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벽두부터 ‘일자리 나누기’가 화두로 떠올랐다. 노동시간단축을 통해 일자리를 지키거나 늘리는 방안을 노사정 모두가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도 자의든 타의든 동참 분위기에 휩쓸리고 있다. 경기침체로 고용불안감이 더욱 커졌고, 노동자가 느끼는 생존위협도 그만큼 높아졌기 때문이다. 임금(축소)문제를 두고 노사정 이견이 커 타협이 이뤄지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이지만, 경기침체가 가속화하면서 2009년 노사정 모두에게 일자리 문제는 피할 수 없는 화두가 될 것이 분명하다.

제조업, 불가항력적 일자리 나누기

제조업을 중심으로 현장에서는 일자리 나누기가 진행되고 있다. 최근 일자리 나누기의 대표 사례로 거론되고 있는 하이닉스와 발레오만도, 삼우정밀 등은 전환배치·교대제 개편·무급휴가 사용 등을 통해 노동시간을 단축, 일자리 지키기에 나섰다. 노동시간단축에 따른 임금축소가 뒤따랐다. 올해 경기침체가 가속화하면서 이같은 움직임은 개별기업을 중심으로 더욱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임금삭감을 핵심으로 하는 일자리 나누기를 확산시키려 하고 있다. 대기업을 중심으로 한 기업들도 고용안정 카드를 꺼내들면서 임금삭감을 주장하긴 마찬가지다. 노동계도 일자리 문제에 대한 고민은 깊지만 임금(삭감)문제를 두고 정부나 기업들과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 특히 필수공공재인 의료·교육·주택 등에서 사회공공성이 약한 우리나라 상황에서 임금축소는 가계의 생활고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노동계가 더욱 몸을 움츠리고 있는 이유다. 노동계 일각에서는 노동시간단축을 위험요인이 아니라 기회요인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경기침체로 생산감축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무엇보다 비정규직을 포함한 총고용보장, 즉 노동자 간 일자리 연대(지키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노동시간단축에 따라 축소되는 임금은 노사정이 같은 비율로(예컨대 3분의 1씩) 공동 부담해야 한다는 것이 전제다. 이같은 방안이 국민적 지지를 획득할 수 있도록 정치·사회적 활동이 뒤따라야 한다. 또 주5일제 도입에도 사라지지 않고 있는 장시간 노동문화를 이번 기회에 바꿔내야 한다는 주장도 같은 맥락에서 제기되고 있다. 경기침체 가운데 인력을 늘려달라는 요구도 있다. 민주노총 공공운수연맹은 최근 행정기관과 공공기관을 중심으로 고용을 확대해 경제위기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 기관에서 10%의 인력을 증원한다면 16만5천개의 일자리 창출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공공행정·국방 및 사회보장 행정’ 분야 고용비중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평균은 6.14%지만 한국은 절반 수준인 2.93%에 불과하다는 것을 근거로 내세웠다. 인력확충을 통한 실노동시간의 단축과 교대근무조의 확대도 제안했다.

보건·공공기관 “인력 좀 늘려주세요”

신규 채용인력 1인당 연봉 2천만원을 기준으로 3조3천억의 재원을 마련하면 실현 가능한 계획이라는 게 연맹의 설명이다. 연맹 관계자는 “경제위기 국면에서는 정부가 재정지출을 확대하는 등 행정·공공기관의 역할이 커지기 때문에 인력이 더 필요하다”며 “공공부문과 사회서비스분야의 적극적인 고용확대야말로 경제위기 극복의 지름길”이라고 말했다.
보건의료노조도 올해 인력확충을 요구할 계획이다. 2008년 OECD 보건통계에 따르면 병상당 간호사 수(2006년 기준)는 한국이 0.33명으로, 미국 1.56명·프랑스 0.58명·독일 0.77명 등 선진국보다 낮다. 인구 1천명당 간호사 수도 한국은 4.0명으로, 미국 10.5명·일본 9.3명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적은 간호사 수는 간호 인력의 노동강도를 높여 의료의 질을 떨어뜨리고 환자 가족의 부담도 증가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보건의료노조는 설명했다.

국민 삶의 질도 높여야

보건의료노조는 올해 의료인력 확충을 사회적 일자리 창출운동으로 확대해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이주호 노조 전략기획단장은 “우리나라의 간호사 수는 턱없이 부족한 상태고 보건의료산업은 다른 산업과는 달리 경제위기 여파가 덜하다”며 “병원이야 말로 사회적 일자리를 창출하는데 최적”이라고 강조했다.
진보정당과 노동계는 정부가 재정지원을 통해 공공부문 사회서비스 일자리를 인위적으로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부족한 일자리 문제를 해결하는 한편 공공서비스를 강화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진보신당은 출산가정에 공공산후조리서비스를 제공하고 0~6세 아동에 대한 보육서비스를 확대하자고 제안했다. 노인과 장애인에게 각각 장기요양과 활동보조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주노총도 요양·보육·교육·간병 등 사회서비스 영역에서 일자리 창출을 요구했다.
두 단체는 이 같은 사회적 공공서비스 확충으로 4년 동안 85만개의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공공 산후조리원과 보육시설을 만드는 인프라 구축 사업을 비롯해 서비스 제공 인력을 합칠 경우 충분히 가능한 수치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시설 확보 등 인프라 구축비용과 노동자 당 170만원 상당의 월급을 합칠 경우 4년 동안 약 23조~25조원(연평균 6조원)에 달하는 재정이 필요하다고 추산했다. 민주노총은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17조5천억원에 달하는 감세정책과 사회간접자본 투자 증액분 4조6천억원을 철회하고 각 지방자치단체가 사업비를 일부 보조한다면 재정은 충분히 마련할 수 있다”고 밝혔다. 또 이들은 괜찮은 일자리가 창출될 뿐만 아니라 국민 기본권 보장에 필요한 사회서비스를 공공재원을 통해 지원하면서 국민의 삶의 질도 높아지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은행 영업시간 변경 활용해야

은행을 중심으로 한 금융권은 지난해 경기한파 속에서도 적게는 수백 억원에서 많게는 수조원대에 이르는 이익을 거둘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제조업에 비해선 상대적으로 채용여력이 있다는 평가다. 최근 금융권 노사가 영업시간변경에 따라 야근문화 없애기 운동을 펼치고 있는 만큼 노동시간을 단축하거나 실질적인 노동강도 완화를 위해 신규인력을 확보할 필요성도 있다. 금융노동자들은 상대적으로 고임금을 받고 있다는 비판에 시달리면서도 “하루 11~12시간에 달하는 장시간 노동과 창구업무를 비롯한 각종 상품 판매 등 일인다역을 하고 있는 노동강도에 비한다면 결코 많은 임금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항변해 왔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달 29일 “공공부문과 금융부문이 일자리 나누기에 앞장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는 이에 따라 공기업과 공공기관 305곳의 전수조사를 토대로 대졸 초임을 5~10%가량 일괄 줄이면서 신규 채용을 늘리는 방안을 세웠다. 공공기관을 선두로 해서 금융권 등 민간기업으로 연봉 감액 움직임을 확신시킨다는 속내를 감추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정부의 들쭉날쭉 정책이 노동계를 잔뜩 움츠리게 하고 있다. 김길영 금융노조 정책부위원장은 “이명박 정부의 일자리 정책은 신뢰성이 없다”며 “고용문제에 대한 일관된 메시지를 줘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기에 상황을 어렵게 만들어왔다”고 비판했다.
 

지난해 은행권 노동자의 고임금을 지적하면서 임금동결을 이끌어 내고 금융공기업 일자리는 줄이는 등 금융노동자들의 고용불안감을 한껏 키우더니 이제와 일자리를 늘리라고 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는 지적이다. 김 부위원장은 “현장에서 고용불안감이 한층 고조된 상황에서 신규 채용을 늘리는 것은 기존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위협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공공기관의 경우에도 지난해 12월에는 10%의 정원을 감축하겠다(제4차 공공기관 선진화 방안)고 발표했다가 올해 들어서는 신규채용을 늘리라고 압박하는 등 정부의 고용정책이 일관성이 없다는 지적이 높다. 정부는 당시 “공공부문 영역을 줄여야 민간 일자리가 창출된다”며 “공공기관 인력효율화는 감축이 아닌 민간 일자리로의 전환”이라는 논리를 폈다. 노동계에서는 “이명박 정부가 정착 인력창출이 필요한 분야는 외면하고 4대강 정비사업과 SOC 건설 등 ‘삽질경제’에 힘을 낭비하고 있다”는 지적을 끊임없이 제기하고 있다.

노동자 간 연대에 나서자

일자리를 지키고 늘리는 것은 개별 노동자(가구)의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내수부양을 통해 우리나라 경제를 선순환구조로 전환하는 데도 중요하다. 세계적 경제침체로 수출 길이 막히면서 우리나라 기업들은 판로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세계경제가 나아질 때까지 내수로 버틸 수밖에 없다는 것이 경제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무엇보다 특정 기업이나 개별 노동자가 아닌 전체가 함께 살 수 있는 일자리 나누기가 모색돼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특히 법적인 보호를 받지 못하는 비정규직들이 해고의 칼날을 먼저 맞고 있는 상황에서 노동자 간 일자리 연대는 중요하다. 오건호 사회공공연구소 연구실장은 “일자리 나누기는 노동자 간 일자리 연대가 핵심이라는 의미를 살려야 한다”며 “개별노동자뿐만 아니라 비정규직 등 모든 노동자가 함께 살 수 있는 방안이 모색돼야 한다”고 말했다.

<2009년 2월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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