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 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벤처맨들에게 '쉼표'는 없는가. IMF이후 2년 여동안 신경제의 상징으로 자리잡으며 '창업 신드롬' 열풍을 몰고 온 벤처기업도 이제 가내수공업 수준의 고용계약을 새로 정립해야 한다는 지적이 일고있다.

강남 테헤란밸리에서 지난해 초부터 PC 게임을 개발하는 벤처기업 A사에서 프로그램 개발자로 일하고 있는 차모(29)씨는 휴가 없이 올 여름을 날 작정을 하고 있다.

지난해 스카웃으로 이 회사에 입사한 차씨는 "연봉계약을 할 때 당연히 휴가는 있는 것으로 알았다"며 "회사와의 연봉계약서에 휴가에 대한 사항이 없다는 이유로 여름휴가는 물론 아직까지 월차휴가도 없었다"며 불만을 나타냈다.

최근 벤처기업의 인력수급이 유동성이 강한 스카웃 방식으로 주로 이뤄지기 때문에 계약조건이 개인마다 다르고 연봉제를 택하고 있어 노조설립 등 단체행동은 꿈도 못 꾸는 게 현실이다 보니 회사측에 '건의'하는 수준으로 근로조건을 협상하고 있다는 것이다.

차씨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단점만을 골라 모은 것이 현재 대부분 벤처기업의 근로조건 일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경매관련 사이트를 운영하는 벤처기업 B사에 다니는 이모(30)씨도 사정이 다를 바 없다.

지난 2월 국내 대기업에서 이 회사로 옮긴 이씨는 "입사계약서가 매우 허술해 휴가는 커녕 시간외 수당도 받지 못하는 벤처맨들이 적지 않다"며 "벤처도 이제 기업문화의 또 다른 주류인만큼 노사관계가 재정립되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최근 벤처맨들이 대기업으로 '회귀'하는 이유도 다름 아닌 불분명한 고용계약 조건과 대기업에 못 미치는 사원 복지정책이라는 지적이다. 그러나 벤처업체의 경영자들도 어려운 입장이기는 마찬가지다.

증권관련 인터넷서비스를 제공하는 C사의 대표인 김모(33)씨는 "소수의 직원들을 보유한 초기 벤처기업은 직원 한사람의 비중이 회사전체에 미치는 비중이 크기 때문에 경영자로서 쉽게 휴가를 내줄 수 있는 형편이 못된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게다가 벤처기업 대부분이 기존의 수익이 보장된 상태가 아니라 '아이템을 개발하고 수익이 나면 나누자'는 식의 '미래형' 고용계약이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

테헤란 밸리에서 몇몇 '뜨는' 벤처기업들은 그래도 사정이 조금 낫다. 국내 대표적인 온라인 게임업체인 D사의 경우 팀별로 팀장의 권한에 따라 연중 아무 때나개인이 원하는 시기에 휴가를 갈 수 있도록 하고 휴가비 일부도 보조해 주는 등 대기업 못지 않은 과감한 사원 복지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이같은 경우는 전체 벤처업체중 매우 드문 편이다.

서울대 안병직교수(경제학부)는 "최근 국내벤처의 거품이 빠지는 과정에서 불협화음이 나는 것"이라며 "이익을 낼 수 있는 알짜 벤처가 살아남는 시장이 형성돼야 고용, 복지문제도 자연히 해결 가능하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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