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조합도 사용자도 과거의 잘못된 습관을 벗어던지지 못하면 계속 대립할 수밖에 없습니다. SK에너지의 노사관계도 그야말로 대립의 구도였습니다. 노사가 대립하면 조합원만에게 피로감만 줄 뿐입니다."

이정묵(46) SK에너지노조 위원장은 지난달 집행부 출범과 함께 새로운 '선진노사문화 정착'을 선언했다. 노동계 안팎에서는 다소 의외라는 시선을 보내고 있다. 이 위원장이 이른바 '강성'으로 분류되고 있는 데다, 그가 살아온 삶의 궤적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이 위원장은 자타가 공인하는 '오뚝이' 인생의 대명사다. 이 위원장은 지난 88년 SK에너지의 전신인 한국석유공사(유공)에 기술직으로 입사했다. 유공 시절 두 번의 노조집행부 불신임 운동을 주도했다. 이로 인해 3년가량 직장을 잃는 아픔을 겪었다. 원직에 복직하는 데 6년여의 시간이 걸렸다. 이후 집행부 선거에 나섰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당선되지 못했다. 회사와 노조활동에 '한'이 서릴 만한 이력이다.

"노조활동이 한순간에 모든 것을 이뤄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집행부만의 노조활동은 조합원을 배반하는 겁니다. 조합원들이 나를 선택한 데에는 변하지 않는 삶의 자세와 함께 조합원들을 우선시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대립에서 대등의 관계로"

이 위원장의 '이색행보'는 집행부 출범 초기부터 계속됐다. 지난달에는 회사측의 제안을 수용, 이른바 '행복기원 산행'을 공동으로 진행했다. 이 위원장은 "자신있다"고 말했다.

"앞으로도 회사의 공동행사 제안에 대해 긍정적으로 판단할 겁니다. 외부에서는 노사화합으로 볼 수도 있고, 노조가 끌려다닌다고 할 수도 있겠죠. 그러나 회사가 구시대적 노사관계에 얽매여 있다면 노조가 먼저 나설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의 고민은 SK에너지 노사관계의 현재를 그대로 반영한다. 2000년대 들어 SK에너지 노사관계는 파업만 없었다 뿐이지 그야말로 대립과 갈등의 연속이었다. 지난해 회사측은 성과급을 차등지급하면서도 노조에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위원장은 "노조를 불필요한 상대로 바라보는 사용자의 마인드가 그대로 반영됐다"며 "노사가 서로를 대립적인 시각으로만 바라본 나머지 공정한 룰이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대립에서 대등의 관계로의 전환을 모색하겠다"고 강조했다.

"변화하는 시대에 잘못된 습관을 벗어던지지 못하면 노동조합 또한 경쟁력을 잃고 살아남지 못합니다. 투쟁을 실천하기 전에 논리적인 사고와 합리적인 협상으로 사용자를 이해시키고, 설득하는 데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조합원 없이 투쟁도 없다"

이 위원장은 '조합원 중심, 현장 중심, 화합의 노동조합'을 집행부 운영의 기조로 내걸었다. 지금까지의 노조활동에서 조합원과 현장이 중심에 있지 않았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노조 내부의 화합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자기 자신과 입장이 다르다는 이유로 조합원들을 '어용'으로 내모는 일이 많았습니다. 잘못된 노조 내부의 문화가 집행부 내의 분열, 노·노 간 분열 등으로 이어지곤 했습니다. 결국 우리 스스로 힘을 약화시킨 셈이죠."

그는 지난달 1일부터 위원장직을 수행하고 있지만, 단 하루도 쉰 날이 없다고 했다. 평일에는 현장순회 활동을 주기적으로 진행했고, 주말에는 조합원들의 체육활동에 참가했다. 조합원이 집행부를 외면하면 조합활동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지난 3월 집행부선거가 끝난 직후에는 울산공장과 전국 11개 물류센터 조합원들을 만나기 위해 1박2일의 강행군을 치렀다.

현재 노조에는 생산직을 중심으로 2천600여명이 가입해 있다. 2천300여명이 울산공장, 300여명이 전국 11개 물류센터에서 일하고 있다.

"공정한 성과배분·적정인력 유지돼야"

SK에너지 노사는 올해 임금과 단체교섭을 동시에 진행한다. 임기 첫해를 맞은 이 위원장으로서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부분이다. 이 위원장은 "정해진 원칙 안에서 임단협을 진행하겠다"며 "중요한 것은 표면적인 수치가 아니라 실제적인 인상과 향상"이라고 강조했다.

첫 번째가 임금이다. SK에너지 노사는 지난해 임금을 동결하는 대신 760%의 성과급을 지급하는 데 합의했다. 이 위원장은 "임금요구의 원칙은 지난해 인상되지 않은 부분과 올해 물가인상분"이라면서도 "교섭 과정에서 이를 상쇄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병행해서 갈 것"이라고 여지를 남겼다.

해마다 논란이 빚어지고 있는 성과급의 경우 과거와 현재의 실적과 당시 지급상황을 고려해 객관적인 기준을 만들어가겠다고 덧붙였다. 이와 별도로 단체협약에서 현장 적정인력 재검토를 통해 신규인력 채용을 요구할 방침이다. 실제로 SK에너지는 지난 98년 대규모 구조조정 이후 전체 인원이 축소되고 있다. 자연퇴사 인원이 충원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업무는 늘었는데 직원이 그대로라면 총고용이 보장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업무와 산업안정 등 종합적인 측면에서의 적정인력 조사작업을 거쳐 단체협약에 적정인력을 명시할 계획입니다."

"5개 정유사노조와 필수유지업무협정 공조"

이 위원장은 대외적으로는 상급단체 활동과 정유사노조 간 연대활동 강화에 주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SK에너지노조는 지난 2003년부터 상급단체인 한국노총 화학노련에 의무금을 납부하지 않았다. 지난해 10월에는 의무금 미납으로 제명당했다. 지난달 1일 공식 취임한 이 위원장은 첫 번째 대외활동으로 화학노련 재가입을 선택했다. 노조는 재가입 후 지난달부터 의무금을 내고 있다. SK에너지노조의 상급단체 활동 정상화는 국내 정유사노조 간 연대강화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국내 1위 SK에너지는 정유업체의 '맏형'이다. 지난 62년 유공으로 설립돼 지금은 정유뿐만 아니라 탐사와 시추분야에 이르기까지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국내 5대 정유사 가운데 현재 화학노련에는 SK에너지와 에쓰오일·현대오일뱅크·SK인천정유 등이 가입해 있다. 국내 2위 정유사인 GS칼텍스노조는 상급단체 없이 별도로 활동하고 있다. 이 위원장은 에너지산업 전반에 대한 전망을 공유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올해 1월 하나의 회사로 합병돼 '1사2노조'가 된 SK인천정유노조와의 통합작업은 장기적인 과제로 제시했다.

"국내 정유사 모두가 외환위기 이후 동일한 고민을 안고 있습니다. 일상적인 구조조정 문제와 필수유지업무 협정체결 등은 단위사업장에서 풀기 어려운 문제들입니다. 정보공유와 공동정책을 통해 연대활동을 강화할 생각입니다."
 
2차례 집행부 불신임운동, 6년의 해고생활
'끈기·오기'의 인생사 이정묵 위원장
이정묵(46) SK에너지노조 위원장은 '끈기'와 '오기'의 대명사로 불린다. 이 위원장은 지난 88년 SK에너지의 전신 한국석유공사(유공)에 기술직으로 입사했다. 노동운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94년부터다. 평조합원 신분이었다. 당시 유공노조에는 87년 노동자대투쟁의 여파가 미치지 못했다. 비민주적인 노조집행부의 운영이 조합원의 민주화 요구에 직면한 시기였다. 노조 민주화요구 중심에 이 위원장이 있었다.
 

하지만 의욕적으로 시도한 첫 번째 불신임운동은 실패했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도권 진입은 97년 대의원에 당선되면서 이뤄졌다. 대의원 활동에서도 '반골' 기질이 그대로 나타났다. 조합원들에게 정확한 사실을 전달하고자 시도한 신문발행이 회사는 물론 노조집행부와의 마찰로 연결되곤 했다.
 

집행부·회사와의 갈등은 97년 두 번째 집행부 불신임운동으로 이어진 배경이 됐다. 이때를 전후로 '유공노조바로세우기'라는 현장모임이 결성됐다.
 

그런데 두 번째 불신임 운동은 의도하지 않은 일로 좌절됐다. 그해 말 회사측이 이 위원장을 울산공장에서 서울 물류센터로 발령했다. 불신임을 준비하며 총회 소집권자이자 임시대대 소집권자로 나섰던 이 위원장은 인사명령을 거부, 같은해 12월 해고됐다.
 

이때부터 이 위원장과 회사 사이의 소송전이 시작됐다. 지방노동위원회와 중앙노동위원회를 거쳐 99년 6월 서울행정법원은 부당해고 판정을 내렸다. 확정판결과 함께 이 위원장은 회사와의 협의를 거쳐 2001년 1월 부산 물류센터로 복직됐다. 원직복직은 아니었다. 원직복직은 2003년 6월에야 이뤄졌다. 그는 97년 해고 이후 6년만에 울산공장 FCC생산팀으로 복귀했다

 
<매일노동뉴스> 2008년 5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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