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위와 폭설, 그리고 '계약직의 설움' 속에 외로운 투쟁 37일째

18일 오후 4시 분당 한국통신 본사 앞에서 한국통신 계약직노조 조합원들이 대절한 버스에 하나 둘 올라 대전으로 부산으로 내려갔다. 4차 상경투쟁을 마무리하고 더 많은 조합원들을 조직해 5차 상경투쟁에 임하기 위해 귀향하는 것이다. 다른 지방 조합원들이 떠나고 대구지역본부 조합원들이 마지막으로 남아 있다.

"내려가기 아쉬운지 떠나질 않네요." 조합원들이 떠난 이후에도 서울에 남아 본사 앞 천막농성장을 지킬 예정인 이춘하 노조 대전충남지방본부장이 한마디한다. "이번 4차 투쟁은 주요한 성과가 많았습니다. 이상철 사장을 면담자리로 끌어냈고 한강대교 철제아치 위에서의 고공농성을 통해 사회적 여론화도 됐죠. 그리고 무엇보다 이번 상경투쟁으로 조합원들의 의식 수준이 3차 상경투쟁 때와는 판이하게 고취돼 있습니다"

"농성장에서 한 생일파티"

"우리는 계약직입니다. 한국통신이 우리들 6,000명을 해고시키고도 정부방침이라 어쩔 수 없답니다. 이틀 전에는 조합원 한 명이 추위에 반신마비가 돼 병원으로 실려갔습니다. 한국통신이 사람을 죽이고 있습니다."

지난 16일 한강대교의 철제아치 위에서 선 한창원 대전충남본부 조합원은 자신의 발 밑으로 지나는 차들과 꽁꽁 얼어붙은 한강을 향해 절규한다.

계약직이라는 이유로 한달 평균 85만원의 저임금과 해마다 재계약을 해야하는 고용불안에 시달려오다 급기야 계약해지된 한을 토해낸다.

그날 저녁 '비정규직관련 노동법개정과 한통계약직노조 총파업투쟁 승리를 위한 하루주점'이 열린 경희대 복지회관 식당 곳곳에서 계약직 조합원들은 술잔을 부딪히며 계약직의 설움을 토해낸다.

"한국통신에 내 청춘 다 바쳤다. 내 청춘 돌려놔라."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구호에도 한이 담겨 있다. 한 켠에서는 조촐한 생일파티도 진행됐다. 대구지방본부 소속으로 안동전화국에서 신규가설접수를 받는 100번 안내원인 이수미 조합원이 이날 27번째 생일을 맞았다. "아침에 엄마에게 전화했는데 엄마가 우셨어요. 이렇게 동지들이 생일상 차려준 거 아시면 엄마도 좋아할거예요." 그들에게 동지라는 이름의 조합원들은 계약직의 설움을 잊게 해준다.

"우리도 한국통신 노동자인데…"

한국통신 계약직의 고용불안은 작년 6월말 구조조정바람이 불어닥치면서 더욱 심화됐다. 2년차 이상에 대한 계약해지가 시작되고 다른 계약직의 계약기간도 짧아져 작년 10월부터는 1개월의 초단기 계약으로 바뀌었다. 도급전환을 위한 수순밟기라는 것은 얼마 지나지않아 밝혀졌다. 우여곡절 속에서 작년 10월 13일 설립필증을 교부받아 합법화된 노조는 도급화를 막기 위해 한국통신과 교섭에 들어갔다.

그러나 한국통신은 정부 구조조정 계획의 일환이라 어쩔 수 없다는 입장만 되풀이했다. 노조는 파업을 선택했다. 그러나 12월 13일 노조가 파업에 돌입한 이후 3차에 걸친 상경투쟁 속에서도 한국통신은 도급전환 방침을 밀어붙였다.

게다가 한국통신노조가 파업을 통해 사측과 맺은 노사합의서에 계약직의 도급전환과 관련한 내용은 언급이 없었다. 그러나 조합원들에게 더 가슴아픈 기억은 계약직와 정규직의 연대집회 취소였다.

"사실 한국통신노조의 싸움으로 우리의 고용안정을 보장받으리라고는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문제는 우리가 싸워 해결해야죠. 그러나 명동성당까지 찾아왔던 계약직노조조합원들을 조합원 정서에 맞지 않는다고 돌려보낼 때에는 '이제 같이 일하던 동료들한테도 계약직이라고 홀대받는구나'하는 생각에 화가 나더라구요." 홍준표 위원장은 아쉬움을 감추지 않았다.

그래도 이들은 한국통신의 노동자이며 언젠가는 정규직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그래서 한국통신은 '계약해지'라고 하지만 이들은 '해고'라고 한다. 또 지난 일일주점에 찾아온 정규직 동료들과 함께 어깨 걸고 한통동지가를 부르면서 모든 정규직 동료들과 하나가 될 기대도 버리지 않고 있다.

'소귀에 경읽기' 된 노조 요구안

지난 2일 4차 상경투쟁을 위해 서울로 상경한 노조는 결연한 의지를 품었다. "회사의 '시간끌기'에 더 이상 끌려다닐 수는 없습니다. 이번에는 얼어죽더라도 무기한 노상농성을 진행하면서 회사와 결판을 지을 겁니다" 그렇게 분당의 한국통신 본사 앞에서 한통계약직노조의 노상농성이 시작됐다. 때마침 '몇 십년만에 추위'라는 기록을 매일 갈아치우는 폭설과 강추위가 시작됐다.

그러나 'IMT-2000 사업자 선정'과 '위성방송사업권 획득'을 자축하는 플랭카드를 목에 걸고 농성 중인 계약직 조합원들을 위압적으로 내려다보는 본사건물처럼 사측의 '시간끌기'는 계속됐다.

3일 부사장과의 면담에서 부사장은 "재계약에 대해 검토해 볼 수 있다"고 했는데 실무협상에서는 "지시받은 바 없다"는 말로 일관했다. 정부의 구조조정 계획이니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와 "조합원들에 대한 1년 재개약"이라는 노조의 최종요구는 '소귀에 경읽기'였다.

조합원들은 밤이면 추위를 피해 대학 체육관 등을 전전했고 낮에는 분당본사 앞에서 투쟁으로 이어갔다. 농성을 하기 위해 삽과 곡갱이로 얼음을 깨야 했다. 기어이 지난 15일에는 대전충남본부 이동구 조합원이 동상에 의해 죄측뇌가 응고돼 우반신이 마비됐다.

5차 상경투쟁을 위해

"이번 귀향은 단순히 설을 지내러 가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투쟁을 망설이는 조합원들을 설득해 더욱 강고한 5차 상경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내려가는 것입니다."

1월말이면 그들은 다시 분당한국통신 본사 앞에 모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투쟁은 이땅에 비정규직이 사라질 그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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