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하반기 최우선 국정과제로 노동 문제 해결을 공언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7일 열린 비상경제대책회의에서 이를 공식화했다. “노동유연성 문제는 올해 말까지 최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최대 국정과제다. 과거 외환위기 때 노동유연성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점이 크게 아쉽다.”

노동과제로는 국회에 제출된 비정규직법의 처리가 우선적으로 거론된다. 정부는 이미 기간-파견제의 사용기간 연장과 파견대상 업종 확대를 제안했다. 또 ‘복수노조 허용-전임자임금 지급금지’ 관련법안도 연내에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경영계가 지속적으로 요구해 온 ‘정리해고 요건 완화’를 포함한 근로기준법 개정작업도 포함됐다.

이 대통령과 정부는 노동유연성을 높여야만 국가 경쟁력 향상과 일자리 창출을 위한 여건을 조성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듯하다. 노동유연성 확대가 곧 노동시장과 노사관계의 ‘선진화’를 의미한다는 것으로 읽힌다. '직업안정성 약화'와 '차별 확대'라는 부작용은 고려대상이 아닌 것 같다.

이 대통령과 정부의 판단은 김대중 정부 이후 추진돼 온 노동개혁과 그 맥락이 다르지 않다. 노동시장이 경직돼 있고, 이것이 일자리 창출에 걸림돌인 만큼 유연화시켜야 한다는 이론에 근거한다. 이 이론의 모델인 미국과 영국의 경우 유연성이 높아 실업률이 낮고, 경직성이 강한 유럽은 실업률이 높다고 분석돼 왔다. 이른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 근거한 노동유연화론’이다.

그런데 이 모델이 반드시 옳다고 할 수는 없다. 고용보호제도나 강화된 근로기준법제는 해고율을 낮추기도 하지만 사업주가 신규고용을 꺼리게 하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고용보호법제는 작업장 참여와 결합될 경우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 또 단체협약 적용률이 높으면 임금인상 압력이 커져 실업률을 높일 수 있다. 그러나 단체교섭이 조율될 경우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나기도 한다. 때문에 경직된 노동제도가 반드시 실업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영미식 노동유연화 모델을 좇지 않고 실업을 줄이는 데 성공한 나라가 적지 않다. 유럽의 아일랜드·네덜란드·덴마크는 유연성과 안정성을 조화시켜 실업률을 최소화시켰다. 실업률만 보면 미국에 뒤떨어지지 않는다.

최근 세계 경제위기로 인해 영미식 노동유연화 모델에 대한 문제제기가 잇따르고 있다. 노동유연성이 높은 미국의 최근 실업률은 8.5%에 달한다.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바탕으로 전 세계에 확산된 노동유연화 모델의 성공신화가 깨진 것이다. 경직적인 노동시장과 노사관계 제도가 시장에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경직적인 제도가 오히려 경제위기 탈출의 해법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최근 한국노총과 국제노동협력원이 주최한 국제세미나에 참석한 롤란드 슈나이더 경제협력개발기구 노조자문회의(OECD TUAC) 선임정책자문위원의 발언은 의미심장하다.
“노동유연성이 가장 높은 국가가 경제위기 국면에서 가장 어려움을 겪고 있다. 경제위기시에는 두 가지 차단조치가 필요하다. 첫째, 임금·가격·고용계약이 경직적이어야 한다. 충격을 완화시켜 주기 때문이다. 둘째, 사회보장제도를 강화해야 한다. 이 같은 조치가 시행될 경우 실업자도 소비를 지속할 수 있어 위기 극복에 도움이 된다.”

노동유연성이 높아 경제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미국이 이러한 추세에 동참하고 있다. 부시 정부 시절 민주당이 발의했거나, 오바마 대통령이 의원 시절에 지지한 근로조건 보호 관련법안이 의회에 계류돼 있다. 임금·고용관계에서 차별을 금지하는 법안도 의회에 제출된 상태다. 특히 단체교섭과 단체협약을 규율해 노조 조직률 상승을 억제해 온 연방 노동관계법 개정이 추진되고 있다.

유럽의 경우 유사한 정책으로 경제위기 극복에 나서고 있다. 해고를 최대한 자제하되, 노동시간 단축과 일자리 나누기를 추진하고 있다. 최근 세계 경제위기가 잠시 주춤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실물경제와 고용은 여전히 얼어붙어 있다. 소비가 위축돼 경기가 반등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세계 각국이 사회보장제도 강화와 노동의 가처분소득을 늘려 소비와 구매력을 높이려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노동유연성을 높이는 조치는 단기적인 일자리 창출이나 경기부양에 일조할 수 있어도 위기를 탈출하는 근본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 더 이상 실패한 신자유주의 노동유연화 모델을 따를 필요가 없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실패한 모델을 좇는 ‘역발상’이 아니라 노동유연화 모델의 함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노동시장과 노사관계에서 한국적 모델을 찾으려는 ‘담대한 접근’이 필요한 시점이다.
 
 
<매일노동뉴스 2009년5월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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