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는 5천년 전부터 내려온 인류 최초의 ‘인공보석’이라고 불린다. 유리의 쓰임새는 음료수병부터 창유리·자동차유리·LCD모니터까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70년대 대량생산 체계를 갖춘 국내 유리산업은 산업의 중심이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이동하면서 고비를 맞았다. 유리제품을 대신하는 플라스틱 제품도 우후죽순처럼 늘었다. 하지만 90년대 중반 환경호르몬 논란으로 친환경소재인 유리로 만든 유리제품이 다시 각광을 받고 있다.
<매일노동뉴스>는 지난 14일 국내 3대 유리병 제조업체 가운데 하나인 삼광유리공업(주)을 찾았다. 삼광유리는 술병·음료수병과 식기용 유리제품을 만드는 업체로 인천광역시 남구 학익동에 2만평 규모의 공장을 가동하고 있다. 생산직 120명을 포함해 160여명이 일하고 있다.
깨진 유리, 부활하다
오전 11시. 회사 입구를 들어서자 출하를 앞둔 유리제품들이 눈에 띄었다. 한 파레트에 많게는 유리병 1천500여개가 포장된 제품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기자는 최응권(52) 삼광유리공업노조 위원장을 만나기 위해 ‘파레트산’ 사이로 난 길을 걸었다. 최 위원장과 인사를 나눈 뒤 작업복 한 벌과 면장갑 한 켤레를 건네받았다.
“워낙 힘든 데가 많아서 직접 체험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가까이서 볼 수는 있도록 해볼게요. 우선 파유리공정부터 가보죠.”
유리의 주원료는 규사·장석·석회석·소다회·파유리 등이다. 파유리 즉 깨진 유리도 엄연한 유리의 주원료다. 파유리는 삼광유리의 생산비를 줄이는 데 큰 몫을 하고 있다. 한국유리공업협동조합에 따르면 지난 2005년 한 해 유리병은 77만7천톤이 생산됐는데, 이 중 72%인 56만7천톤이 재활용됐다. 삼광유리는 외부업체에서 하루 60톤의 파유리를 킬로그램당 55원의 가격으로 구입한다.
파유리를 쌓아 놓은 곳 옆에서 유리 조각들이 공장 안과 연결된 벨트를 타고 떨어지고 있었다. 한 용역업체 여성노동자가 깨진 유리더미에서 무언가를 골라냈다. 그는 직접 만든 숟가락이 달린 길이 1미터 정도의 작대기로 파유리에 섞인 플라스틱이나 금속물질을 걷어냈다. 벨트 위에 떨어지면서 날린 유리가루들이 그의 얼굴과 작업복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는 하루 8시간 동안 이 일을 한다고 했다.
유리제품의 생산공정은 ‘배합→용해→성형→서냉→검사→인쇄→포장→출하’로 나뉜다. 배합공정은 알맞은 조합비율에 따라 주원료와 적정량의 파유리를 섞고 여기에 부원료를 배합하는 과정이다. 배합작업장 안에 들어서니 빗자루로 바닥을 쓰는 노동자들이 보였다. 유리의 원료가 모래(규사)이다보니 작업장 안에 먼지가 가득했다. 배합작업장 반장인 이기연(55)씨는 24년 동안 이곳에서 일했다고 한다.
“우리가 섞은 원료가 넘어가야 공정을 시작할 수 있어요. 자동화된 기계가 원료를 섞지만 그래도 사람 손이 가야 정확하게 원료를 섞을 수 있죠.”
배합을 끝내고 나니 10∼20분 정도 짬이 났다. 휴식시간은 기계가 돌아가느냐 아니냐에 따라 좌우된다. 이씨는 휴식시간 동안에도 바닥을 쓸고, 공장 한 켠에 있는 진공청소기 모양의 호스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래를 털어내고 있었다.
'1천600도'를 지켜라
오후 2시 용해로 작업장 안. 거대한 용해로가 뜨거운 열기를 뿜어냈다. 모래를 녹이기 위해서는 최소 1천500도(℃)의 용해로가 필요하다. 용해는 배합공정을 거친 원료를 섭씨 1천500도 이상의 고열로 녹이는 과정이다.
용해로 속이 궁금했다. 관리팀장이 기자에게 안면 보호장구를 건넸다. 그는 “맨 얼굴로 들여다봤다가 화상을 입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용해로 안은 마치 영화에서나 보던 용광로 같았다. 유리 원료들이 거품을 내면서 부글부글 끓으며 녹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용해로 곳곳에 20센티미터 정도로 난 구멍을 통해 수시로 용해로 안을 점검한다고 한다.
작업장 한가운데 위치한 제어실로 향했다. 용해로 안의 온도와 압력을 나타내는 각종 컴퓨터와 기계들로 가득했다. 김정훈(55)씨는 30년 동안 용해로 작업장에서 일했다. 그는 모니터에 찍힌 ‘1,580℃’라는 온도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용해로를 꺼뜨리기라도 하면 큰일나죠. 다시 켜려면 20일이 걸리거든요. 급하게 온도를 올렸다가는 용해로가 깨져버릴 수도 있어요.”
김씨를 비롯해 용해로에서 일하는 직원 6명은 여름철엔 실내온도 40도가 넘는 작업환경에서도 24시간 1천500∼1천600도를 ‘사수’한다. 기계를 보다 이상이 생기면 직원들이 용해로 중간에 난 작은 구멍을 통해 용해로 상태를 직접 확인해야 한다. 용해로 구멍에서 자칫 연기나 불길이 나오면 화상을 입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안고 일한다.
손짓·발짓만 통하는 곳
오후 2시 30분. 성형작업장에 들어서자 굉음이 기자를 압도했다. 성형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귀마개를 하나씩 하고 있었다. 바로 옆에서 귀엣말을 해도 알아듣기 힘들 정도다. 굉음의 주인공은 'IS머신'. 용해로에서 파이프를 타고 온 적당량의 유리물이 IS머신이라는 성형기계로 떨어진다. 새빨간 유리물들이 유리제품 모양을 만들기 위한 금형 안에 떨어지는 데는 단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유리물은 쉬지 않고 금형 속으로 일사불란하게 떨어졌다.
성형은 용해와 함께 유리 제조공정의 핵심이다. 성형공정의 노동자들은 여름철이면 체감 실내온도가 최고 40도를 넘는 고열과, 잠시만 있어도 귀가 멍멍해지는 굉음 속에서 일한다. 작업장 곳곳에 냉방시설이 마련돼 있지만 4월이 지나야 가동된다. 성형작업장 반장인 임신연(51)씨는 “여름철 성수기에는 하루에 80만∼90만개의 유리병을 만든다”며 “성수기가 여름이다보니 이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더 힘들다”고 말했다.
독특한 작업환경 탓에 노동자들이 느끼는 애환도 남다르다. 96년 입사한 김민철(35)씨는 “처음 입사해 가장 힘들었던 건 고참 눈빛만 보고도 무슨 말을 하는지 감을 잡아야 하는 것이었어요”라며 “손짓과 눈빛만으로 화장실 갈 테니 잠시 맡고 있어라는 대화를 나누니까요”라고 말했다.
유리에 옷을 입히다
성형 과정을 거치면 유리제품은 어느 정도 형태를 갖춘다. 하지만 1천600도 용해로 속에 있던 유리가 상온으로 갑자기 나오면 온도편차로 여러 문제가 생긴다고 한다. 그래서 필요한 공정이 서냉. 서냉은 성형된 제품을 서서히 냉각하는 공정이다. 제품을 30∼40분 동안 550도까지 가열했다가 서서히 식힌다. 유리 강도를 강화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공정이다.
자동화된 기계가 서냉과 이후 검사 공정까지 대부분 책임진다. 기계가 엑스선(X-ray)을 통해 금이 간 부분이 있는지, 굴곡이 어긋난 부분이 있는지 확인한다. 깨진 유리제품이 하나라도 출하될 경우 생길 위험성 때문에 육안검사도 꼼꼼히 거쳐야 한다.
8년째 일하고 있는 박진호(40)씨는 “원래 성격이 덜렁덜렁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는데 이 일을 하다보니 이젠 친구들이 성격 참 깐깐해졌다고 말한다”고 웃었다. 그가 안도의 한숨을 느끼는 순간은 ‘제품에 하자가 없어 거래처에서 연락이 없을 때’라고 한다.
백색 유리제품은 서냉을 거쳐 포장을 마치면 출하를 앞둔다. 문자와 그림이 들어가는 ‘컬러유리제품’에는 포장에 앞서 인쇄공정을 더 거쳐야 한다. 인쇄는 유리표면에 상품명 등 색깔이 있는 글자와 그림을 입히는 공정이다. 4가지 색상을 표현하는 기계는 4도 인쇄기, 6가지 색상이면 6도 인쇄기다.
삼광유리는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8도 인쇄기를 보유하고 있다. 술병에 찍힌 ‘매화수’라는 상품명과 색깔이 화려하다. 작업장을 나서면서 한 켠에 전기밥솥이 눈에 띄었다. 인쇄 작업을 하던 한 노동자는 “유리에 색깔이 들어간 글자와 그림을 넣기 위해 필요한 도료가 굳지 말라고 준비한 것”이라고 말했다.
인쇄공정까지 마친 제품은 시트를 깐 파레트에 차곡차곡 포장돼 쌓인다. 고추장을 담는 유리병이 담긴 파레트가 원형으로 된 자동포장 기계 위에 놓여 자동으로 비닐로 감긴다. 이렇게 만든 제품은 곧바로 출하되거나 창고에서 며칠을 기다려 세상을 향해 나갈 준비를 한다.
24시간 가동되는 공장 사람들
지난 67년 설립된 삼광유리는 외환위기 당시 부도 직전까지 갔던 회사다. 2006년에 첫선을 보인 식기 유리제품인 ‘글라스락’이 효자 노릇을 톡톡히 했다. 내열강화유리 밀폐용기인 이 제품은 잘 깨지지 않는 환경 친화적인 제품으로 2006년부터 지금까지 소비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지난해 2월 ‘100대 우수 특허제품 대상’에서 국무총리상을 받기도 했다. 근심거리였던 플라스틱 제품인 ‘락앤락’과 상품권 분쟁에서도 지난해 승소했다.
유리공장은 용해로가 있어 24시간 가동된다. 삼광유리의 경우 3조3교대제로 한 명이 하루 8시간을 일한다. 최승권 위원장은 “1년에 봄·가을로 1박2일 동안 야유회를 가는데 3개조로 나눠서 가야 한다”고 말했다. 설이나 추석 연휴에 고향을 찾지 못하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이날 오전 7시부터 8시간 동안 일을 마친 생산직 노동자들이 하나 둘씩 노조 사무실을 찾았다. 막 샤워를 마치고 퇵느을 준비하던 김민철(35)씨는 “일을 끝내고 덥다고 바로 찬물로 샤워하면 안 돼요. 몸에 무리가 갈까봐 미지근한 물로 샤워를 하고 땀만 대충 닦고 집에 가는 거죠”라고 말했다.
김씨는 대화를 하면서도 수건을 들고 연신 얼굴과 몸의 땀을 닦아내기 바빴다. 그는 “그래도 술을 마실 때는 우리 회사에서 만든 술병에 담긴 술만 마신다”며 “음료수를 마실 때도 병 밑을 보는 습관이 있는데 병 밑을 보면 이 유리가 어느 회사에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다”고 웃었다.
최승권 위원장은 “유리업체에서 성형이나 용해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노동강도가 다른 제조업체 노동자보다 센 건 사실”이라며 “오래된 시설을 바꿔 작업환경을 개선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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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노동뉴스> 2008년 3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