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23년째 화물차를 운전하고 있는 김영철(43)씨는 10일 난생처음 건강검진을 받았다. 이날은 운수노조와 화물연대가 공동으로 비용을 부담해 화물노동자에게 무료 건강검진을 실시한 첫날이다. 대형화물차들이 맹렬히 질주하는 인천 연안부두 앞 백탑사거리는 이날 특수 의료장비가 들어선 ‘길거리 병원’으로 변신했다. 노조와 건강검진기관인 원진녹색병원이 함께 텐트를 치고 이동 특수검진 버스를 세워 놓자 그럴싸한 건강검진센터로 바뀐 것이다.

“특별히 아픈 데도 없고, 하루 일당을 포기하면서 시간을 내는 게 아까워 그동안 병원 문턱 한번 못 밟아 봤다”는 김씨는 꽤 긴장한 표정이다. 그는 의사의 지시에 따라 문진표를 작성했다. 평소 담배를 얼마나 피는가부터 복용 중인 약이 있는가에 이르기까지 꼼꼼하게 적었다. 건강상태에 대한 조사뿐만 아니라 근로실태에 대한 조사도 함께 이뤄졌다. 차량소유 형태와 평균 일일 근무시간, 야간 운행시간 등을 기입하는 데만 30분이 넘게 걸렸다.
“오늘 새벽 3시에 집에서 나왔어요. 건강검진을 받더라도 일은 해야 되니까요. 부두 앞 차고지에서 배차를 받고 옮겨야 할 화물을 차에 실어 놓고 왔어요. 시간이 없어 아침을 걸렀더니 배가 무진장 고프네요.”

“나도 한번 받아보자! 건강검진”

화물노동자 길거리 건강검진은 화물노동자 1천명을 대상으로 이날부터 20일까지 열흘간 전국 주요 고속도로 휴게소와 화물공영주차장에서 진행된다. 일반적으로 고된 노동과 장시간 운전에 시달리는 화물노동자들은 건강상태가 양호할 것이라고 기대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화물노동자들의 건강상태가 나쁘다’고 말하기도 힘들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화물노동자 건강상태를 알 수 있는 공식적인 조사나 연구가 이뤄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조성애 노조 노동안전보건국장은 “노동자라면 누구나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실시하는 건강검진을 받아야 하지만 화물노동자는 하루치나 이틀치에 해당하는 일당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에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화물노동자들이 있는 길거리에서 건강검진을 실시하게 된 것이다. 이번 건강검진은 성인병을 위주로 한 일반건강검진 외에도 뇌심혈관계질환 위험도 평가도 함께 진행된다.

김달식 화물연대 본부장은 “지난 2월에도 5명의 조합원이 사망했는데 그 중 3명이 돌연사였고 나머지 2명은 사고사였다”며 “건강하게 생계를 책임져 오던 40대 가장이 하루아침에 뇌졸중이나 심근경색으로 숨지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고 말했다.
김 본부장은 “교통사고가 발생하기 어려운 지역에서 의외의 대형사고가 터지는 사례들이 있는데, 조사를 해 보면 사고 직전에 화물운전자가 브레이크를 밟지 않은 경우가 많다”며 “운전 중 뇌심혈관계질환이 갑작스럽게 악화됐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의학계는 업무상과로와 운전 중 스트레스, 장시간 노동을 화물노동자들이 뇌심혈관계질환을 앓는 원인으로 꼽고 있다. 이번 건강검진에서는 지금까지 밝혀진 적이 없는 화물노동자 과로사 위험요인 파악도 함께 이뤄질 전망이다.

“소변검사는 적당히 알아서 해 주세요”

조현낙(49)씨도 이날 건강검진을 받았다. 문진표 작성 후 시력측정이나 혈액채취를 마치자 간호사가 소변검사용 도구를 줬다. 조씨는 난감했다. 근처에 화장실이 없기 때문이다. 간호사 역시 미안한 듯 "소변검사는 적당히 알아서 해결해 주세요"라고 부탁했다.
인천시에 등록된 화물자동차는 8천대가량. 인천은 부산시 다음으로 큰 항만을 끼고 있어 실제로는 드나드는 화물차가 부산보다 많다. 하지만 화물노동자를 위한 편의시설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화장실은 물론, 깨끗한 식수나 오물과 땀을 씻을 수 있는 샤워시설 등은 화물노동자에게 ‘딴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최소한의 편의시설도 없는 화물노동자의 작업환경은 열악한 사업장 위생과 보건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한편 건설노동자의 경우 오랜 투쟁의 결실로 지난해부터 이른바 ‘화장실법’이 시행 중이다. 공사예정금액이 1억원 이상인 건설현장에는 식당·화장실·탈의실을 설치하거나, 최소한 이용이 가능하도록 하는 내용의 ‘건설근로자의 고용개선 등에 관한 법률’이 그것이다. 화물연대는 "앞으로 고속도로 휴게소에 화물운전자보건센터 설치 등을 촉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객관적 실태 바탕으로 화물노동자 건강권 찾기”

노조는 건강검진 장소에서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기자회견에서 김종인 노조 위원장은 “화물노동자는 특수고용직이라는 이유로 사업주로 분류돼 기본적인 건강권조차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며 “이번 건강검진을 통해 얻은 객관적 근거자료를 가지고 화물노동자의 산재보험 당연적용을 비롯한 대책을 정부에 요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노조는 '산재노동자 추모의 날'인 다음달 28일 화물노동자 건강실태 분석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누구나 건강할 권리가 있다’는 평범한 진리가 화물노동자에게도 적용될 날을 기대해 본다.
 
 
<2009년 3월11일>
 
 

화물노동자 산재, 전 산업 평균의 10배
산재적용 대상에서 제외돼 대부분 스스로 해결
화물운송업 노동자의 산업재해는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 원진노동환경연구소가 지난 2006년 덤프·레미콘·화물에 종사하는 운수업 특수고용노동자 48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운반물 상·하차와 같은 운행업무 외에 작업에서의 재해율(요양 4일 이상)은 8%로 우리나라 평균 재해율(산재보상자료)인 0.8% 비해 10배 이상 높았다.
화물노동자 가운데 운송회사 소속 노동자들만 가입돼 있는 산재보상통계를 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97년부터 2004년까지 전 산업 재해자(1천명당)는 6.7~8.5명인데 반해 화물노동자의 경우 16.5~31.5명으로 서너 배 높았다. 심각한 것은 다른 업종은 매년 재해율이 비슷하지만 화물운수업은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추세를 보인다는 점이다.
윤간우 원진녹색병원 산업의학 과장은 “운수업 특수고용노동자의 높은 재해율과 사망률에도 적절한 보호대책이 없다”며 “대부분 사고를 당해도 개인 수준에서 처리되고 있어 어려운 생활고를 가중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화물노동자들은 특수고용직이라는 이유로 산업재해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지입차주제가 일반화되면서 화물노동자 대다수가 산재보험의 사각지대에 처했기 때문이다. 97년에는 화물노동자 15만명 가운데 10만4천여명이 산재보험에 가입돼 혜택을 누렸다. 그런데 2004년에 이르러 화물노동자는 35만명으로 크게 늘었지만 산재보험 가입자는 1만7천명으로 오히려 10분의 1로 줄어들었다. 화물노동자의 5%만이 산재보험의 적용을 받고 있는 셈이다. 김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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