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겸손했다. 시종일관 웃음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할 말은 다했다. 나름의 신념과 줏대가 느껴졌다.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3번으로 당선된 이정희(39) 당선자. 지난 2000년 사법연수원을 마친 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미군문제연구위원, 여성복지위원장을 비롯해 평화를만드는여성회 감사,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공동대표, 한국젠더법학연구회 회원 등이 그를 말해주는 이력이다.

여기엔 공통점이 있다. 미국과 여성, 그리고 인권. 이 삼각관계가 18대 국회에서 어떻게 발현될 것인가. 지난달 22일 민주노동당 중앙당사에서 이정희 당선자를 만났다.

사진=정기훈 기자
- 당선이 확정된 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다. 소감은.

“다시 생각해봐도 해야 할 일이 많다고 새삼스럽게 느낀다. 17대 마지막 국회가 열리고 있는데, 한미FTA 비준 처리를 막는 게 가장 시급하다고 생각된다.”

그는 묻기도 전에 17대 마지막 임시국회에 상정될 한미FTA 비준 문제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의 역사가 그 이유를 말해준다. 이 당선자는 인권변호사로 이름을 알려온 사람이다. 호주제 폐지,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입법권고, 매향리 미군 폭격장 주민 집단피해 승소, 이시우 사진작가 국가보안법 혐의 승소 등이 그의 작품이다.

여성인권과 한미관계, ‘두 줄기’ 인생

- 인권변호사로서 어떤 길을 걸었나.

“두 줄기가 있다. 여성인권과 한미관계다. 물론 뿌리는 하나다. 한미동맹이란 구조의 한국 땅에서 살아가는 여성의 모습에서 두 줄기로 나뉘는 것이다. 단순한 줄기로 나뉘는 게 아니라 넓혀지고 확장된다. 그동안 인권·여성·소수자 등 다양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다뤘다.”

이 당선자는 정치를 꿈꾼 적은 없다고 했다. 하지만 법정과 국회는 다르지만 공통점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 법정과 정치무대의 차이는 분명할 것 같다. 왜 정치를 결심했나.

“사회정책과 사회변화 때문에 개별사건이 일어난다. 또한 그 개별사건에 대한 판단에 따라 사회의 판단기준이 만들어진다. 법정에선 의뢰인의 변호인이지만, 사회적 문제에선 사회의 변호인이란 생각을 갖고 있다. 이제 법정에서 사회로 무게중심을 옮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국회는 뭐가 다를까.

“법정에선 피해자가 어떤 상태, 어떤 심정인가를 선명히 드러내는 게 아주 중요하다. 그런 다음 구체적인 해결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국회도 비슷할 것 같다. 상식기준이 무엇인지 잘 잡아내야 한다고 본다. 다만 기존엔 법관을 상대로 외쳤다면, 이젠 전국민을 상대로 쉽게 다가가야 할 것이다.”

그는 안그래도 인터뷰 당일(22일)이 이시우 작가의 항소심이 시작되는 날이라고 했다. 이 당선자는 당초 변호인단의 주심이었지만 지금은 당선자 신분이라 뒤로 빠졌다.

사진=정기훈 기자
“현장의 진실 전달하는 정치인 되고파”

- 왜 민주노동당인가.

“민주노동당은 앞서 말한 것에 비춰 유일하고 근본적인 힘 있는 정치세력이라고 본다. 국민을 책임질 수 있는 정치가 있어야 한다. 민주노동당이 최근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빨리 살아나야 한다.”

- 처음 공천 대상이란 소식을 들었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나.

“전혀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상황이 급박했다. 주어진 환경에서 빨리 결단을 해야 했다. 고민했다. 언젠가는 민주노동당이 대표하는 진보세력이 집권하는 날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외교안보통상 분야의 경우 변호사 경험을 살려 당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 이 당선자는 지난 총선 당시 TV토론에 나가 좋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사실 TV토론에서 말 잘하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논리적으로 물러서지 않고, 더 나아가 논리성·진실성이 어디에서 나오는가를 보여주고 싶었다. 바로 현장의 목소리를 가능하면 진실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우리가 왜 옳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평범한 이들이 가진 진실 말이다.”

- 희망하는 상임위는 무엇인가.

“통일외교통상위원회다.”

그는 고민의 여지도 없이 확고히 말했다. 물론 당과 함께 결정하겠다는 말을 덧붙였지만.

“민주노동당에게는 민생과 경제문제가 중요하다. 그만큼 외교안보통일 분야도 중요하다. 지난 노무현 정부에서 국민들이 가장 실망한 부분은 이라크파병, 한미FTA 등이다. 국내 민주주의 발전에도 외교분야에선 민주주의 침해가 이뤄지고 있다. 대부분 미국과의 관계에서 힘의 차이 때문에 우리가 양보하고 있다. 그래야 주한미군이 떠나지 않고 안정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관계는 한국에 이익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쇠고기 협상처럼 국민의 반발을 부른다고 그는 강조했다.

“외교안보 분야에서 민주주의란 국민의사를 반영하면서 가는 것이다. 그것이 평등한 대외관계를 만드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민주노동당 지지자 중에는 과거 효순·미순 사건, 평택미군기지 이전 문제를 심각하게 느끼고 공감하는 젊은층이 많다. 이들을 이끌고 가려면 외교통상분야에서 전문가를 키워야 한다.”

“외교통상분야 민주주의 되찾고 싶다”

하지만 18대 국회에서 5석에 그친 민주노동당은 민생 위주의 상임위를 우선적으로 선택한다는 전략이다. 어쩌면 그의 희망과 상관없이 재경위나 법사위를 맡게 될 가능성도 있다.

- 18대 국회에서는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의 ‘비즈니스 프렌들리’ 기조에 따라 비정규직법 재개정 문제가 다시 쟁점이 될 가능성이 높다. 어떤 입장인가.

“우선적으로 파견법 폐지, 기간제 사유제한을 골자로 한 법률안을 제출하는 게 시급하다. 그러나 법률안만 낸다고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홍희덕 당선자가 비정규직 문제를 총괄할 텐데, 그 과정에서 구체적인 법률적 수단을 동원해 정부를 압박하고 우리의 요구가 무리한 게 아니라고 국민을 설득하는 일을 해야 할 것이다.”

- 지금까지의 관심사항 중 국회에서 시급히 해결해야 과제를 꼽는다면.

“한미FTA 저지는 올해 꼭 해야 할 문제다. 한나라당은 17대 국회에서 통과시키려고 하나 사실 충분히 심의가 될지 의문이다. 국민의견을 수렴하고, 정부가 조약체결 과정에서 어떤 잘못을 했는지 반성과 질책이 필요하다. 또한 올해 (주한미군의 주둔비용인) 방위비분담금 협상이 끝난다. 현재 미국은 우리나라가 50%까지 분담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내용의 협정이 체결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1, 2년 협정을 못 맺었다고 미국이 굶어죽진 않는다.”

대신, 남는 돈은 등록금 150만원 등의 민생문제 해결에 쓰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장 사회적으로 책임 있는 이들이 세금을 내도록 해야 하지만 조세저항이 만만치 않은 상황이다. 이 당선자는 "정부는 10% 예산절감을 말하는데 그 분야는 불필요한 군사비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 얼마 전 한미 두 정상은 ‘21세기 전략동맹’에 합의했다. 어떻게 평가하나.

“한미전략동맹의 우선 과제는 한미FTA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속내는 미국의 이익을 위한 방향이라는 것이다. 대량살상무기확산방지구상(PSI) 참여, 방위비분담금 증액, 아프가니스탄 재파병 등이 이야기됐다. 정부는 무기구매국(FMS) 지위 격상이 성과라고 하는데 미국산 무기를 값싸게 살 수 있을진 몰라도 결국 한국에 무기를 많이 팔겠다는 것 아닌가. 한미FTA와 무기도입 등으로 한국이 돈을 많이 쓰게 하겠다는 것이다. 가뜩이나 서민경제가 어려운데 그런 방향이면 앞으로 국내경제가 더 어려워진다.”

“민주노동당 갈 길 알려준 총선”

이제 민주노동당 내부의 문제로 들어가 보자. 이 당선자는 당의 분열 과정을 당사자가 아닌 바깥에서 지켜본 사람이다. 그는 어떤 심정으로 봤을까.

- 8년의 진보정치가 분열로 마감됐는데.

“분열로 마감했다고 보지 않는다.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지난 대선에서 실패한 것은 맞다. 국민에게 더 힘을 모아달라는 느낌을 주지 못했다. 잘못한 점은 책임지고 평가해야 한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이 가장 책임 있게 일해 왔기에 빨리 살아날 수 있다고 보았다. 그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지역구(경남 창원을)에서 재선에 성공한 것은 앞으로 당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잘 보여준 사례다.”

- 민주노동당이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것인가.

“결국 꾸준히 얼마나 지역주민과 만나면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제대로 대변하느냐 하는 것이다. 당장 바꾸지 못해도 속 시원하다는 희망을 안기는 게 필요하다. 줄어든 의석수는 아깝지만, 당이 갈 길을 알려준 교훈적인 선거였다.”

- 일각에선 진보대연합을 추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민주노동당이 어떤 정치세력과 같이 가야 할지는 사안별로 다르다고 본다. 지난 17대에서 기초노령연금 문제는 한나라당과 입장을 같이 했다. 또한 현재 대운하 반대세력 모두와 뜻을 같이 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민주노동당이 얼마나 진보적으로 치열하게 책임질 수 있느냐의 문제다. 진보신당 등 진보정치세력과는 당장은 아니지만 믿음과 신뢰를 쌓는다면 단결의 희망이 있다고 본다.”

“일하는 사람 대변하는 게 나의 역할”

- 당선자는 한미관계에 대한 관심만큼이나 지난 민주노동당의 종북주의 논쟁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지켜봤을 것 같다. 바람직한 대북관계에 대한 의견은.

“종북주의 논쟁은 불필요한 논쟁이었다. 특히 그 논쟁이 국가보안법 피고인을 중심에 놓고 진행된 것은 유감이다. 국가보안법이 진보세력 내부의 공격 수단이 돼선 안 된다. 대북관계는 넓은 세력이 같이 할 수 있는 ‘기준자’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6·15 선언 등의 기조로 가면 발전해 나갈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이명박 정부는 새롭게 발목을 잡고 있다. 갑자기 연락사무소를 설치하자고 하면 상호신뢰가 생기겠는가. 구체적으로 신뢰를 쌓을 수 있는 남북관계 조치는 취하지도 않고 10·4 선언 등 기존 정책을 지워버리는 방식은 곤란하다.”

- 민주노동당의 17대 의정활동에 대해 다양한 평가가 나온다.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은 어떤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고 보는가.

“민주노동당은 일하는 사람들이 만든 정당이다. 그들을 가장 잘 대변하고 원칙적인 해결방법을 제시하는 게 바로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한다. 현실에 기반해야만 좋은 정책도 나온다. 중간에 사퇴하는 것은 중요치 않다. 사퇴해서 일이 더 잘 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오히려 더 어려워진다면 좋은 방안이 아니다. 어떻게 일이 잘 되게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이정희에 대한 오해와 이해

- 87년 서울대 여성수석 입학생이란 꼬리표가 늘 따라다닌다. 부담스럽지 않나.

“오히려 열등감을 느꼈다고나 할까. 고3 때 공부만 해서 세상물정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반면 다른 친구들은 공부도 열심히 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왜 좁게 살았나 고민했다.”

-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다면.

“개인 블로그에도 글로 쓴 사건이다. 고위공무원인 한 여성이 아버지 병환으로 사채를 얻어썼다가 살인적인 이자에 직장도 잃고 이혼당한 뒤 자살을 시도하고, 실형까지 산 가슴 아픈 사연이다.”

- 얼마 전 경제5단체가 규제완화 건의서를 정부에 제출했다. 거기에는 직장내 성희롱도 규제이니 풀어달라는 요구까지 포함돼 있었다.

“직장내 성희롱은 안전하고 평등한 노동환경을 만드는 문제다. 규제의 문제가 아니다. 회사 구성원 간 갈등과 충돌보다 협력해서 일할 수 있도록 오히려 사용자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다. 성희롱 가해자를 징계하는 게 당연한 원칙으로 인정된다면 직장내 성평등을 만들 수 있다.”

- 17대 국회의 쟁쟁한 민주노동당 의원들과 비교될 때 위축되지 않나.

“시간이 걸리더라도 만들어가야 할 부분이다. 이미지를 갖다 불일 수도, 누가 만들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만의 방식으로 국민에게 신뢰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 평소 ‘아름다운 가게’에서 5천원짜리 옷 한 벌을 사 입는 등 소박한 삶을 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 입고 있는 옷도 ‘아름다운 가게’에서 산 것인가.

“평소에 아름다운 가게를 애용한다. 돈을 잘 안쓰는 스타일이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은 당선된 뒤 새로 산 옷이다.(웃음)"
 
<매일노동뉴스> 2008년 5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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