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정기훈 기자
 
 
“처음에 매장을 점거할 때는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어요. 당장 내일이라도 끝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 투쟁에 참가했거든요.”

홈에버 상암동 월드컵 매장에서 일하다가 해고된 이랜드 일반노조 조합원 서은주(38)씨. 그는“마트라는 곳이 연말 성수기를 지나면 비수기가 되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뭔가 강한 투쟁을 하면 해결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며 소강상태에 접어든 연대투쟁과 여론의 무관심을 아쉬워했다.

이랜드와 뉴코아, 코스콤 등 비정규직법 시행에 따라 거리로 내몰린 비정규노동자들의 투쟁이 해를 넘기고 있다. 매년연말이면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 진을 쳤던 천막 농성장은 명동성당, 여의도 증권선물거래소, 가산디지털단지 공장 앞 등 곳곳으로 분산됐다. 해외에서 투쟁하며 새해를 맞는 비정규 노동자들도 있다. 지난해 이미 비정규직법이 통과되고 올해 7월 시행됐다. 게다가 온 국민의 시선이 대선에 집중되면서 국회 앞 농성이 의미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올해는 넘기지 않으려 했는데”

“올해를 넘기지 않으려고 애를 썼는데, 방법이 없더군요.”
 
증권노조 코스콤비정규지부의 김유식(39) 대외협력국장은 코스콤의 사용자성을 인정하면서도 회사측의 업무방해금지가처분 결정을 받아들인 서울남부지방법원 판결에 희망과 좌절을 동시에 느꼈다. 법원은 원청인 코스콤이 비정규 노동자들과 단체교섭에 응할 의무가 있다고 판결했다.

하지만 “회사 사옥 안쪽 점거, 2.5미터 이상의 망루 설치, 직원 등에 대한 출입을 방해하는 행위를 금지한다”고 밝혔다. ‘정규직으로의 직접고용, 노조활동 보장등의 요구에 응할 의무는 없어도 불법은 아니’라는 법원 판결에도, 코스콤측은 교섭 의무가 있는 의제에 한해 대화하겠다는 입장이다.

김 국장은 “힘겹게 농성장을 만들었다”며“어차피 노동자들이 하는 것은 다 불법이라고 하니까 절대 농성장은 옮길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명박이 대통령 되면 노동자들은 지옥이라는데. 컴컴한 암흑 속에서도 빛은 보이지 않을까요? 여의도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우리 싸움이 다른 비정규 노동자들에게 희망을 줬으면 좋겠어요.”

이랜드와 코스콤 비정규 노동자들은 비정규직법의 희생양이 되면서 여론의 주목이라도 받았다. 하지만 이미 2년 전에 불법파견 판정을 받았으면서도 여론 속에 묻힌 비정규 노동자들도 있다.
 
지난 2005년 8월 기륭전자는 위장도급과 불법파견 판정을 받았지만, 회사는 조합원들이 있던 생산라인은 합법 도급화시키고 비조합원 라인만 직접 생산공정으로 바꿨다.

그동안 회사 주인도 세 번이나 바뀌었고 2005년 시작한 투쟁이 햇수로는 4년째가 되고 있다. 최근 바뀐 회사대표가 만나자고 해서 지난 20일 면담을 진행했으니 한줄기 희망은 생긴 셈이다.
 
김소연 분회장은“투쟁한지 오래돼서 어려운건 사실”이라며“올해를 넘기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지만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우리 투쟁이 여론에 묻혔다고도 볼 수 있지만, 이랜드나 코스콤 투쟁으로 비정규직 문제가 쟁점이 되어서 다행입니다. 경영진이 대화하자는 의사는 밝혔으니 우리도 다시 강하게 투쟁해야지요.”
 
여의도 증권선물거래소 앞에서 농성중인 코스콤비정규지부. 사진=정기훈 기자

오죽하면 해외 원정투쟁 나섰을까

해외에서 원정투쟁을 하며 새해를 맞이하게 되는 비정규 노동자들도 있다. 귀국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결판을 내고 오고 싶다”는 게 그들의 희망이다.

채희진 화학섬유노조 우진산업지회장을 포함한 3명은 지난 9월5일 프랑스로 출국해 다국적기업인 라파즈를 상대로 투쟁하고 있다.

시멘트업체인 라파즈한라 사내하청 기업 우진산업은 노조원들이 화학섬유노조에 가입하자 한 달만에 폐업신고를 냈다. 노조는 1년2개월 뒤인 올해 5월28일 라파즈한라시멘트로부터‘조합원 고용보장을 위해 노력한다’는 합의를 이끌어냈지만 복직은 계속 미뤄졌다. 참다못해 라파즈한라시멘트의 모기업인 라파즈 본사를찾아 프랑스 파리로 떠난 것이다.

당초 11월 말에 돌아오기로 했지만 최 지회장 등은 귀국을 계속 미루고 있다. 단식농성을 포함해 국내에서 안 해 본 게 없는그들에게 돌아온다고 해서 희망이 별다르게 보이는 것도 아니다. 이동익 화학섬유연맹 사무처장은“원정투쟁단은 비자가 만료됐는데도 승부를 걸고 싶다면서 그곳에 계속 남아 있기를 원한다”고 전했다.

특고법과 함께 특고노동자도 내년까지
 
특수고용직법이 내년으로 국회처리가 넘어간 것처럼 특수고용노동자들도 어김없이 새해 투쟁을 맞고 있다.

운송료 인상과 화물연대 활동 보장을 요구하며 10월15일 전면파업을 시작해, 고철환씨가 분신하는 사태까지 겪었던 화물연대 서울우유지회는 안산 서울우유공장 앞에서 계속 농성 중이다. 한때 300명이었던 파업 참가 조합원들은 15명으로 줄었고, 서울우유측은 화물연대라는 단체와의 교섭을 한사코 거부하고 있다.

이보다 앞서 9월16일 먼저 파업에 돌입한 SK분회도 화물연대를 인정할 수 없다는 운송업체의 입장에 가로막혀 해를 넘겨 투쟁하게 됐다.

학습지노동자의 외로운 복직투쟁도 새해를 맞고 있다. 지난 3월 노조 대의원 후보에 출마한 뒤 실적 부진을 이유로 계약해지된 한솔교육의 김진찬(30)씨. 서울 공덕동 한솔 본사 앞에서 승합차를 집 삼아 투쟁한지 9개월이다. 새해에 복직할 수 있다는 희망은 보
일듯 말듯 손에 잡히지 않는다.

지난 17일 중노위 심판회의에서 회사측이“합의의사가 있다”고 말해 이달까지 심판결과 공지는 보류됐다. 하지만 그 뒤로 별다른 연락이 없다.

“날씨가 추워지니 함께 농성하는 동지들 건강이 가장 걱정됩니다. 새해에는 복직은 물론이고, 특수고용노동자들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법안이 통과됐으면 좋겠어요.”
 
<매일노동뉴스> 2007년 12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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