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경기불황을 극복하기 위해 ‘아껴 쓰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멀리 앞을 내다보거나 지난날을 되돌아보기도 한다. 소주잔을 들이키며 대박을 꿈꾸는 사람도 있고, 공부에 몰입하는 사람도 있다.

회사원 정아무개(47·서울 길동)씨는 최근 한 인터넷 서점의 우수 고객이 됐다. 경제 관련 서적 수십권을 한꺼번에 구입했기 때문이다. 경제학원론은 물론 한국경제와 자유주의 경제를 파헤친 국내외 저명 학자들의 서적을 사들였다. 정씨는 지난해 금융위기가 닥친 뒤 경제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경제위기 현상이 왜 생기는지 알지 못하면 앞으로 살아 가기가 쉽지 않다는 판단에서다. 그는 “어려운 말 투성이지만 퇴근 후에는 시간가는 줄 모르고 책 읽는 재미에 푹 빠져 지낸다”고 말했다.
경제불황이 독서 흐름도 바꿔 놓았다. 한때 주식과 펀드 등 투자를 권유하는 도서가 인기를 끌었지만 이제는 다르다. 미래를 예측해 불안한 심리를 이겨보고자 하는 욕구가 책읽기에도 반영되고 있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지난해부터 재테크 도서는 인기가 떨어졌고 자유경제 논리를 반박한 경제서적이 인기를 끌고 있다. 최근 300년 동안 전세계에서 일어난 주요 사건의 모든 배후에 국제금융자본세력이 있음을 보여주는 ‘화폐전쟁’(쑹훙빙/랜덤하우스)은 지난해 경제·경영분야 베스트셀러 11위에 오르더니 2월 두째주에는 3위에 올랐다. 경제·경영분야 2위는 35년 전에 집필된 엘빈 토플러의 ‘불황을 넘어서’가 선정됐다. 1위는 재테크 관련 책인 ‘4개의 통장’(고경호/다산북스)이 차지했지만 주식이나 펀드 얘기가 아니다.

“도대체 왜?” … 경제비판 서적 ‘날개’

통장을 용도별로 나눠 아껴 쓰면서 돈을 모으라는 내용의 서민을 위한 책이다.
교보문고 홍보팀 관계자는 “2008년 10월 최악의 경제난을 겪은 뒤로는 불안한 상황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는 욕구가 많아서인지 자유경제비판·금융비판·전망서 등이 꾸준한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흐름은 어제의 어려움을 바탕으로 내일의 미래를 발견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이 때문에 사회과학 범주인 경제학뿐 아니라 기본적인 인문학 서적의 성장도 예견된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지난해에는 인문 분야에서 심리학 관련 책이 인기를 끌었다. 인문분야 베스트셀러에서 심리학 관련 서적이 1위를 차지했고, 20위권 내에 6종이 올랐다. 교보문고는 “올해도 이런 현상이 이어지고 철학 관련 도서의 발돋움도 예상된다”며 “개인의 불안과 경기불황의 해법을 인문학이 던져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어려울 때 가족을 찾는 정서는 책 구매에도 반영된다. 외환위기 당시 문학 키워드가 ‘아버지’였다면 지금은 ‘어머니’라는 것이 차이다. 97년 연간 베스트셀러 2위에 소설 ‘아버지’가 올랐는데 지금은 ‘엄마를 부탁해’(신경숙/창비)가 떠오르고 있다.

책 속에서 찾는 ‘가족의 정’

‘엄마를 부탁해’는 2월 두째주 교보문고 종합베스트셀러 2위, 소설부문 1위다. 어머니의 부재로 발생하는 가족 내 갈등과 해소를 다루며 어머니의 중요성을 깨닫게 한다. 교보문고 홈페이지에 누리꾼 ‘sun3250’은 “나를 돌아보게 한 시간이었다. 엄마를 찾는 시간이었다. 빡빡한 삶에서 여유를 찾고 사랑을 찾는 시간들이어서 달콤하고 행복했다”고 서평했다.

세계적인 경제위기에 따른 환율폭등은 해외여행 저조로 이어지고 있다. 이 영향을 받아 여행서적도 가이드서적 보다는 대리만족을 느끼게 해주는 기행서적이 인기다. 지난해 교보문고 여행·기행 분야에 기행서 4종이 10위권 내에 진입하면서 인기를 끌더니 올해에도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반면 항상 상위권이었던 일본여행 가이드서적은 갈수록 자리를 잃고 있다. 또 여행트렌드가 환율걱정 없는 국내여행으로 바뀌면서 ‘대한민국 웬만한 곳 다 있다’ 등 국내 명소나 도심 속 인기장소를 소개하는 도서의 판매가 눈에 띄게 늘었다는 것이 업계 설명이다.

경기불황에 따른 자격증 열풍도 뜨겁다. 중소기업에 다니는 이아무개(35·서울 동자동)씨는 아내가 임신한 지난해 11월부터 인터넷 강의를 보면서 공인중개사 자격증 공부를 시작했다. 부동산 업계에 진출할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갈수록 심해지는 불황과 곧 태어날 아기를 생각해 일종의 ‘보험’을 든다는 생각이다. 이씨는 “자격증을 어떻게 써 먹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따 놓고 보자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보습학원 강사인 김아무개(32·서울 신길동)씨도 독서지도사 자격증을 준비하기로 마음 먹었다. 경제가 어려워지는데다가 언제까지 학원강사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오후에 출근해 밤 늦게까지 일하면서 1년6개월된 아기를 친정에만 맡기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김씨는 “낮에 일할 수 있는데다가 장기적으로는 자아실현이나 아이 교육에도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앞날을 모르니 따고 보자

고시·자격증 전문교육기관인 에듀윌에 따르면 무료회원으로 가입해 정보를 수집했던 수험생들이 온·오프라인 유료수강생으로 전환하는 사례가 급증했다. 지난 1월 기준으로 전년도 대비 공인중개사 48%·주택관리사 62%·사회복지사 30%가 늘었다. 에듀윌은 “경기불황으로 재취업이나 창업을 하려는 사람이 늘면서 공인중개사나 주택관리사 등 전문 자격증 취득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설명했다.

이왕이면 싼값에…헌책의 재발견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독서든, 자격증 공부든 경기 불황의 책읽기 열풍은 ‘헌책’의 호황을 낳고 있다. 인터넷을 통해 검색할 수 있다는 잇점 때문에 온라인 헌책방의 약진이 눈에 띈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 따르면 지난해 2월 말 서비스를 시작한 중고도서 거래 이용자가 최근 급격히 늘었다. 지난해 3~9월 하루평균 주문량은 3천717권이었지만 경기침체가 본격화된 10~11월에는 16% 늘어난 4천320권이었다. 최근에는 9월 이전과 비교해 32%나 늘었다. 거래 분야도 다양해졌다. 예전에는 기간이 지나면 소유가치가 떨어지는 중·고교 참고서와 유아 서적이 주로 거래됐지만 최근 이들의 비중은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대신 인문·사회·경제·자기계발·문학 서적의 비율이 높아졌다는 것이 알라딘측 설명이다.

헌책 전문몰 ‘고구마’도 자기계발서적과 유아서적 등을 중심으로 전년도 같은 기간에 비해 10% 정도 판매량이 늘었다. 이범순 고구마 대표는 “저렴한 가격에다가 어려운 때일수록 앞만 보기보다는 뒤를 돌아보는 사람들의 심리 때문에 헌책으로 눈길이 돌아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2009년 3월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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