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환경노동위원회는 가장 인기가 없는 상임위원회 중 하나다. 민주노동당이나 노동계 출신 의원을 제외한 초선의원들이 떠밀리듯 가는 곳이다.

하지만 떠밀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환노위행을 희망한 당선자가 있었다. 왜 환노위를 희망했는지, 무엇을 하려는지 궁금증을 자아냈다. 그래서 노동계 출신이 아니어도 당선자 연쇄인터뷰를 요청했다. 김상희(54) 통합민주당 국회의원. 지난달 29일 마지막 당선자 신분에서 청와대 인근 한 카페에서 인터뷰를 했다.

김 의원은 여성민우회 상임대표와 여성환경연대 공동대표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18대 국회의원과 민주당 최고위원직을 맡고 있다. 

민주당내 시민사회대표 홀로 살아남아

“이해할 수가 없어요. 도대체 쇠고기 고시를 왜 그렇게 서두르는지. 국민들이 그렇게 반대하는 데 고시를 빨리 하면 뭐가 좋다는 거죠?”

답답하다는 듯이 쇠고기 문제부터 꺼내는 김상희 의원. 그는 이날 쇠고기 고시철회와 재협상을 요청하며 청와대를 방문하고 난 뒤였다. 하지만 정부는 기어코 장관고시를 발표한 상태였다.

- 당선 뒤 더 바쁜 듯 보였다. 뒤늦은 당선 소감은.

“잘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책임감이 무겁게 느껴졌다. 지난해 대통합민주신당 창당과정에서 함께 했던 시민사회 동지들이 거의 원내 진출을 하지 못해 그 몫까지 대신 해야 한다는 상당한 책임감이 든다.”

지난 해 여름 대통합민주신당이 태동할 때 여성민우회 공동대표였던 김상희 의원은 시민사회세력 대표로 당 지도부에 동참했다. 당시 함께 뛰어든 정대화 교수, 양길승 원장 등이 모두 창당멤버이나 이번에 비례대표 당선순위에 들지 못했다. 김 의원은 “모두 새로운 정치를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할 분들인데 아쉽다”고 말을 이었다. 

- 약사 출신으로 여성운동에 뛰어들게 된 배경은.
 
“대학 시절 학생운동을 하다가 76년 졸업 뒤 (동지들과) 민중적 관점을 가지고 여성운동을 하기로 했다. 당시엔 진보적 여성단체가 없어서 여성유권자연맹에 소위 위장취업을 해서 청년부를 만들어 진보적 여성운동을 주도했다. 당시 지은희 전 장관, 이경숙 전 의원 등과 함께 했다. 하지만 80년 5월 연맹이 전두환 정권을 지지하자 그곳을 나온 뒤 소그룹 활동을 하다가 83년 여성평우회 설립, 87년 이를 확대개편해 대중적 여성운동을 지향하며 여성민우회를 창립했다.” 

“여성의 눈으로 여성과 환경운동 해와”

- ‘여성’과 ‘노동’에 대한 인연을 소개해 달라.

“여성노동자들이 노동자라는 정체성으론 운동을 지속·발전시킬 수 없다. 전체 운동에서 여성노동자가 주도하긴 쉽지 않다. 유권자연맹 시절 여성노동자 교육을 담당했고, 여성민우회에선 생산직여성분과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짧은 기간 동안 구로공단에 위장취업해서 시다생활을 하기도 했다. 여성민우회는 당시 욕심이 많아서 생산직·사무직·빈민·청년·주부분과 등을 포괄하다가 나중에 운동이 분화됐다.”

여성민우회는 87~90년 3년간 생산직여성분과를 두었다. 하지만 곧 한계를 느꼈단다. 87년 이후 노동운동이 확산되면서 외곽지원단체의 역할이 축소되면서 선택과 집중의 차원에서 생산직 분과를 폐지했다고. 하지만 87년 노동자대투쟁 당시엔 세진전자·노스웨스트항공·피어리스·병원·전자회사 등의 여성노동자 투쟁을 지원했다고 김 의원은 회상했다.

- 여성환경연대를 설립하는 등 환경분야에서도 많은 활동을 했다.

“여성민우회는 포괄적으로 안 한 게 없다. 참교육학부모회의 경우도 여성민우회의 교육운동이 분화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생협도 만들어서 먹거리·소비자 문제 등을 우리 이슈로 채택했다. 이때 물·식품 등 환경문제도 같이 다뤘다. 하지만 생협운동은 주로 먹거리 중심이 되다보니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여성의 관점으로 환경운동 네트워크를 만들자는 필요가 제기돼서 99년 여성환경연대를 창립하게 됐다. 당시 우리는 개척세대였다.” 

“시민사회세력의 정치세력화 원했다”

- 왜 정치를 결심했나.

“시민활동가로 역할하면서도 늘 갑갑했다. 기본적으로 정치가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91년 민중당 활동도 열심히 했다.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당시 판단이 지금도 옳았다고 본다. 민주노동당이 뒤늦게 제도권에 진입했지만 그 당시 민중당이 성공했어야 했다. 70~80년대 민주화세력이 독자적 정치세력화에 성공해서 제도권 정당과 연대했어야 했는데. 하지만 실패 뒤 민주화세력이 제도권세력으로 흡수된 뒤 형해화 됐다.”

김 의원은 당시 민중당의 실패로 좌절했다고 했다. 하지만 다시 기회가 왔다.

“90년대부터 활성화된 시민사회세력은 80년대 재야세력과는 결이 다르다. 성평등·인권·생태·평화 등 구체적으로 21세기에 지향해야 할 가치중심 운동이 90년대부터 시작된 것이다. 2004년 총선 전 시민사회 정치세력화를 위한 천인선언을 하는 등 새로운 가치지향 세력이 정치세력화하며 제도권 결합방식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하지만 17대 총선시 우린 기대에 부풀었다. 민주노동당도 10명의 의원을 당선시켰고, 열린우리당도 과반수를 차지했다. 우리 정치가 한 단계 진전될 것으로 보았다. 시민사회 역할도 달라질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좌절했다고 한다. 열린우리당과 참여정부는 실패했다. 2006년 지방선거에서 깨져나가고, 개혁정치권은 대선 국면에서도 아무 것도 못했다.

“지난해 시민사회세력이 정치세력화해야 해서 새로운 정치를 만들어야 한다는 논의를 가졌다. 이를 중심으로 개혁진영을 통합한다면 대선·총선도 가능하다는 기대도 가졌다.”
이때 시민사회세력은 두 개의 방향으로 분화된다. 하나는 대통합민주신당 창당과정에서 참여하고 또 하나는 문국현씨를 중심으로 당을 만들어 대선 출마시키는 방식이었다.

- 왜 대통합민주신당 창당과정에 참여했나.

“제가 대통합민주신당으로 간 것은 시민사회세력 내 논의 끝에 나온 결론이었다. 신당을 만드는 과정에서 1대 1의 지분을 갖고 출발했으나 우리가 상당히 취약했다. 문국현씨와의 관계는 창당과정에서 조율·정리가 어려워서 결과적으로 시민사회세력이 분화됐다. 우리 생각대로 하나도 안 됐다. 시민사회세력이 준비가 덜 되고 문국현씨와는 마지막까지 통합하지 못했다. 우리의 힘은 없지만 갖고 있던 정당성과 상징성을 최대한 발휘했으나, 정치권에서 우리 입지를 확보하는 게 참 어려웠다.” 

“여성비정규직 문제 해결에 노력할 것”

- 처음부터 비인기 상임위인 환경노동위원회를 희망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진짜 인기가 없더라.(하하) 지금까지 시민운동을 하며 지향한 환경·생태의 중요성과, 여성운동을 하며 성차별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해왔다. 여성문제는 큰 틀에서 제도적으로 많이 확보가 됐으나 여성노동자 문제는 그렇지 않다. 여성문제의 핵심은 노동문제다. 여성이 먹고 살아야 하는 생존권 문제다. 하지만 여성노동자의 70~80%가 비정규직이다. 여성노동자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봉건적 굴레는 벗어났어도 삶은 나아지지 않는다. 내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또 환경부분은 성차별·생태주의 등 그동안 추구해온 가치가 집결된 부분이다. 또 대운하도 저지해야 하지 않나.”

-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표방하는 이명박 정부의 노동정책에 대한 입장은.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넘어서서 대기업 총수 같다. 그것도 현재의 글로벌 시대의 대기업이 아니라 70~80년대 회사의 사장 마인드다. 시장 맹신주의자의 노동정책에 접근이 걱정스럽다. 또한 대통령이 정치인으로서 정치수업을 너무 안 받은 것도 걱정이다. 정당조직 안에서 주류인 적이 없었다. 대통령은 최후의 정치력을 발휘해야 하는데 지금 너무 훈련이 안 돼 있다. 70~80년대 기업방식으로 잘못 학습돼 있다.”

- 비정규직 문제는 곧 여성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를 위해 18대 국회에서 무엇을 준비하고 있나.

“우선 비정규직법 통과 이후 대량해고는 막아야 한다. 고용안정성을 더 해치게 된 부작용을 막는 게 우선이다. 이랜드 사태 등을 막을 수 있는 보완장치가 시급히 마련돼야 한다. 또한 특수고용직의 다수가 여성이다. 우선 외주화 규제와 특수고용직 보호를 위한 검토를 하고 있다. 이후 노동현장을 많이 찾아다니며 이야기를 들을 것이다.”

그는 정부여당의 비정규직법 개정에 대해 민주노동당과의 공조를 강조했다. 기간제 사용기간 연장과 파견허용직종 전면확대에 대해 “이번엔 막아야 하는 싸움”이라고 규정하며 “지금은 두 당이 공조해야 한다”고 말했다.

- 환노위 희망사유 중 하나가 한반도 대운하 저지도 포함됐다.

“당의 대운하특별위원회 위원장이다. 대운하 문제를 주로 다룰 곳은 건설교통위원회이긴 하지만 대운하 문제의 핵심 중 하나가 수질이다. 이는 환노위에서 막아야 한다. 넘나들며 대응해야 한다. 우리 당이 대운하 저지에 총력을 기울이도록 하는 게 저의 역할인 것 같다.” 

‘새로운 진보’라는 당 정체성 확립해야

- 한미FTA 저지에도 목소리를 내는 것 같다.

“17대 국회에선 절대 안된다는 입장이었다. 17대에선 민주당이 여당으로서 의원들이 한미FTA 비준을 해야 한다는 입장도 꽤 있었다. 하지만 17대와 18대는 다르다. 18대에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18대 의원이 주축이 돼서 하나하나 다시 검토해야 한다. 그것이 저의 입장이다.”

- 지금 민주당은 스펙트럼이 너무 다양하다는 지적이다. 민주당의 정체성은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민주개혁은 권위주의 정권시절의 가치다. 지금은 보수정당도 지향하는 가치다. 새로운 진보가 나와야 한다. 계급주의 정당에서의 진보가 아니라, 시민사회 시대의 진보를 내세워야 한다. 다양한 가치들이 표출돼 나온 21세기의 흐름과 정신이 구현되는 그런 ‘신진보’가 필요하다. 이것이 분명해야 우리 정책에도 일관성이 가질 수 있다.”

지금 민주당은 지난 원내대표 선거에서도 다가올 대표선거에서도 당의 정체성이 화두다. 아직은 정리되지 못한 각각의 말들로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그런 가운데 김 의원은 “시장 영역만으로는 함께 잘 살 수 없다. 환경과 생태가 파괴되지 않고 공공의 영역을 확대하는 게 필요하다”며 “당내 목소리가 모아져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벗고, 다양한 목소리를 드러내 토론하고 정체성을 확립하고 통합해야 한다. 아니면 엉터리 통합이다"고 강조했다.

- 당 최고위원회 도전 의사를 갖고 있나.

“고민 중이다. 시민사회세력에서 유일하게 의원직을 갖게 돼 당내 정치활동에 대한 요구가 많다. 최고위원이 아니더라도 당내 정치역할을 할 것이다.”


사진=정기훈 기자
- 18대 국회 원구성 협상이 난항을 겪고 있다. 환노위의 환경과 노동이 분리돼 각각 행정안전위와 보건복지위로 분리·흡수될 경우 어느 상임위를 선택할 건가.
 

“분리가 안 될 것 같다.(하하) 만약 된다면 보건복지위로 가고 싶다. 그동안 해왔던 일과 관련이 많다.”
 


- 민주노동당에 관심이 많았을 것 같은데. 왜 선택하지 않았나.
 

“우선 민주노동당은 대선을 놓고 고민이 많았지만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봤다. 민주노동당은 충분한 의미가 있으나 우리 사회의 큰 흐름을 만드는 역할은 어렵다. 수권정당으로 보다는 계급정당으로서 정치권의 소금역할을 한다. 정치권을 선도투쟁하며 정치권을 자극하는 그런 역할 말이다.”
 


- 이화여대 출신의 여성·노동운동을 함께 했던 동료들이 많다.
 

“과거 여성민우회 공동대표를 같이 맡았던 이경숙 전 의원과 정강자 전 인권위 상임위원은 모두 나의 대학 동기다. 모두 함께 운동했던 이들이다. 최영희 민주당 의원은 3년 선배라서 같이 활동하진 못했다. 당시 2개의 운동권 서클이 있었는데 최 선배는 ‘새얼’활동을, 전 ‘흥사단’ 활동을 각각 했다.”
 


- 환노위를 맡게 되면 사실상 민주당에서 노동과 환경정책을 지휘하는 사령탑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17대에 비해 화력이 약화됐는데. 이에 대한 극복방안은.
 

“당론으로 주요 정책들이 관철될 수 있도록 하겠다. 배수의 진을 치고 하는 수밖에 없다. 민주노동당과 연대하고 노동계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겠다. 상임위가 확정되면 곧바로 노동현장을 방문할 것이다.”
 


- 창조한국당과 자유선진당과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한 데 대한 의견은.
 

“잊어버리기로 했다. 시민사회세력은 문국현 사장에게 호감을 가져왔다. 대선결과를 보면서 안타깝고, 이후 망가지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깝게 생각한다. 민주당보다 진보적이라고 생각해서 지지했던 이들을 어떻게 그렇게 배신할 수 있나.”

 
<매일노동뉴스> 2008년 6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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