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정기훈 기자
18대 국회 통합민주당 당선자 중에는 또 한 명의 노동운동 출신자가 있다. 최영희(57) 당선자. 그는 조직 운동가는 아니었지만 70년대부터 90년대 초반까지 꾸준히 노동운동에 몸담았다. 특히 80년대에는 현장노동자를 대상으로 숱한 대중강연을 통해 노조민주화 세력을 확산시키는 데 역할을 했다. 많은 노동조합 리더들이 그의 교육을 받았다.

지난 20일 광화문에 위치한 그의 오피스텔에서 최 당선자를 만났다. 그는 도시산업선교회 노동담당, 도서출판 석탑 대표, 여성민우회 부회장, 내일신문 사장 겸 발행인, 내일여성센터 이사장, 국가청소년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지난 총선에서 통합민주당 비례대표 3번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80년대 ‘석탑출판사’ 통해 활발한 대중강연

- 요새 여러 토론회에서 얼굴을 보이고 있다. 당선 이후 어떻게 지냈나.

“청소년 활동의 대명사처럼 돼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최근 아동성폭력 사건이 발생하다보니, 전문적 의견을 들으려고 언론에서 많이 찾아 바빴다. 또 얼마 남지 않은 17대 국회에서 아동청소년성보호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현역 의원들과 같이 뛰었다.”

- 70~90년대 노동운동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여성노동자와 함께하는 노동운동을 주로 했던데.

“사실 대학 졸업 전 (지하)서클활동을 하며 인연이 있었다. 졸업 뒤 그 나이에 할 수 있는 일이 내 또래 여성과 소통을 하는 것이었다. 73년 인천도시산업선교회에서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동일방직 나체시위 당시엔 현장에 살다시피 했고 반도상사 사건 때는 배후조정자로 연루돼 수배를 받기도 했다.”

엄혹했던 그 시절, 노동운동의 ‘노’자를 꺼내는 것조차 위험했다. 합법조직인 한국노총을 제외하면 도시산업선교회, 카톨릭청년회 정도만이 활동할 수 있었다.

“당시엔 도산(도시산업선교회) 가면 도산한다고 할 정도로 탄압이 심했다. 유신 말기엔 목사님이 ‘하느님 빽도 소용없다, 36계가 최고’라고 말하실 정도였다.”

- 80년대 이후 노동운동의 환경이 바뀌었는데.

“80년대 들어 합법적 공간을 개척해보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80년대 초부터 공부하면서 ‘노동법 해설’이라는 책을 썼다. 함께 활동하던 동지들과 노동자 교육도 병행했다.”

“민주노동당 성공 불구 민주노총 뿌리내리지 못해”

주요 활동무대는 80년대 노동운동사에서 하나의 ‘일가’를 형성한 이른바 ‘석탑’이었다. 최 당선자와 남편 장명국 내일신문 사장이 주도했던 도서출판 석탑, 석탑노동상담실을 통해 노동교육이 이뤄졌다.

“현장경험을 살려 현장 노동자들이 정말 필요로 하는 내용을 담았다. 산업재해·노동조합·노동운동사 등의 책을 펴냈다. 그러자 자기 권리에 관심을 가졌던 노동자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그의 활동범위는 남성·사무직·언론 등으로 확대됐다. 국내 산업구조가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바뀌는 시대적 상황도 반영했다고 했다.

“대중강연을 많이 했다. 조합원 500~1천명을 앞에 두고 강의를 했다. 당시엔 그만큼 대중강연을 많이 한 사람이 없었을 정도였다.”

- 주요 관심이 여성·노동 문제에서 청소년 문제로 바뀌었다. 계기가 뭔가.

“자연스러운 전환 과정이 있었다. 87년 대중여성운동을 표방하며 창립된 여성민우회에 공동부회장으로 동참했다. 이후 93년 국민주 모금을 통해 내일신문 창간에 함께했다. 당시 내일신문 독자의 3분의 1이 여성이었다. 그들은 80년대 활동하다가 결혼했고, 이제 아이들이 초등학생이 돼 있다. 관심이 자연스럽게 자녀들에게 쏠렸다. 사회변화를 위한 구체적인 뭔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95년 내일여성센터를 만들었다. 구성애씨와 성교육도 했고, 성상담소도 운영했다. 양호선생조차 없는 지방에서는 이동식 시청각교육을 했고, 장애인 성교육 사각지대도 찾아다녔다.”

- 당시 ‘석탑’은 제2노총 분리에 반대했는데, 10여년이 지난 지금의 노동운동을 어떻게 보나.

“그때나 지금이나 노동운동의 생명은 단결이라고 여긴다. 당시 제2노총 분리는 패배의식이라고 봤다. 대기업노조를 다 장악했으면서도 왜 노총을 변화시키지 못하나. 물론 민주노총은 자기 힘보다 몇 배 많은 일을 했지만, 여전히 아쉬운 부분이다. 지금은 단결이 잘 안 되고 있는 것 같다. 이제는 국민들의 지지가 필요한 시기다. 민주노총 스스로 고립을 자초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최 당선자는 민주노총의 민주노동당 실험은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했다.

“민주노동당 10명의 의원들이 국회를 변화시키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들은 중요한 역할을 했고 성공적이었고 본다. 하지만 민주노총은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청소년위원회 폐지로 청소년정책 소외 우려”

- 왜 정치를 하려고 하나.

“처음부터 정치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아니다. 정치인에 대한 선입견이 많다. 공천 제의가 왔을 때도 계속 거절했었다. 물론 지난 정부에서 국가청소년위원장이라는 공직을 맡긴 했지만, 청소년 문제이고 NGO 활동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 청소년위가 폐지돼 보건복지가족부로 흡수됐다. 우려할 만한 상황이다. 공룡부처에서 청소년 정책이 얼마나 주목받을 수 있겠나. 너무 갑갑했다. 결국 정치를 하겠다고 결심했다.”

- 통합민주당을 선택한 이유는.

“민주화운동 세력들이 많고 제1야당이어서 힘을 보탤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민주노동당의 정책은 우리사회에서 필요하지만, 그것보다는 '중도 노선'을 지향한다. 민주당 내에서 좀 더 진보적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도 통합민주당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다.”

- 희망하는 상임위는.

“청소년정책을 포괄하는 보건복지위다. 지난 청소년위는 정부가 청소년 문제에 관심을 갖게 하는 역할을 맡았었다. 이제 국회에 가서 미래정책에 관심을 갖고 투자하도록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엄청난 비용부담이 든다. 보건복지 전문가들로 보좌진을 꾸린 상태다.”

- 현재 준비하고 있는 아동·청소년 정책을 소개한다면.

“아동청소년성보호법을 포함해 아동청소년 관련법이 많다. 물론 허울뿐인 법이다. 유엔 아동권리협약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다. 모두 손을 봐야 한다.”

최 당선자는 무엇보다 방과후 프로그램을 정착시킬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명박 정부는 방과후 학교를 마치 입시학교처럼 하겠다고 한다. 한심하다. 과거 청소년위는 전국 200여개 방과후 아카데미를 운영했다. 그게 모델이 돼야 한다. 청소년단체가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수업·상담·생활지도 등을 해주고 (부모가 올 때까지) 식사도 제공하고 아이들을 돌봐야 한다. 농어촌은 차로 집까지 바래다주는 등 투자를 늘려야 한다.”

“이명박 정부에는 아동청소년 정책이 없다”

- 이명박 정부의 경제·노동정책을 평가한다면.

“속도정책인 것 같다. 성급히 과실을 따려고 하는 게 아닌가. 자신의 손으로 모든 변화를 가져오려고 하는데, 그 과정에서 실수가 발생할 수 있다. 노동자 피해도 클 것으로 보인다. 엄청난 경쟁시대가 우려된다. 장기적 효과를 가져오는 경쟁인지를 면밀히 점검해야 한다.”

- 청소년정책은 어떤가.

“청소년정책은 제대로 된 게 없다. 투표권이 없어서 그런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다. 담당 공무원들도 사명감이 떨어진다. 아동청소년정책은 미래를 만드는 정책인데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것 같다.”

- 비정규직 문제는 미래의 노동자인 청소년들에게 곧 현실로 닥칠 문제다.

“청소년이나 비정규직 문제 모두 종합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다만 시간이 걸릴 것이다. 사실 비정규직은 고용보장이 안 되는 만큼 임금이 더 높아야 하는 게 정상이다. 지금 상태로 간다면, 사회 불안정성만 높아질 뿐이다.”

- 청년실업 문제도 관심을 가질 사안일 것 같다.

“법적 청소년 범위는 24세까지다. 그래서 청소년 문제와 청년실업 문제는 밀접한 연관관계가 있다. 청년실업의 원인 중 하나는 미스매칭 문제도 있다. 고교 졸업생 85%가 대학에 가는 상황이다. 생산직으로는 가지 않고, 취업준비기간이 길어지고 있다. 경제구조를 개선해 중소기업 문제를 해결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청소년위원장 시절 성과와 과제를 꼽는다면.

“위기의 아동청소년에게 핫라인을 개설하는 등 사회안전망 구축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들에겐 한 가지 서비스만이 아닌 종합서비스가 필요하다. 지역사회별로 사회안전망이 구축돼 원스톱으로 아동청소년 문제가 해결되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에서 이런 정책에 얼마나 관심을 가질 지 의문이다.”

“여성·청소년·가족정책은 통합돼야”

- 정부의 쇠고기 협상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된 촛불문화제에 청소년들의 자발적 참여가 이어지고 있다. 새로운 사회변화 세대라는 평가도 나오는데.

“아이들은 시키는 대로 정해진 대로 학교·학원 스케줄대로 움직인다. 하지만 쇠고기 문제는 그들 자신의 문제다. 급식은 피할 수가 없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삐어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참여에 사회가 관심을 가져주니 스스로의 존재감·자신감·보람 등이 더해진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는 학교와 학원을 오가는 교육현실 속에서도 과거와는 달리 청소년들이 창의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 다행이다. 그들에게도 선택의 기회를 줘야 한다.”

- 여성가족부가 대폭 축소되고 청소년위도 폐지됐다. 어떻게 보나.

“원래 여성가족청소년부로 하자고 주장했었다. 노무현 정부에서도 가족청소년부로 통합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문화관광부가 청소년 업무 이관, 보건복지부가 아동 업무 이관을 반대했다. 전형적인 부처이기주의였다. 하는 수 없이 여성가족부와 청소년위로 나뉘었다. 2006년 또 한 차례 통합 시도가 있었으나 역시 실패했다.”

최 당선자는 지금도 여성·청소년·가족정책을 통합해야 한다는 소신에는 변함이 없다고 했다.

“가족과 청소년, 여성정책이 함께 잘되면, 모두 비중이 커지면서 종합적인 정책이 만들어질 것으로 본다. 지금처럼 기존의 보건복지부에서 가족정책까지 다 하겠다고 하는 것은 과욕이다. 그런 점에서 18대 국회에서 목소리를 낼 것이다.”

최영희에 대한 오해와 이해

- 장명국 내일신문 사장의 부인이란 지위가 부담스럽지 않나.

“전혀 아니다. 최영희 남편이 장명국이다.(웃음) ‘노동법해설’도 같이 썼으나 당시 내 나이가 어려 도움이 안 될 것 같아 필자에서 이름을 빼긴 했지만 그런 게 부담스럽진 않았다. 각각 존재가치가 있었다. 우린 서로 보완적 역할을 했다.”

- 정치를 결심했을 때 남편의 반응은.

“우린 평생동지다. 그런 점에서 상의했다. 남편은 절대로 안 된다고 했다. 정치권에 대한 생각이 나와 같았다. 그러나 어렵게 결정한 뒤에는 나를 최대한 밀어주고 있다.”

- 대학시절 장하진 전 여성부장관, 이미경 민주당 의원 등과 같이 활동을 했는데.

“학교에서 ‘새얼’이란 서클을 같이했다. 초기엔 ‘지상’서클이었는데 71년 위수령 발동 이후 정부가 서클 없앤다고 난리치다보니 ‘지하’서클이 돼버렸다.(웃음) 이화여대에서 학생운동 조직서클로는 우리 모임이 처음이었던 것 같다. 뜻이 맞아서 같이 활동했고 지금도 계속 같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 과거 노동자 교육시 울산의 권용목·오종쇄씨 등과 인연과 깊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일부는 변절했다는 비판도 듣는데. 지금은 어떤 인연인가.

"그분들을 못 본지 오래됐다. 과거 김문수·이재오씨는 얼마나 열심히 운동했던 이들인가. 오히려 왜 민주노총을 나왔는지, 왜 함께 일하지 못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당시 민주노총이 품어 안았어야 하지 않았을까. 변절했다고 평가하는 것은 좋지 않다. 한나라당 비례대표 1번 강명순 당선자도 대학시절 우리 서클 후배였다. 우리 모두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 자리에 (엉뚱한 사람보다) 강명순씨가 가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도 해봤다. 강 당선자는 그동안 빈민 아동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 한나라당이 못 챙기는 부분을 챙길 수 있을 것이다."

- 청소년 시절 가장 큰 고민은 무엇이었나. 그리고 현재 청소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은.

“당시엔 살기가 어려웠다. 그저 힘들어도 책가방 들고 학교 가는 게 신통방통했다. 가족이 다 힘들어했지만 가정은 화목했다. 지금의 청소년들은 ‘나의 적은 엄마친구 아들, 딸’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부모들이 서로 아이들을 비교한다. 하지만 청소년 시기가 좋다는 게 뭔가. 앞으로 도전할 기회가 많다는 것 아닌가. 모두 힘을 보태 청소년들이 여러 가지 꿈을 갖고 살도록 했으면 좋겠다.”
 
<매일노동뉴스> 2008년 5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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