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는 서비스업계 노동의 가치를 가늠하는 척도가 됐다. 지난 2006년 시작된 서비스 여성노동자를 위한 의자 놓기 운동은 지난해 국민캠페인단 발족을 계기로 급속히 확산됐다. 그 결과 전국 곳곳의 백화점·할인마트·유통업체에 의자가 놓이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서서 일하는 서비스 노동자들은 근골격계질환을 달고 산다.
화장실도 자주 가지 못하고, 휴식시간과 휴게공간도 턱없이 부족하다. ‘친절에 대한 감시’와 ‘소비자에게 받는 폭언·폭력’ 등 감정노동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더 심각하다.
민주노총 노동안전보건위원회는 2006년 8월 비정규·영세·여성·이주노동자 등 안전보건 취약노동자의 건강권 의제를 개발하고 사업을 진행할 기구를 마련했고, 이듬해 6월 취약분과를 발족했다. 민주노총 민간서비스연맹부터 사업을 시작하기로 했다. 서비스연맹은 해외 사례를 확인하면서 서비스 노동자 건강권 문제를 적극 검토하기 시작했다.

의자, 얼마나 놓았을까

서비스연맹이 최근 녹색병원 노동환경연구소와 함께 펴낸 보고서에 따르면 캠페인의 영향으로 의자를 제공한 사업장은 전국적으로 15개 지역, 100여곳에 달한다. 경남의 사천휴게소와 마산 대우백화점이 처음으로 의자를 놓았고, 애경백화점·신세계백화점·대구백화점·동아백화점(대구)·대동백화점(창원)이 계산원들에게 의자를 제공했다. 롯데백화점과 현대백화점은 2008년 12월까지 의자를 비치하겠다고 밝혔다.

대형마트도 ‘의자 놓기’에 동참했다. 홈플러스 평촌점·부천여월점·해운대점, 세이브존 노원점, 태백농협 하나로마트, 광양 하나로마트가 의자를 놓았다. 뉴코아아울렛은 이달 중으로 의자를 놓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최근 새로 문을 연 이마트 안성점은 아예 앉아서 계산할 수 있는 계산대를 도입했고, 사천휴게소에 이어 신탄진휴게소와 문막휴게소에도 의자가 놓였다. 노동부에 따르면 현재 전국 15개 대형 유통업체 매장 427곳 중 111곳에 계산원과 안내원 등 서서 일하는 노동자를 위한 의자를 놓였다. 김신범 노동안전보건교육센터 교육실장은 “이제 시작일 뿐”이라며 “계산원 노동자들에게만 의자를 주면서 ‘시범적으로 시행한다’는 말을 꼭 붙이는 매장도 있다”고 지적했다.
 

‘의자 놓기’와 ‘의자 앉기’

“의자를 놓긴 했는데요. 앉기는 힘들어요. 회사에서 바르게 앉는 지침을 가르쳐 주기도 하는데요. 의자에 앉아서 일하면 손님들에게 ‘예의 없다’는 인상을 줄까봐 그런 것 같네요.”(서울의 한 유통매장에 일하는 최아무개씨)

실제 “계산원들이 의자에 앉아 있다”며 민원을 제기하는 사례가 없지는 않다. 서비스노동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해프닝이다. 서서 일하는 노동자에 대한 시각은 세계 각국의 문화적 인식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민주노총의 조사 결과 하루 노동시간의 75% 이상을 서서 일하는 노동자의 규모는 스칸디나비아반도의 경우 30~40%, 북미대륙은 50~70%에 이른다. 스웨덴에서는 하루 노동시간중 10% 이상을 서서 일하는 노동자는 10명 중 2명에 그친다.

민주노총은 “사업장에 의자가 있느냐 없느냐는 노동의 가치에 대한 인식과 노동자에 대한 존중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고 지적했다.

의자는 ‘사회적 합의’ 상징

반면 우리나라 사업주들은 의자를 놓는 시늉만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전북의 한 유통매장에서 일하는 김아무개씨는 “의자가 있긴 한데 구석에 있어 앉기가 힘들다”고 털어놓았다. 정민정 서비스연맹 여성부장은 “대다수 사업주들이 여전히 의자를 놓는 일에 눈치를 보고 있다”며 “사업주들이 계산원 노동자에게만 의자를 제공하는 것으로 적당히 마무리하려는 것 같다”고 말했다.

노동계는 지난해 의자 놓기 국민캠페인을 통해 사회적 인식 전환에 주력했다. 현행 산업안전보건법 ‘산업보건에 관한 규칙’(277조)에 규정에 따르면 사업주들은 서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의자를 제공해야 한다.
이를 어겨 정부의 시정명령을 이행하지 않으면 5년 이하의 징역과 5천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진다. 노동자들이 작업 중간 앉을 수 있는 의자를 요구하면, 이를 받아들이는 것도 사업주 의무사항이다.

‘의자 놓기’에서 ‘의자 앉기’로 나아가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노동자가 의자에 앉아 일하면 관리자들은 ‘게으르다’고 평가하고, 고객들은 ‘건방지다’고 인식한다. 이래저래 서비스 노동자들이 심적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때문에 의자에 앉을 수 있는 주위 여건을 만드는 게 관건이다.
서비스연맹은 “올해는 의자를 놓지 않는 사업주의 비도덕성을 폭로하는 등 감시·견제활동을 강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노동부도 올해 의자 놓기에 대한 인식 전환을 위해 홍보활동에 주력할 방침이다. 서비스 노동자들의 건강권 확보를 위해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도 확대하기로 했다. 노동부 근로자건강보호과 관계자는 “300인 이하 사업장 중에서 대기업이 아닌 곳에서 지원을 요청하면 의자뿐만 아니라 피로예방 매트를 제공하고 계산대 리모델링을 지원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의자’가 서비스유통 여성노동자의 건강권 확보와 서비스노동에 대한 존중이라는 사회적 합의의 상징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의자 놓기’ 캠페인을 넘어 ‘의자 앉기’로 나아가야한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캠페인의 영역도 서비스 여성노동자들의 감정 노동과 직무 스트레스 등 정신건강 전반으로 확대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2009년 3월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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