추진한 결과”라고 비판했다. 황 지부장은 “가스배관망 공사는 안전이 최우선”이라며 “건설공사를 수행할 인력이 없으면 즉각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문제는 비단 서울메트로와 철도공사·가스공사만의 문제는 아니다. 발전소 정비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한전KPS의 경우 국내외에서 정비인력 파견 요청이 쇄도하고 있지만 인력이 부족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98년 이후 10년간 발전설비는 64% 늘었지만 담당인력은 오히려 12.3% 줄었다. 특히 해외수주 사업은 2004년 336건에서 지난해 1천500건으로 446% 증가했다. 담당인력은 105% 느는데 그쳤다. 한전KPS노조는 해외진출 확대 330명, 국내 발전·송전시설 706명 등 총 1천36명의 인력이 추가로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도 정부의 해외마케팅 지원창구 단일화에 따라 업무가 3배 이상 증가했지만 인력이 줄어 사업수행에 차질을 빚고 있다.

정부는 공기업 선진화방안을 통해 정원감축 이후 △법 개정으로 새로 부여된 기능 △해외수출 및 자원개발 △필수시설 준공에 따른 운영인력 등 증원이 불가피한 경우 기관별로 심사해 별도로 반영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국책사업조차 필요인력에 대한 증원요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공기업계에서는 인력감축에 대한 정부의 강경한 태도 때문에 오는 2010년까지 증원이 어려울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렇다보니 특정 공기업의 신규사업에 따른 인력충원 특별법까지 등장하고 있다. 한국토지공사는 올 들어 14개국에서 15개 신도시개발 사업을 따냈다. 계약 1건당 적게는 400억 많게는 6천억원의 매출이 발생한다. 그런데 인력문제로 제동이 걸렸다. 공기업 선진화방안에 따라 10월1일 대한주택공사와 통합되면서 인력충원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정부는 주·토공 통합 이후 인력감축을 실시한다는 계획이다. 이런 사정 때문에 국회에서 특별법이 발의됐다.

김정권 한나라당 의원은 지난 1일 공기업이 해외에서 ‘한국형 신도시’ 건설 사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인력을 정원 외로 둘 수 있도록 하는 ‘해외신도시 건설사업 지원 특별법안’을 내놨다. 이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토지공사는 기재부장관이 정해주는 경영지침(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 제50조)에 구애받지 않고 인력을 운용할 수 있게 된다. 궁여지책인 셈이다.

기재부는 지난달 ‘2차 공기업 선진화 추진실적 점검 워크숍’을 열어 “129개 공공기관에서 2만1천명의 정원감축이 완료돼 목표(2만2천명)의 93%가 달성됐다”고 밝혔다. 또 노사관계 선진화를 구축하겠다며 과도한 인건비 인상이나 부당한 노사협약에 대해선 실질적 불이익을 주겠다고 강조했다.

공기업 후진화 부르는 ‘선진화방안’

공기업 선진화방안의 경제적 효과는 지금까지는 명확하게 드러난 바 없다. 다만 지난해 공기업 신규채용 규모가 2007년보다 24.4%(3천500명)나 감소했고 2012년까지는 계속 줄어들 전망이다. 또 초임삭감을 비롯해 기존 직원 임금삭감도 추진되고 있어 ‘인건비 줄이기’만큼은 어느 정도 성과를 낼 수도 있다. 그러나 정원감축으로 빚어지는 각종 부작용과 사회적 갈등비용을 감안하면 손실이 더 클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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