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계가 비정규직 사용기간 제한을 폐지하라고 촉구하고 나섰다. 대기업 총수들이 가입한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총대’를 멨다. 전경련은 지난 25일 사용기간을 현행 2년에서 4년으로 늘리거나 법 시행을 유예하는 방식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사용기간 제한을 현행 2년에서 4년으로 늘리는 비정규직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한 정부보다 한발 더 나간 모양새다. 지난 12일 야당 주최 합동토론회에서 “사용기간 제한을 4년 연장하면 급한 불은 끌 수 있다”며 정부를 거들었던 한국경영자총협회의 입장을 무색케 하는 것이다.

전경련의 강경한 입장은 어느 정도 예상된 것이었다. 그간 비정규직의 사용기간 제한을 폐지하라고 주장해 온 경영계의 입장과 연장선상에 있다. 비정규직법의 국회 처리가 안개 속에 빠지자 전경련이 ‘구원투수’를 자처한 것처럼 보인다. 6월 임시국회를 겨냥해 재계에 유리한 방향으로 법 개정을 이뤄 내기 위해 국회를 압박하고 나선 것이다. 하지만 전경련의 입장발표는 시점도, 내용도 모두 잘못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로 온 나라가 큰 슬픔에 빠져 있다. 노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분향 행렬이 전국 곳곳에서 큰 물결을 이루고 있다. 추모 분위기는 정치권이나 국회도 예외는 아니다. 국회는 29일로 예정된 61주년 개원 기념식을 취소했고, 6월 임시국회 의사일정 협의도 미뤘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계와 경영계, 정부의 입장이 첨예하게 맞서는 비정규직법 개정안을 거론하는 것은 국민적 추모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굳이 ‘국상’ 중에 분열을 조장하는 입장 발표를 할 게 뭐란 말인가. 국상이 끝나고, 국회가 개원하면 그때 입장을 내놓아도 늦지 않다.

비정규직법 개정은 한 방향으로 몰아가기 힘든 형국이다. 정부가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긴 했지만, 환경노동위원회에서조차 논의가 안 됐다. 정부안에 대해 여당인 한나라당 내에서도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매일노동뉴스>가 창립 17주년을 기념해 국회 환노위원들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다.<본지 5월25일자 8면 참조>
여당 의원 가운데 정부안에 대해 찬성하는 의원은 소수에 불과했다. 대다수가 정부안과 다른 ‘업종·규모별·숙련도별 차등유예안’에 찬성하고 있었다. 여당조차 의견 통일이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야당은 정부·여당과 다른 의견이다. 최근 합동토론회에서 야당들은 정부안에 반대하며 다양한 대안을 제시했다. 민주당은 비정규직법의 문제점을 보완하되 정규직 전환 지원예산 확보를 강조했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비정규직 사용사유를 제한하고, 동일노동가치 동일임금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창조한국당은 비정규직의 반복사용을 제한하기 위해 6개월에서 1년의 휴지기를 두는 방안을 내놓았다.
이렇듯 비정규직법 개정의 1차 관문인 환노위에서도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흐름은 비정규직법 개정을 한 방향으로 몰아갈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전경련의 입장은 국회의 이런 흐름과도 거리가 너무 멀다.

때문에 비정규직법 처리방식은 다른 법안처럼 일반적인 심의절차를 밟아서는 곤란하다. 촉박한 국회 의사일정과 여야 간 다양한 의견, 노동계와 경영계의 입장차를 고려해야 한다. 비정규직의 남용을 제한하고, 차별을 해소한다는 비정규직법 제·개정 취지도 잊지 말아야 한다. 만약, 여당이 정부안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인다면 역풍에 직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노 전 대통령 서거로 들끊는 민심에 기름을 끼얹을 뿐이다. 국회에서 여야가 충분한 토론을 하는 것밖에는 해법이 없다.
 
 
<2009년 5월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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