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현장에서 일하다 보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는 일이 많다. 몸에 이상신호가 왔을 때 더욱 그렇다. ‘내일이면 괜찮아 지겠지’ 라고 여기기 일쑤다. 그런데 가벼운 증상이 큰 병이 될 수 있다. 유해물질을 다루는 작업현장에서 일하는 이들에겐 더욱 그렇다. 작업장에서 다루는 물질에 대한 기초상식이 없을 때 부지불식간에 병을 키울 수 있다. 재임음향(가칭)에 다녔던 김아무개(당시 38세)씨가 그러한 예다. 김씨는 옛 일을 떠올릴 때마다 눈물을 글썽거렸다.

경기도 동두천에 소재한 재임음향은 텔레비전과 자동차 오디오 스피커를 제조하는 회사다. 지난 1986년 입사한 김씨는 스피커 부품을 조립하고, 부품 틈새를 메우는 작업을 하는 데 이럴 때 사용한 것이 ‘본드’다. 현장에 본드 냄새가 진동하는데 환기나 배기장치조차 갖춰져 있지 않았다. 호흡용 보호구를 착용하고 작업하는 노동자도 없었다. 이 회사는 300명의 생산직 노동자가 근무하는 제법 큰 회사였는데도 말이다. 노동자들은 본드 건조시간을 줄이기 위해 겨울에는 창문조차 열지 못했다.

본드작업, 화 불렀다

코를 찌르는 본드 냄새를 매일 맡았다면 몸에 이상신호가 오는 것은 당연하다. 회사를 다닌 지 11년째 되던 해(97년) 특수건강진단을 받았던 김씨는 ‘혈소판 감소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정밀검사를 권유했지만 김씨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다 이듬해부터 두통과 어지럼증이 계속됐다. 2001년부터는 매달 1~2차례씩 어지럼증이 나타나더니 두통과 구토증상도 나타났다. 결국 대학병원을 찾은 김씨는 골수검사를 통해 백혈병(재생불량성 빈혈) 진단을 받았다. 김씨는 이후 다시 회사를 다닐 수 없었다.

달콤·살벌한 벤젠

김씨의 백혈병 원인은 본드에 함유된 ‘벤젠’ 탓이었다. 투명한 액체인 벤젠은 달콤한 냄새가 나는 휘발성유기용제로 산업현장에서는 ‘벤졸’이라 불린다. 무심코 벤젠을 맡으면 두통·어지러움·의식상실 등이 나타난다. 고농도로 노출되면 구역질·마비·혼수상태가 올 수 있다. 벤젠이 피부에 닿으면 피부 건조와 지방 감소로 인한 홍반·물집·피부염 등이 생긴다. 눈에 닿을 경우 화상을 입을 수도 있다. 만성적으로 노출되면 피를 만드는 조혈기계에 영향을 줘 백혈병을 일으킨다. 김씨는 1일 기준치의 5분의 1정도 노출됐지만 환기장치가 없는 공간에서 작업한 것이 치명적이었다.

환기시설, 정기 건강검진 필수

벤젠 사용 작업장에서 작업환경을 측정한 결과, 노출기준이 초과되면 사업주는 처벌 받는다. 김씨의 경우 노출기준이 초과되지 않았다. 그러나 16년 동안 본드 작업으로 벤젠 노출이 누적돼 큰 병을 얻은 것이다. 노출기준이 초과되지 않았더라도 사업주는 환기시설 설치, 안전마스크 제공 등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만 직업병 환자가 발생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유해물질인 벤젠에 대한 기초 정보를 작업자에게 알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또 6개월에 한 번 작업환경을 측정해 벤젠 노출정도를 확인하도록 하자. 특히 벤젠을 취급하는 노동자는 정기적으로 간·신장·간염·혈액 검사를 꼭 실시해야 한다.
 

 
<매일노동뉴스 3월4일>
 

벤젠과 혈소판 감소증
벤젠은 톨루엔·크실렌과 함께 ‘시너’의 주요 성분이다. 암을 일으키는 물질이다. 벤젠은 주로 의류·인쇄·신발·석유화학·의약품 제조업·자동차 수리업 등에서 이용된다. 염료·합성세제·유기안료·의약·농약·향료·조미료·사진관련 약품·폭약·방충제·절연유·페인트 제거제 등의 원료로 사용된다. 1일 8시간 작업 기준으로 노출치가 '1ppm'을 초과하면 안 된다.
혈소판 감소증은 선천적으로는 유전에 의하거나, 후천적으로는 화학물질(벤젠 등)에 노출됐을 때 나타난다. 혈소판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지혈작용’이다. 혈소판감소증이 일어나면 출혈증세가 나타난다. 혈관·피부·위에서 출혈이 일어난다. 입 속에서도 피가 나고, 피부를 눌렀을 때 반점이 생기기도 한다. 출혈이 장기간 지속되면 빈혈이 생기며, 백혈병의 원인이 된다. 조현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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