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국선언’은 70~80년대 소통의 수단이자 저항의 상징이었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 군사독재정권 시절, 언론과 표현의 자유에 목말랐던 국민에게 시원한 물 한 모금과 같았다. 권위주의 정권의 횡포에 숨죽이고 있던 지식인과 학생들의 이른바 '사회참여선언'이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주로 종교단체가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사제단)의 인권회복선언이 대표적이다. 사제단은 74년 지학순 주교의 ‘유신헌법 무효’ 양심선언을 계기로 결성됐다. 그 후 사제단은 사회정의실천선언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다.

70년대 시국선언이 명망가나 소수에 의한 양심선언이었다면, 80년대에는 시국선언이 각계각층으로 확산됐다. 특히 87년 6월 민주항쟁에서 시국선언은 투쟁의 도화선이었다. 시간을 거꾸로 되돌려 보자. 그해 1월, 서울대생 박종철씨가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에 연행돼 수사를 받던 중 사망했다. 거리에선 연일 ‘살인정권 물러가라’ ‘종철이를 살려내라’는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전두환 정권은 이를 외면하고 ‘4·13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군사독재정권을 연장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한 것이다. 야당인 통일민주당의 창당행사를 방해하고, 정치적 반대세력을 억압하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호헌조치에 반대하는 학계·문화계·종교계 가릴 것 없이 각계각층에서 시국선언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자발적이면서도 집단적인 시국선언은 군사독재 반대세력을 하나로 묶었고, 국민의 저항을 촉발시켰다.
6·10 민주항쟁 후 한국은 '민주주의가 뿌리내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좌파정당’이라는 민주노동당이 국회로 진출하면서 이른바 ‘절차적 민주주의’는 실현됐다고 여겼다. 물론 ‘누구를 위한 민주주의냐’ 라는 논쟁이 지속돼 왔지만 앞으로의 과제라고 판단했다. 더 이상 민주주의가 후퇴하거나 과거 권위주의정권 시절로 돌아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87년 민주항쟁의 동력이었던 시국선언이 최근 각계각층으로 확산되고 있다. 학계·문화계·종교계·노동계가 자발적이면서 집단적인 시국선언을 하는 양상도 22년 전 6·10 민주항쟁 때와 비슷하다. 그만큼 우리사회의 민주주의에 ‘빨간불’에 켜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국선언 주체들도 하나같이 민주주의 위기를 우려하고 있다.
집회와 시위·표현의 자유가 경찰의 ‘명박산성’과 ‘차벽’ 앞에서 좌절되는 현실이 그야말로 ‘위기의 징후’라는 것이다. 심지어 복면을 착용하고 집회에 참가하면 처벌하고 소음규제 강화, 채증용 영상촬영 무제한 허용 등의 내용을 담은 ‘개악안’마저 등장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기본권을 과도하게 제한하고 형벌과잉주의”라고 지적하는데 여당인 한나라당은 되레 국가인권위를 축소하라고 공세를 편다.

이뿐만이 아니다. 공정한 재판을 위해 수사기록을 요구하는 용산참사 가족들의 절규는 검찰의 위세 앞에 메아리가 돼 떠돌고 있다. 전직 대통령의 부패수사는 법을 어기면서까지 언론에 흘린 반면 용산참사 수사기록은 숨기기에 급급한 것이다. 특별하지 않은 사람, 고 박종태씨가 목숨을 끊으면서 특수고용노동자의 현실을 고발하고 제도개선을 요구했지만 정부는 수수방관하고 있다. 이런 정부와 여당의 행태를 보면 민주주의 위기라는 시국선언이 나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시국선언은 이런 현실을 지적하고 있다. 그럼에도 청와대와 일부 보수단체는 그 의미를 축소하거나 폄훼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시국선언에 참여한 교수들은 소수에 불과하다’거나 ‘국민에게 혼란과 분열을 일으키는 정치교수와 좌파단체의 주장’이라는 얘기다. 소통을 거부하고 스스로 귀를 막는 대표적인 행태다.
시국선언을 가벼이 여겨선 안 된다. 이명박 대통령과 여당은 각계각층의 시국선언이 확산되고 있는 이유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더 이상 민주주의를 후퇴시켜선 안 된다'는 국민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과 여당은 자발적이고 조직적인 시국선언이 민주항쟁의 동력이 됐던 22년 전의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2009년 6월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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