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쁘다. 정원 미달 상태인데도 직원이 꽤 줄었다. 사람이 워낙 부족하니 무리한 요구도 강요받고 말투도 팍팍해진다. 다들 엄청 지쳐 있다. 사람 죽는 일이 안 생기기만을 기도한다.” (과로사로 숨진 한 일본 간호사의 일기)

일본 도쿄 제생회중앙병원에서 근무하던 다카하시 아이(당시 24세)씨. 지난 2006년 4월 이 병원에 입사해 수술실 간호사로 일했던 그는 이듬해 5월 환자이송용 침대 위에서 의식불명 상태로 발견됐다. 같은날 저녁 그는 치사성부정맥으로 숨졌다.
유족들은 “사망 직전 월 100시간 정도 잔업을 했다”며 산재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했지만 병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해 10월 일본의 미타 노동기준감독서는 과로사를 인정했다. 노동기준감독서는 그의 잔업시간이 과로사 인정기준인 월 80시간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불규칙적인 근무 등으로 인한 과로로 판단해 업무상재해로 인정했다.

한일 간호사 노동조건 비교 토론회 열려

국제간호사의 날을 맞은 12일, 한국과 일본 간호사의 노동조건을 비교하는 토론회가 열렸다. 보건의료노조와 홍희덕 민주노동당 의원이 공동으로 주최한 이날 토론회에는 일본자치단체노조(JICHIRO)와 일본 보건의료복지노조협의회(JHCWU) 관계자들이 발제에 나섰다. JICHIRO는 지방자치단체와 공기업 등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대변하는 노조로 2천700여 단위노조에 조합원 90만여명이 가입돼 있다. JHCWU에는 8천900명의 조합원이 활동하고 있다.

지난해 일본에서는 병원에서 일하다 숨진 두 명의 간호사가 산재로 인정받아 화제가 됐다. 다카하시 아이씨가 숨지기에 앞선 2001년 2월, 무라카미 유코(당시 25세)씨가 간호사가 된 지 4년 만에 지주막하 출혈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오사카 지방재판소는 공무재해라는 판결을 내렸지만 후생노동성은 불복했다. 항소심에서 오사카 고등재판소는 정부측 청구를 기각했고, 정부가 상고를 단념하면서 공무재해로 인정받았다.

마츠이 류노스케 JICHIRO 건강복지국 국장은 '일본 간호사 노동과 건강에 관한 긴급 실태조사결과’를 통해 “업무나 직업생활에 대해 불안과 고민·스트레스를 느끼는 사람이 75%로 대단히 많다”고 밝혔다. 실태조사는 일본의 JICHIRO와 헬스케어노협이 간호사 9천732명의 답변을 분석한 것이다.

일본 간호사 “잠 좀 자고 싶다”

일본 간호사들은 현재 필요한 시간 1순위로 ‘수면시간’을 꼽았다. 마츠이 국장은 “무엇을 가장 하고 싶냐는 질문에 자고 싶다고 대답하는 직장이 얼마나 있겠냐”며 “간호사 자신의 생명을 줄이면서 환자의 생명을 지키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수면시간 다음으로는 △식사시간 △육아시간 △친구·애인과의 교제시간 △취미시간 등을 꼽았다. 최근 일본에서는 하루 16시간을 근무하는 2교대제가 확산되고 있는 추세다.

일본 간호사들은 업무를 계속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로 ‘업무가 신체적·정신적으로 힘들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간호직장 개선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인원 증가’라는 답변이 30%로 가장 많았다.
 


노동강도 심화시키는 인력부족

간호사 인력부족은 비단 일본만의 문제는 아니다. 보건의료노조가 3~4월 조합원을 대상으로 ‘보건의료노동자 노동조건 실태조사’를 실시한 결과, 현재 부서 인력이 적정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비중이 66.5%에 달했다. 업무 때문에 육체적·정신적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노동자는 73.7%였고, 절반 정도는 인력이 부족해 휴가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주호 노조 전략기획단장은 “최신 수술로봇을 포함해 세계 의료장비의 절반이 아시아에 있고, 아시아 의료장비의 절반이 한국에 있다”며 “그럼에도 보건의료인력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꼴찌수준이라는 것은 정부 인력정책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보건의료분야 종사자 평균 비율은 2004년 기준으로 OECD의 경우 전체 고용인구 중 6.12%다. 반면에 한국은 3.1%에 불과했다.
간호사 출신이기도 한 마츠이 국장은 “일본에서는 여전히 초등학생들이 커서 되고 싶은 직업 상위 5위에 간호사가 꼭 들어간다”며 “백의의 천사를 꿈꾸는 아이들에게 노동조건이 개선된 직장을 넘겨주고 싶다”고 말했다. 

 

 

죽을 만큼 아파도 출근해라?
“화장실 갈 시간이 없어요. 목 말라도 물 안 마셔요. 생리할 때는 죽을 맛이죠.”
“임신 중절 수술하고 바로 나와 일한 적도 있어요. 죽을 만큼 아파도 일단 출근은 하라는 거죠.”
“신규간호사랑 둘만 야간근무를 할 때는 ‘환자가 죽지만 않으면 된다’는 각오로 근무해요.”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병원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겐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한 사람이라도 결근하면 바로 환자에 대한 서비스 질이 떨어지고 동료들의 노동강도 강화로 이어지기 때문에 휴가를 제대로 사용하기 힘들다.
보건의료노조는 12일 공개한 ‘보건의료노동자 노동조건 실태조사’ 보고서에서 인력부족으로 인해 나타나는 현장의 사례들을 소개했다. 대부분 열악한 노동조건이 잦은 이직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조사됐다. 기존인력이 신규인력 트레이닝을 겸하면서 노동강도가 세져 직무스트레스가 높아지고, 결국 다시 이직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태조사 결과 간호사들의 주당 노동시간은 46.7시간으로, 40.7%는 근골격계질환에 시달리고 있었다. 노조 관계자는 “한국의 병원에서는 4·6 투쟁을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간호사 한 명당 4명의 환자를 보고, 밤(나이트) 근무횟수를 한 달에 6개 이하로 낮추자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60년대 ‘2·8투쟁’을 전개한 바 있다. 밤 근무는 최소한 두 명의 노동자가 하고, 밤 근무횟수를 한 달에 8개 이하로 줄이자는 것이다.
노조는 올해 인력확충 관련 대정부 요구사항으로 △좋은 일자리 창출을 위한 사회기구 구성 △밤 근무 등 교대제 개선, 적정임금 보장, 육아시설 확대 △야간근무수당 인상 △보건의료인력개발법 제정 추진 △간호관리료 위반 처벌조항 신설 등을 제시했다. 조현미 기자


<2009년 5월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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