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효과 대신 경기침체로 기업 수익구조 악화

최근 금융위기와 실물경제 침체는 수출기업에 유리하다는 환율효과를 무색케 한다. 급락과 급등을 반복하고 있는 환율이 경기침체로 나빠진 기업환경에 불확실성을 가중시킨다. 요동치는 환율에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국내기업의 실태를 살펴봤다.


환율이 다시 요동치고 있다. 지난해 말 1달러에 1천418원을 기록했던 환율은 이달 2일 장중에 1천595원으로 치솟으면서 한때 1천600원선을 위협했다. 이달 2일 마감환율 1천570원은 98년 이후 최고치다. 급등하던 환율은 이달 중순을 기점으로 하향세로 돌아섰고 27일에는 1천349원까지 내려왔다. 환율의 급등락은 국내 기업들을 혼란 속에 빠뜨렸다. 수출과 수입 등 대외의존도가 높은 제조업들의 환율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환율딜레마’에 빠진 기업들

환율상승은 통상적으로 제조업 수출기업에 유리하다. 원·달러 환율의 상승은 국내 생산제품의 해외판매 가격을 낮춰 가격경쟁력을 높인다. 국내 수출기업들은 낮아진 수출단가로 판매량 증가 효과를 얻는다. 수출 비중이 큰 조선·자동차·반도체·디스플레이·석유화학 등은 환율이 상승하면 외화 순유입이 늘어난다.

이들 업종은 지난해 10월까지 외화 순유입액의 증가로 환율상승 효과를 누렸다. 반면 원자재나 자본재의 가격인상을 유도함으로써 국내 소비자물가의 상승을 가져온다. 정부와 국내기업의 외채상환 부담 가중도 환율상승의 부정적인 면이다. 수출에 비해 수입 비중이 큰 항공·음식료·정유·철강 등은 외화 순유출이 늘어난다. 원재료인 곡물·원유·철광석 등 수입에 들어가는 비용증가로 외화가 순유출되는 현상이다. 섬유·컴퓨터·전기기계·가구·가죽제품·목재·펄프 등도 수입 원자재의 비중이 높거나 인건비 부담이 많은 업종이다. 이들 업종에는 대기업보다는 중소기업들이 많이 분포해 환율상승에 취약한 구조를 보인다.

수입기업, 환율상승에 환차손 이중고

최근 금융위기와 실물경제 침체는 수출기업에 유리하다는 환율효과를 무색케 한다. 급락과 급등을 반복하고 있는 환율이 경기침체로 나빠진 기업환경에 불확실성을 가중시킨다. 지난해 하반기부터의 환율급등은 항공·철강·정유 등 원자재 수입 의존도가 높은 업종들에서 시작돼 전체 제조업의 실물경기 악화로 번져가고 있다.

대한항공은 1달러당 환율이 10원 오르면 연간 200억원, 아시아나항공은 75억원가량의 비용부담이 늘어난다. 두 항공사가 지난해 초 설정한 환율예상치는 1달러당 920원가량이었다. 지난해 평균환율(1천70원)을 적용하면 두 항공사는 각각 3천400억원과 1천275억원의 손실을 입었다. 대한항공은 환율상승의 여파로 지난해 993억원의 영업적자를 냈고, 1조8천259억원의 환차손까지 생겨 1조9천424억원의 순손실을 기록했다. 아시아나항공은 2천271억원의 영업적자에 2천474억원의 환차손까지 더해져 4천745억원의 순손실을 입었다.

수출과 수입 기업의 특성을 모두 나타내고 있는 석유정제·석유화학업종도 매출증대에 따른 이익개선보다 외화관련 부채로 입는 손실이 더 크다. 업계에서는 환율이 1달러에 50원 상승하면 석유정제·석유화학업종의 매출과 영업이익은 4% 정도 증가하지만 외화관련 손실증가 등으로 전체 이익은 5~8% 감소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업계 1위인 SK에너지는 지난해에 9천70억원의 순이익에도 1조392억원의 환차손을 극복하지 못해 322억원의 순손실을 기록했다. 대표적인 수출주력업종인 자동차업종는 환율이 뛰면 매출이 늘어나는 혜택을 누려야 하나 실상은 다르다. 국내 완성차업계는 생산량의 70%가량을 수출하고 있다.


환율효과 못 보는 수출기업들

현대·기아·GM대우·쌍용·르노삼성 등 완성차업계는 지난해 말부터 20~30%가량의 생산량을 감축했다. 세계 자동차업계의 생산능력(9천500만대)과 올해 판매 예상치(6천만대)에서 빚어지고 있는 공급과잉(3천500만대) 극복이 과제다. 완성차업계는 대량의 자동차를 생산해 해외 현지법인으로 밀어내던 기존 방식에서 탈피해 올해 초부터 주문량만 생산하는 체제로 전환했다. 경기침체 상황에서 기존 생산물량을 고수하게 되면 재고부담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업계 1·2위인 현대차와 기아차는 △현금유동성 확보 △생산 감축 △원가절감 활동 강화 △생산유연성 제고 △소형차시장 공략강화를 위기극복의 방향으로 정했다. 수출의존도가 높은 GM대우차는 올해 적자경영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전자업계는 높은 부품 수입의존도가 부담이 되고 있다. 전자업종은 부품의 30%가량을 수입에 의존한다. 높아진 부품가격을 만회하기 위해 수출량이 늘어야 하는데 판매량이 줄어들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4분기에 9천400억원의 손실을 기록했다. 분기별 실적을 집계한 2000년 뒤 분기 적자를 기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올해 1분기의 실적도 4분기와 유사한 규모의 적자가 예상된다. 삼성전자의 적자전환은 경기침체 탓이다. 삼성전자는 현재 6조원가량의 사내유보금을 쌓아뒀지만 불안감이 높다.

업계 관계자는 “외부에서 보기에 수조원의 현금이 많아 보이지만 거대 기업을 유지하는 입장에서는 불과 2~3개월의 운영자금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수출효자 업종인 자동차와 전자의 불황은 환율상승이 수출증가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환율상승이 수출기업에 유리하다는 가설은 해외시장의 판매가 그대로 유지된다는 전제조건에서 성립되기 때문이다.

‘환율약발’의 부재로 수출중심형 한국경제가 일대 혼란에 빠져 들고 있는 국면이다. 환율상승에도 수출이 감소하고 있는 기현상이 나타난다. 지난해 7월이후 환율과 수출금액의 변화는 달라진 지형을 잘 보여준다. 환율과 수출의 상관관계는 지난해 11월 이전과 이후로 구분된다. 지난해 7월의 월평균환율은 1천19원으로 2007년 7월에 비해 11%가 상승했다. 이어 8월(1천41원)·9월(1천130원)·10월(1천326원)에도 각각 1년 전보다 11.5%, 21.2%, 44.2%의 고공행진을 이어갔다. 이 기간 수출총액은 7월(409억달러)·8월(366억달러)·9월(374억달러)·10월(371억달러) 등으로 1년 전보다 35.6%, 18.1%, 27.6%, 7.8%씩 증가했다. 환율이 상승하면 수출이 증가한다는 공식이 적용되는 구간이다.

11월 이후 상황은 달라진다. 환율의 상승은 이어지지만 수출은 반대로 줄어든다. 월평균환율은 11월(1천390원)·12월(1천458원)에 이어 올해 1월(1천341원)·2월(1천420원)을 기록해 1년 전보다 50% 이상 상승했다. 지난해 10월까지 환율과 동반상승하던 수출의 흐름은 11월부터 꺽이기 시작했다. 1년 전보다 11월의 수출액이 -19.5%를 기록한 데 이어 12월에도 -17.9%를 나타냈다.

100대 기업 환차손만 16조원

올해 1월에는 -33.8%로 최악의 수출감소를 보였고, 지난달에도 1년 전보다 수출총액은 17.1%나 감소했다. 기업들은 경기침체로 환율효과를 못 얻고 있는데다 외화부채의 증가로 인한 막대한 환차손을 입고 있다. 금융회사를 제외한 매출액 상위 국내 100대 기업의 지난해 재무제표를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100대 기업의 지난해 환차손은 16조731억원으로, 2007년의 8천81억원에 비해 무려 1천889%나 증가했다. 환율변동에 따른 손실액이 2007년의 20배가량 늘었다.

늘어난 환차손으로 인해 100대 기업의 지난해 순이익은 22조7천723억원으로, 2007년(39조3천604억원)보다 42% 감소했다. 거액의 환차손을 입은 이유는 기업들이 보유한 외화부채가 외화자산보다 많고, 외화부채 가운데 달러부채가 60% 이상이기 때문이다. 환율상승이 그대로 기업의 환차손으로 이어지는 구조다.

전통적인 환율상승 수혜업종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도 최근 환율변동 과정에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다. 수주산업인 조선업종은 환율상승분 만큼 이익을 올릴 수 있는 구조다.
조선업종은 수주계약이 달러로 체결되고 선박인도 후 선박제조사로 돈이 유입된다. 계약당시보다 선박인도 시점의 환율이 높아지면 그만큼 이익이 발생한다. 현대중공업·삼성중공업·대우조선해양 등 국내 조선업체 ‘빅3’는 외환위기 뒤 막대한 환차익을 올렸다.

환율 수혜업종 사라져

그런데 최근에 빚어지고 있는 환율약발은 일부 기업에서만 발견된다. 현대중공업은 지난해 555억원의 환차익을 냈다. 2007년 144억원보다 4배가량 환차익이 늘었다. 반면 삼성중공업은 지난해 464억원의 환차손을 입었다. 2007년 120억원의 환차익을 낸 것과는 대비된다.

통화옵션상품인 키코(KIKO)에 가입했다 큰 피해를 본 대우조선해양은 지난해 환차손이 1천88억원에 달했다. 급변하는 환율의 고통은 중소기업으로 내려오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해외에서 수입되는 원자재를 가공해 대기업에 납품하는 중소기업은 환율이 상승하는 만큼 재무구조가 악화될 수밖에 없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경영학과)는 “외환위기 이후 부채비율을 지속적으로 낮춰 온 대기업은 그나마 상당기간의 경기침체를 극복할 수 있는 여력을 갖고 있다”며 “외환위기 보다 채산성이 악화된 중소기업들에게 환율급변으로 부도직전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고 말했다.


<2009년 3월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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