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불황으로 인해, 장문의 판결문을 골라 쓸 수가 없었다. 오로지 민족중흥의 역사적 망령을 떠올리며 필자만의 우국충정으로 조금이나마 지면을 줄이는 결단 아닌 결단을 했다는. 물론 짧은 판결만 찾아다니는 하이에나라는 비판, 무섭지 않다. 되려 필자가 ‘수고가 많다’라는 칭찬을 받을 것 같다는 생각에, 급흥분된다. 마침, 하나 걸렸다. 짧디 짧은. 그러나 오싹한. 하드코어 엽기호러 사건. 노동사건 치고 영 ‘안습’인데. 급흥분 모드, 급격히 진정된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대구의 한 섬유공장. 야근을 하게 된 A씨. 어제는 월급날. 작업이 흥이 난 것일까. 다른 동료들이 모두 집에 간 뒤에도 작업장에는 A씨와 B씨가 남아 있었다. 물론 B씨는 작업 때문에 남아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 때문에 그 날 야근이 A씨 인생의 마지막 노동이 될 줄이야. 새 아침을 맞이하는 건, 이 날 이후 A씨에게는 더 이상 용납되지 않았다. 동료의 지갑을 털기 위해 B씨는 둔기로 A씨의 머리를 내리치고 흉기로 목 부위를 수차례 찔러버렸기 때문이다. 월급날 받은 돈으로 추정되는 지갑 속 128만원. 이것만 남기고 B씨는 A씨의 주검을 작업장에 있던 원단과 비닐로 싸 벽돌을 매단 후 지하 집수조에 던져 버린다. 그의 영혼까지.

2. 이 사건, 우울하다. 20대의 젊은 아들 때문에 A씨의 아버지가 이 소송을 제기했다는 점에서, 한편 패소했다는 점에서. 그 아비의 마음, 이해가 가는가. 억울하고 또 원통하지 않겠나. 조선, 세종은 형사사건 지침서인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을 출판하시며, 가라사대 ‘원(寃)통함이 없게(無)하라’고 했다. 또한 정약용 선생은 ‘흠흠신서(欽欽新書)’라는 형사재판 실무해설집을 펴내시며, 이르노니 재판받는 사람을 연민의 마음으로 불쌍히 여기고 두려워하라 하셨다. 이건 판사의 개인기와 무관한 포지션의 문제다. 판사가 원래 잘 나서 이 양반들께 따박따박 혈세로 월급 꽂아주는 것이 아니다. 살인·폭행·강도·강간·성추행·간통·사기 등등 세상에 추잡스러운 일들은 그들이 처리해야 몫이라는 점에서. 판사라는 직업이 생각만큼 그리 고상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일동 기립’의 예(禮)를 다했고, 판사‘님’자를 붙였던 건, 그들이 내리는 판결이 곧 정의가 되고, 백성들에게는 위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누가 언제 직접 안아달라고 했나. 저 잘난 푸른 기와에 자리를 틀고 있는 삽옹께서 새벽시장 할머니의 배추 몇 포기를 사다주고 목도리 하나 둘러주며 생색내는 위문공연이 아니라, 진정 위로가 될 수 판결을 내려달란 얘기다.

3. 이 사건, 슬프다. 아내 혹은 남편, 가족보다 오랫동안 시간을 보내는 동료의 손에 목숨을 빼앗겼다는 점에서. 하루 24시간 중, 우리들은 그 3등분 중 한 조각 시간의 파이를 직장 동료와 함께 나눈다. 그런 점에서 이 사건, 분노하면서도 슬프기 짝이 없다. 동료라는 사내가 흉기를 들고 노린 게 고작 지갑뿐이었다면, 인권이고 나발이고 진정 용서가 안 되는 거다. 성장률 0% 시대에, 생계형 지갑털이범이라도, 목숨까지 털어가는 건, 내 정신이 허용 못하겠다. 허나 더욱더 슬개골이 무너지듯 나를 좌절케 하는 것은, A씨를 죽인 직장 동료가 카자흐스탄 출신의, 젊디젊은 20대에, 불법체류자인 이주노동자였다는 점이다. 그들이 우리 경제에 피와 살을 뿌려가며 무엇을 했는지 안다. 그래서 그들은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고 있으며,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걸 안다. 그러나 맘몬이 지배하는 이 한국 땅에, 탐욕에 빠지고 물질에 현혹되기도 하는 그들이 있다는 것도 안다. 물론 이들은 소수다. 하지만 잔인하고 엽기적인 사건에 그들을 혐오하며 이주 노동자 모두들 싸잡아 ‘고 홈’을 외치는 야박한 사람들도 늘고 있다는 것도 안다. 과연 128만원에 타인의 영혼을 절단케 하는 용기, 어디서 나온 걸까. 용서는 안 되지만 우리도 우리를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그들이 처음 한국땅 밟으며, 꿈꾼 미래가 무엇일까. 황금마차에 현찰 싣고 고향 돌아가는 거 아닌가. 근데 그건 애초부터 안 된다는 걸 깨닫는 건, 오래 걸리지 않는다. 불법체류에, 도망 다니며, 때로는 맞아가면서. 한국이라는 나라에 실망감과 분노심을, 적개심을 가지면서. 말이 좋아 ‘고 홈’이지, 결국 ‘겟 아웃’.

4. 사건으로 돌아오자. A씨의 아버지가 아들의 죽음에 대해 산재신청을 했다. 유족급여와 장례비를 사장님 대신해 국가가 책임지라고. 이 사건 법원은 직장 동료에 의해 사망한 경우, 그것이 직장 안의 인간관계 또는 직무에 내재하거나 통상 수반하는 위험이 현실화하여 업무와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는 경우에만 업무상 재해가 인정된다고 전제하였다. 하지만 A씨의 아들이 하던 업무가 사회통념상 가해행위를 유발할 수 있지도 않으며, 작업이 종료되어 업무를 수행하고 있지도 않았고, 직장 안의 인과관계 또는 직무에 내재하는 위험이 현실화된 것도 아니라고 ‘간단히’ 판결했다. 판결문이 짧은 것도 불황 탓인가. 왜 이런 결론이 도출되었을까. 법원은 이 사건의 전제를 ‘사적 관계’에 의한 살인사건으로 단정 짓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업무상’ 혐의를 인정치 않는 것이다. 그런데 더 본질적인 문제는 다른데 있다. 판례는 직장 동료의 가해행위로 인해 사상한 경우, 업무상 재해를 인정하는 데에는 인색하다. 피해자나 가해자의 행위가 업무와 관련성이 있는가를 엄격히 따지기 때문. 극단적인 예. 회식 중 동료가 죽통을 날렸는데 그 이유가 업무 얘기로 마찰이 있었다면 업무상 재해, 사적인 이유면 파출소로. 이런 건 엄격한 게 아니라 오버라고 한다.

5. 업무관련성이라는 건, 고무줄처럼 탄력적인 도구개념이다. 그게 탄력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사회법원리가 그렇게 만들어 놨다. 사회법원리, 국가가 ‘니네 뒤는 내가 봐준다’는 거 아닌가. 그렇다면 직장 동료의 가해에 대해서는 업무관련성이라는 걸, 좀 넓게 볼 수도 있지 않나. 이 사건도 그렇다. 야근을 한 직원들이 대부분 퇴근한 이후, 작업장 내를 먼저 둘러봤어야 했다. 근태관리는 출근 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원들의 퇴근 때에도 똑같이 적용되므로, 일과종료 이후 사업장 내 안전·시설관리와 잔류자의 확인 등이 필요했다. 아무리 계획된 범죄라고 할지라도 사업장 내 A씨와 B씨만 남아있었고, A씨가 사망한 이후 집수조안에 사체가 유기될 때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임에도 회사의 관리?감독자 등에 의해 제지되거나 포착되는 일이 없었다면 사용자의 안전배려의무를 다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근로자의 생명·신체·건강을 해치는 일이 없도록 인적·물적 환경을 정비하는 필요한 조치는 사용자의 의무이기 때문이다(대판 2000.5.16.99다47129). 더구나 동료에 의한 사상사고를 개인의 ‘재수없는 일’로 치부되도록 노동법이 팔짱끼는 꼬라지는 못 봐주겠다, 이거다. 나아가 동료에 의한 사상사고가 업무상 재해일 경우, 근로복지공단이 가해 근로자에 대해 구상권을 행사하는 건 안 된다는 것이 대법원의 입장인데(대판 2004.12.24.2003다33691). 가해 근로자를 보호하는 것도 사회법원리에 부합하는 것이라면 사업장 내에서 동료에게 살해당한 경우도 당연히 사회법원리에 의해 보호되어야 하지 않나.

마지막으로. 노동법에 위로받을 수 없다면, 헌법이 위로해 줄 방법을 찾아보자. ‘범죄피해자구제제도’. 이 제도는 범죄행위로 사망하거나 심하게 다친 피해자가 범인을 알지 못하거나 범인이 피해에 대해 보상을 해줄 돈이 없어 범죄피해의 전부 또는 일부를 보상받지 못하는 경우, 국가가 피해자나 유족에게 구조금을 지급하는 제도이다. 올해에는 범죄피해자구제법 시행령이 개정됐다. 유족구조금이 현행 1천만원에서 최고 3천만원으로. 피해자 유족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겠다. A씨의 아버지께는 대구지방검찰청 범죄피해자구조심의회에 찾아가 보실 것을 권한다.


<2009년 5월19일>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