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는 지난해 11월23일부터 시작한 기획시리즈 ‘21세기, 복지에승부를’을 통해 복지선진국들의 복지 현장과 변화하는 정책·이념 등을 두루살펴봤다. 이만식 교수와 엄영진 실장, 신명호 부소장(왼쪽부터)이 21세기 한국 사회복지의나아갈 길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
이들 나라가 걸고 있는 길은 앞으로 한국사회가 걸어가거나 또는 비켜가야할길이기도 하다. <한겨레>는 이번 시리즈를 마무리하며 전문가 좌담회를 열어 한국복지의 현주소와 나아갈 길을 모색해 봤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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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선진국들도 최근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복지정책과 관련한 이들국가의 경향과 추세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겠는가?

이만식=선진국들의 복지정책은 전통적으로 좌파와 우파 또는 진보와 보수의특징을 나타냈다. 그러나 요즘 그런 특징이 퇴색하면서 정권에 상관없이 이념보다현실을 좇고 있다. 영국의 ‘제3의 길’이나 미국의 ‘상호의무주의’ 등이 모두그런 경우다. 이런 경향은 단적으로 말해 신자유주의 다른 표현이다.

엄영진=사회적 연대와 평등을 중시해 복지를 확대해 오던 경향은 70년대 중반이후 복지지출 효율성의 저하와 국민의 자립·자활의 기여도에 대한 의구심, 정부역할 팽창에 따른 관료화 등으로 신자유주의 이념의 등장과 함께 복지 축소로이어졌다. 그러나 이런 경향은 국민의 복지욕구와 경제발전을 어떻게 조화시킬것인가 하는 고민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눈여겨봐야 한다.

사회=선진국들의 그런 경향은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우리나라의객관적 현실은 선진국과 사뭇 다를 것이다. 세계 수준에서 볼 때 한국 복지는어디쯤에 있는가?

엄=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 대비 복지관련 지출은 6.8%로, 선진국의 15~30%에비해 매우 낮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재정지출 수준으로만 복지 수준을 얘기하는건 부적절하다. 우리나라 사회복지의 출발점을 1977년 의료보험 시행으로 봤을 때, 역사가 겨우 20여년에 불과하다. 반면 서구는 200년 가까운 역사를 갖고 있다.어느 나라든 의료보험과 연금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우리나라는 둘다역사도 짧고 보험료율도 낮다. 그러나 우리나라도 이제 외형적 틀을 다 갖췄다.2008년부터는 우리나라도 국민연금 지급이 본격화하고, 이 때부터 재정지출은급상승할 것이다.

이=역사가 짧다고 사회복지 재정 지출이 낮아야 하는 건 아니다. 우리나라가짧은 시간 안에 산업화·도시화된 만큼, 복지 또한 짧은 시간 안에 이를 받쳐줄만큼 확대됐어야 했다.

신명호=우리나라 복지가 외형적 모습에서 복지체계의 꼴과 구색을 갖췄다는말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복지는 현장에서 평가받아야 한다. 아직 우리나라의 복지급여수준과 복지체계에 대한 접근성, 생활과의 밀착도는 너무 열악한 수준이다.

사회=해방 이후 현 정권 이전까지 우리나라의 사회복지는 어떻게 변해왔나?

이=우리나라는 그동안 필요한 사람이 아닌 정권에 바탕 둔 사람에게 복지를 우선 제공해 왔다. 이승만 정권은 경찰연금을, 박정희 정권은 군인연금을도입했다. 5공화국 때는 취약한 정통성을 감추기 위해 ‘복지국가 구현’을 기치로내걸었고, 노태우 정권 때는 임대주택 제도 등 나름대로 국민생활에 와닿는 사업을벌이며 복지를 확대해 왔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상대적으로 정통성이 높았던김영삼 정권은 오히려 `세계화'를 주창하며 사회복지를 축소하고 말았다.

엄=60년대 이전에는 주로 외국원조에 의한 구호가 이뤄졌을 뿐 복지는 존재하지않았다. 우리나라의 복지는 1977년 의료보험과 의료보호, 산재보험이시작하면서부터 시작됐다. 그리고 본격적인 사회보장은 88년 국민연금 도입과 함께시작됐다. 그러나 사회연대성, 형평성, 보편성, 관리운영 등에서 문제가 있어,아이엠에프를 맞고 사회안전망 구실을 거의 못하는 일이 벌어졌다.

신=정권이 바뀔 때마다 새 제도가 선을 보였으나 외형 갖추기에 급급했다. 비슷한 성격의 제도를 갖고 있더라도 어떤 과정과 절차를 밟아 만들어지느냐가중요하다. 선진국의 높은 복지수준은 노동자계급의 운동이 이끌어낸 것인데 비해, 우리나라는 경제성장을 뒷받침하려는 정권의 의독낼錚芟좋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의 복지의식은 여전히 낮고 복지를확장하는데도 걸림돌이 되고 있다.

사회=현 정부 들어서는 복지에 대한 태도변화가 있었다고 보는가? 변화가있었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가 있었고, 이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가?

신=실제로 현 정부는 연금과 고용보험 확대, 의보 통합, 기초생활보장법 시행등 많은 난제를 풀어가고 있다. 특히 기초생활보장법에 따른 국민 최저생계 보장은획기적 변화다. 그러나 실제로 현장에서 듣는 서민생활의 개선이나 안정감이높아진 징후는 잘 안보인다. 처음부터 예산을 정해놓고 수급자가 이 범위를넘지않도록 수급자 기준을 만들어 생활보호자가 탈락하거나 오히려 급여가줄어드는 일까지 생겼다. 좋은 취지와 목적을 가진 제도가 이처럼 시행과정에서훼손된 것은 저예산과 `복지병'에 대한 지나친 우려 때문이다. 복지에 대한 태도가근본적으로 변했다고 보기 어렵다.

이=사회복지사 등 서비스 전달자의 전문성이 부족한 것도 수급자를 탈락시키는문제를 낳았다. 그들이 좀더 전문적으로 정확한 조사와 서비스를 한다면수급가능자와 수급자의 반발은 크게 줄어들 것이다. 현 정부가 사회안전망을확충하려는 건 분명하다. 그러나 전국 자활후견기관이 70곳이나 있는데, 이사람들을 데리걋?걍熾坪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은 거의 없다.

엄=생산적 복지에 대해 오해가 있는데, 생산적 복지는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말라’는 게 아니다. 능력이 안되는 사람은 국가의 의식주와 의료 서비스를 받을권리를 보장하고, 일할 능력이 있는 사람은 일할 기회를 줘 자아성취와 발전할기회를 주자는 것이다. 예산 때문에 수급조건을 높였다는 건 오해다. 수급조건은정부가 아니라 중앙기초생활보장심의위원회에서 정한다. 한가지 아쉬운 건 일하는사람들에겐 소득공제를 통해 인센티브를 충분히 줘야 하는데 충분하지 못하다는것이다.

사회=어떻든 생산적 복지라는 용어에는 수급자들이 거부감을 느낄 만한 면이없지 않다. 정부의 정책이 자활쪽에 너무 치중하는 경향이 없지 않은 것 같다.정책 차원에서 개선하거나 극복해야 할 문제는 없나?

신=자활이 좋은 말이긴 하지만 자활의 조건과 능력을 갖춘 사람이 전제돼야한다. 그런데 현장에서는 둘 다 안맞는 면이 있다. 가벼운 노동 밖에 할 수 없고독립이나 창업할 수 있는 조건이 안되는 사람들이 조건부 수급자에 포함돼 어쩔 수없이 자활프로그램에 참가한다. 자활후견기관 사람들은 “본의 아니게 강제노역감독관 노릇을 한다”고 말한다. 원래 자활대상 그룹은 자활대상에서 빠진차상위계층이다. 차상위계층의 생활실태와 규모에 대한 기초조사가 있었어 한다.

엄=생산적 복지에 대해 부정적 느낌을 가질 필요가 없다. 기초생활보장 대상자150만명 가운데 자활대상자는 10만명에 불과하고 140만명은 무조건적인수급자이다. 10만명중에서도 근로능력이 있는 4만명은 직업훈련을 시키고, 나머지6만명도 숲가꾸기에서부터 지역봉사활동까지 다양한 자활프로그램을 지원한다. 올10월부터 지자체 전산망과 금융기관 예금조회, 토지 등 부동산 정보까지통합데이터베이스화되면 수급자 선발에도 철저를 기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마지막으로 현 정부의 생산적 복지를 한국형 복지의 모델로 볼 수 있는지, 진정한 한국형 복지는 어떤 쪽으로 발전해 가야 하는지 정리해보자.

엄=적어도 한국 복지의 제도적 틀은 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국 가운데서도 중간이상의 수준이다. 기초생활보장제도를 시행하는 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국가운데서도 드물다. 연금수급시대에 접어들면 재정도 폭발적으로 늘어나 복지가빠르게 내실화할 것이다. 다만 아직까지도는 취약계층에 대한 복지서비스가소홀했다. 앞으로 이 문제를 푸는데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국민 누구에게나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겠다는 기본이념에 복지의 효율성까지 담아내려는 게 생산적복지다. 다음 정권에서 이름이 바뀔지는 모르지만, 어느 시대 어느 정권에도변하지 않는 한국적 복지의 목표이자 기본모델이 될 것이다.

이=생산적 복지는 지엽적 제도가 아니라 현정부의 총괄적 복지 정책이다. 또 현정부의 정책이 복지확대라는 데에도 동의한다. 국민에게 복지에 대한 개념을 갖게해준 것 만해도 큰 성과다. 하지만 정부는 행정체계 미비로 사회복지에 대한불신을 심어주기도 했으며, 생산적 복지라는 용어 때문에 복지는 소비적이고비생산적이라는 인식까지 준 게 사실이다. 좀더 나은 복지 서비스를 위해 정부와국민 모두가 좀더 많은 부담을 져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정부의 리더십이필요하다. 나아가 취약계층이 기초생활보장제도 수급 수준까지 떨어지기 전에 미리예방하는 서비스에 심혈을 기울여 한다. 그건 복지를 좀더 길게 보고 투자한다는 걸 의미한다.

신=한국형 복지가 따로 있는지는 모르겠다. 어떻든 한국의 복지는 이제 겨우싹이 트려는 상태다. 그런데 벌써부터 복지병 얘기가 나오고 있다. 배고픔을 겨우벗어나니까 비만 걱정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복지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다 보니복지를 수급받는 것을 곧 도덕적 해이로 여기는 정서가 일반 국민의 마음 속은물론 정책생산자의 고급담론에까지 반영돼 있다. 예산 부족으로 제도 취지가훼손되는 결과도 여기서 비롯된다. 이것이 바로 `반복지'다. 반복지는 복지의필요성을 부인하는 게 아니라 복지를 부차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정부와국민의 인식을 바꾸고 견인하기 위해 민간차원의 사회복지운동이 전개돼야 할때다. <끝>

일시 및 장소:2001년 2월6일 한겨레신문사 8층 회의실
참석자: 엄영진 보건복지부 사회복지정책실장
이만식 침례신학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신명호 한국도시연구소 부소장
사회:배경록 <한겨레> 민권사회1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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