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정치는 못하겠다.”
이상진(40) 민주노총 화학섬유연맹 위원장이 단위노조 간부와 통화한 직후 푸념처럼 한 말이다. 그는 직접 만나서 얘기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고 했다. 현장의 목소리를 직접 듣기 위해 지난주 여수지역 단위노조를 방문했던 이 위원장은 이번주에는 충청지역 단위노조를 둘러볼 계획이다. 이 위원장은 테트라팩 여주공장이 폐쇄됐을 때도 원정투쟁단을 꾸려 직접 스웨덴으로 달려갔다.

바로 그때 열린 화섬연맹 대의원대회에서 ‘연맹해산을 전제로 한 산별전환 결의’ 안건이 부결됐다. 지난해 9월의 일이다. 당시 연맹 부위원장이었던 이 위원장은 고민했다. 지도부가 모두 사퇴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이 위원장은 "혼란을 봉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해 총대를 메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이어 지난해 12월6일 ‘하나되는 화섬노동자, 산별시대로 전진하는 화학섬유연맹’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7대 연맹 위원장에 당선됐다. 임기는 내년 1월까지다. 지난 25일 서울시 영등포구 영등포동에 있는 화섬연맹 사무실에서 이 위원장을 만났다.


- 화섬연맹이 산별노조 전환에 역량을 집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생산현장의 고령화는 심해지는데 신입사원은 별로 없다. 노동자들이 정년퇴직을 해도 회사는 인력을 새로 뽑지 않는다. 대신 비정규직이 늘어나고 있다. 해외공장 이전에 따른 대규모 구조조정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제조업공동화와 고용 없는 성장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미조직된 노동자들을 산별노조로 조직해야 한다. 게다가 2010년을 기점으로 복수노조가 허용되고 노조전임자 임금지급이 금지된다. 지난달 이젠텍의 경우 산별노조는 복수노조가 아니라는 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복수노조에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은 산별노조뿐이다. 일단 외형이라도 완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어떤 형태의 산별노조를 지향하는가.

“금속노조와 통합하는 제조산별이다. 오랜 기간 금속과 화섬은 운동의 선봉에서 함께 투쟁했다. 제조업 노동자가 떨어질 필요가 없다고 본다. 미조직 사업장을 조직화하면서 금속과 화섬이 통 크게 제조산별노조를 출범시켜야 한다. 제조업공동화와 고용 없는 성장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아울러 국민과 함께 할 수 있는 투쟁방안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다. 기업별 임단협 투쟁을 넘어 전체 노동자들 아우를 수 있는 사회 공공성 의제를 놓고 연대투쟁을 해야 한다. 개별기업에 매몰되면 국민들이 노동운동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 여수산업단지에 있는 노조들이 산별전환에 소극적이라는 얘기가 있다.

“대단히 크다. 규모가 크지 않아도 여수산단이 총파업을 하면 산업근간의 30% 정도가 흔들릴 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공장이 멈추는 경우는 거의 없다. GS칼텍스가 파업투쟁에 실패했지만 당시엔 경험이 부족했다. (지난 2004년 7월 GS칼텍스노조는 노조설립 38년만에 처음으로 파업을 벌였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노조 지도부는 1년 간 구속됐고, 이후 GS칼텍스노조는 민주노총에서 탈퇴했다.) 그동안 여수지역 노조들과 중앙 간에 소통이 제대로 안 됐던 게 사실이다. 지도부가 제대로 된 사업을 준비해 서로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작은 투쟁이라도 우리의 공통된 요구를 하나라도 관철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 금호타이어노조의 금속노조 가입을 승인했는데, 어떤 의미가 있나.

“간단하다. 지난해 화섬노조도 제조산별로 간다는 결정을 했다. 금호타이어노조는 이미 금속과 화섬이 통합하지 못할 경우 금속노조에 가입하겠다는 자체 결정을 했다. 금호타이어노조가 그동안 연맹의 산별지도방침에 충실히 따랐고, 우리도 언젠가 금속과 같이 갈 것이라고 봤기 때문에 먼저 보내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산별 미전환 사업장들이 금속과 같이 간다는 데 부담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시간이 걸려도 함께 토론하고 답을 찾아보겠다.”

- 최근 섬유산업에 이어 화학산업에도 구조조정 압박이 심해지고 있다. 제조업 공동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현재 (노동계의) 실력으로는 마땅한 방안을 마련하기 힘든 상황이다. 그렇기 때문에 산별로 전환해서 정부와 협상을 할 수 있을 만큼 힘을 키우자는 것이다. 문제는 아직 석유화학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적신호가 오고 있다. 중국은 지금까지 원유만 팔다가 이제 석유 정제사업까지 벌이고 있다. 아시아를 겨냥한 것이다. 중국이 저가공세로 밀고 나오면 이미 공급과잉 상태인 국내 생산업체에 위기가 닥칠 것이다. 특히 화학산업은 섬유산업과 다르다. 산업 특성상 공장 규모에 비해 일하는 인원이 적다. 따라서 대규모 구조조정이 오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업체들의 인수합병 과정에서 정규직이 비정규직으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 미리 대비해야 한다.”

- 민주노동당이 분당사태를 맞고 있다. 연맹 위원장으로서의 고민은 무엇인가.

“개인적으로는 분당이 안 되길 바랐다. 현재 분당이 기정 사실화됐지만 다시 합치면 더없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중요한 것은 민주노동당 분당사태가 민주노총에까지 영향을 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민주노총이 그동안 정치세력화를 위해 노력했는데, 정치지향점이 조금 다르다고 해서 민주노총마저 분열돼서는 절대 안 된다.”

- 민주노총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비정규직 사업을 제1순위에 놓아야 한다. 사회가 어떤 노동운동을 요구하고 있는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이제 대기업 중심의 운동만으로는 안 된다. 한국노총 조합원을 합쳐도 조직률이 10% 안팎이다. 국민들이 민주노총의 투쟁방식을 식상해 하는 이유는 우리 안에도 빈익빈부익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투쟁을 전면화해야 국민의 지지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특정 정파에 속해 있는 간부들은 환골탈태해야 한다. 현장을 중심에 놓고 가야 한다. 노동운동이 미조직 노동자들에게 희망을 줘야 한다.”

지난 94년 코오롱 구미공장에서 일을 시작한 이 위원장은 2001년에 코오롱노조 대의원이 됐을 때만 해도 자신이 연맹 위원장 자리까지 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고 한다. 그저 경영진 눈에 찍힌 사람을 한직으로 보내는 현실이 ‘더러워’ 노조활동을 시작했을 뿐이라고 했다. 이 위원장은 "당시 노조가 회사측과 너무 가까워 조합원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고, 그래서 대의원을 해서 노조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이 위원장은 고용안정·비정규직 처우개선·신규프로젝트 유치 등을 요구하다 회사에서 해고됐다. 지금 코오롱 구미공장은 ‘팽팽’ 돌아가고 있지만, 그는 아직 해고자 신분이다. 매주 구미에 있는 가족을 만나러 오가는 게 힘들기도 하지만 아이들도 '아빠가 노동자들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것은 안다고 했다. 민주노총 산하 산별조직 대표자 가운데 가장 나이가 적은 이 위원장. 그의 어깨에 화섬연맹의 내부갈등을 수습하고 산별전환을 이뤄야 하는 큰 과제가 놓여 있다.
 
 
<매일노동뉴스> 2008년 2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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