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기 이후 세계는 선진국과 후진국이 아닌 규제 강화국과 약화국으로 나뉘고 있다. 누가 금융자본을 많이 확장시켰는가가 아니라 방어벽을 잘 구축했는가에 따라 경제발전의 기회 보장 여부가 결정된다. 최근 급증한 단기유동성이 자산시장을 부흥시키면서 금융시장이 신기루에 휩싸였다. 세계에 흩뿌려진 파생상품의 위험성은 여전하고, 실물경기는 침체돼 있다. 국민을 고통의 늪에 빠트린 원인이 ‘규제 없는 금융자본의 무한확장’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신기루만 좇다 보면 파멸은 자명하다.


금융위기가 사라지고 금융자본이 살아나고 있다. 금융의 규제 없는 무한확장은 지난해 끝없는 추락으로 이어져 전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었다. 금융위기가 불러온 실물경기 침체는 전 세계 국민의 생존권을 위협했다.

금융자본의 위기는 최근 실물경기 침체에 가려지고 자산시장의 부흥 속에 잊혀져 가는 듯하다. 미국의 대표적 투자은행들은 공적자금 조기 상환을 추진하고 있다. 네다섯 달 전만 해도 정부 지원 없이는 생존조차 장담하기 어려웠던 금융기관들이 정부의 간섭이 싫다며 서둘러 돈 갚기에 나선 것이다.

금융위기 극복과 실물경기 침체완화를 위해 세계 각국이 취했던 유동성 확대 정책은 ‘갈 곳을 찾지 못한’ 거대한 자금을 만들었다. 시중을 떠도는 단기유동화 자금이 우리나라에만 811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자금이 각종 자산시장에 쏟아져 들어오면서 금융기관들이 재개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과거에 대한 반성은 뒤로한 채.

세계 정상들 “위기는 규제실패 때문”

“금융분야 규제와 감시 실패가 이번 위기의 근본 원인인 바, 강력하고 국제적으로 일관성 있는 감시와 규제 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모든 조치를 강구한다.”
지난달 2일, 영국 런던에서는 주요 20개국(G20) 정상들이 모여 세계를 휘감은 경제위기의 주범을 ‘규제 없는 금융체제’로 지목하고 개혁에 나서기로 합의했다.

‘글로벌 위기에는 글로벌 대응이 필요하다’는 인식 아래 △세계성장과 고용의 회복 △금융기관에 대한 감시와 규제 강화 △국제금융기관의 강화와 개혁 △보호주의 극복과 세계무역과 투자 촉진 △공평하고 지속가능한 세계경제의 회복 등 5개 분야에 대한 대책을 마련했다. G20 정상선언문을 발표한 것이다.

이수연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연구원은 “세계 정상들이 모여 금융정책이 잘못됐음을 지적하고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평가했다.
정상들은 금융위기를 일으킨 파생상품을 전 세계로 확대한 헤지펀드와 높은 신용등급을 부여하면서 이를 도운 신용평가사, 조세피난처 국가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기로 했다. 강화된 규제를 담당할 기구도 확대·개편했다. 주요 7개국(G7)을 중심으로 구성했던 금융안정포럼(Financial Stability Forum)을 G20이 참여하는 금융안정이사회(Financial Stability Board)로 확대했다. 금융안정이사회는 국제회계기준을 포함해 금융기관과 금융상품에 대한 규제 기준을 정하는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이제는 실물경제 회복으로

G20 정상들은 지난해 11월 미국 워싱턴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금융위기로 부동산·주식 등 자산가격이 폭락하고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던 파생상품이 휴지 조각으로 전락하던 때였다. 투자은행과 같이 세계를 풍미했던 금융기관들이 풍전등화에 놓인 상황에서 위기에 빠진 금융을 구해 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의제는 금융기관·상품에 대한 투명성과 규제 강화였다. △투명성과 책임성 강화 △건전한 규제확대 △금융시장의 건전성 증진 △국제협력 강화 △국제금융기구 개혁 등 5개 공동원칙에 따른 47개 중·단기 실천과제(액션플랜)를 마련했다.

5개월 간격을 두고 열린 G20 두 정상회의의 차이점은 주요 의제가 금융에서 실물부문으로 옮겨갔다는 것이다. 올해 들어 금융위기가 본격적인 경기침체를 불러오면서 실물부문에 대한 대책마련이 중요해진 것이다. 4월 런던 회의에선 금융규제에 관한 세부계획도 마련했지만, 보호무역주의 확산 방지와 세계 경제 부흥, 지속가능한 발전 모색이라는 세계적 실물경기 회복을 주요하게 논의했다.

자산시장 회복, 기지개 켜는 금융기관

그로부터 불과 1개월이 조금 지난 현재, 금융시장 기능이 일부 회복되면서 금융기관들이 다시 기지개를 펴고 있다. 각국 정부가 기준금리를 대폭 인하하는 등 유동성 확대 정책을 폈고, 늘어난 단기자금이 자산시장으로 쏟아져 들어와 부동산이나 주식가치를 높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한때 900선까지 떨어졌던 종합주가지수가 1천400대를 넘어섰고, 부동산시장도 서울 강남은 물론 전국적으로 들썩이고 있다.

미국에서는 대표적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와 모건스탠리 등이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경영 규제를 벗어나기 위해 공적자금 상환을 추진하고 있다. 이들은 금융위기를 가속화시켜 세계적 비난에 직면했던 은행들이었다. 부도위기에 내몰리면서 미국 정부의 공적자금을 애타게 요청했고 국유화 논란까지 일었지만, 지금은 임원 보수와 자산운용에 대한 규제를 받기 싫다며 공적자금 상황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자체 구조조정을 진행하는 한편 자산시장에 들어오는 단기자금을 바탕으로 증자나 채권을 발행해 자본을 확충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홍기빈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미국이나 한국의 상황을 살펴보면 금융위기를 불러온 금융체제에 대한 구조적·제도적 변화를 모색하기보다는 막대한 자금을 쏟아 넣으면서 금융과 자산시장을 이전 상태로 되돌리는 데 열중하고 있는 모양새”라며 “위기는 없던 걸로 하고 넘어가자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규제강화 위해 노조 참여 필요

물론 금융·자산시장 부흥에 따른 금융기관의 부활과 규제·감독의 주춤 현상이 전 세계적 흐름이라고 평가하기엔 이르다. 독일·프랑스 등 유럽연합(EU) 국가들은 영미식 금융체제를 비판하면서 금융분야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특히 구조적 결함을 고치지 않을 경우 앞으로 1~2년 내에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와 같은 금융위기가 재발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세계에 흩뿌려진 각종 파생상품의 위험성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고, 실물경기 침체로 기업 수익이나 가계 소득 등 자금을 유동화할 수 있는 근원 자산이 오히려 줄었기 때문이다.

홍 연구위원은 “금융기관이 유동성을 확대하고 그것을 받쳐 줄 수 있는 핵심 자산들이 늘지 않은 가운데 단기유동자금이 자산시장만 키울 경우 그것은 고스란히 거품이 될 수밖에 없다”며 “최근 상황은 지난해 금융위기 직전보다 좋지 않아 보인다”고 말했다. 지난달 2일 G20 정상회의가 열릴 당시 국제노총(ITUC)·OECD 노동조합자문위원회(TUAC)·국제산별연맹 등 세계 노동단체 관계자들이 같은 장소에서 ‘세계노동조합 런던선언’을 발표했다.

이들은 선언문에서 △경기회복과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한 국제적 정책 조정 △세계 금융을 통제하기 위한 새로운 규범 창출 △임금결정제도 강화와 분배정의 확산 △기후변화 국제협정 마련 △효과적이고 책임 있는 세계경제 통치제도 확립을 요구했다.
이러한 요구를 공식적으로 논의하기 위해 금융·경제위기의 최대 피해자이자 경제의 주요주체인 노동자·민중이 세계적 경제부흥과 금융규제를 토의하는 회의에 참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앞서 2월에는 G20 금융기관노조들이 국제노동기구(ILO)와 국제사무직노조연합(UNI) 금융포럼에 참가해 금융규제를 위한 국제적 공조는 물론 금융상품 책임판매 촉진과 과당경쟁 행위 제지를 위한 헌장을 채택하기도 했다. 포럼에 참석했던 문명순 금융노조 수석부위원장은 “금융위기 이후 세계는 선진국과 후진국이 아닌 금융규제 강화국과 약화국으로 나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며 “금융쓰나미가 미친 영향은 금융규제와 금융공공성을 얼마나 강화했느냐에 따라 차이가 클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2009년 5월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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