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대 대통령선거가 진행된 지난 19일 오후 1시께 경기도 광명시 한 재건축 아파트 건설현장.

철근 더미를 어깨에 메고 걸어가던 한 노동자는 "투표 했냐"는 질문에 "새벽 6시부터 일하느라 못했는데, 오후 3시인가 4시에 마친다고 하더라"며 "끝나고 할 것"이라고 말했다. 투표날이라서 평소보다 일찍 일을 끝내기로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공사장 입구에서 레미콘 차량 유도를 하고 있던 김아무개(38)씨는 "말만 그렇지, 가봐야 안다"며 포기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건설현장, 업무단축은 공염불

"건설 일이라는 게 어디 말한 대로 되나요. 일이 돼가는 거 보니 빨라봐야 5시에 끝나겠는데. 5시에 끝나도 집에 가서 씻고 하다보면 투표 못할 거 같은데요. 이거 쉬면 일이 안되요. 시공 기간이 있는데. 다 알면서 뭘 그런 걸 물어요?"

김씨는 공사장 입구에 서서 이제 막 건물 뼈대에 콘크리트를 입힌 공사 현장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평소 시공사에서 나온 소장과 건축기사들 자가용으로 꽉차 있던 공사장 주차장은 텅 비어 있었다. "쉬려면 다 쉬게 하든지 말야. 소장하고 기사들은 오늘 거의 안 나왔어요."

20대 초반에 한 번 투표 해보고 한번도 못해봤다는 김씨는 "이명박이는 건설 일도 해봤다면서 우리한테 해 주는 거는 아무것도 없네"라며 레미콘 차량 유도를 다시 시작했다.

하루벌어 하루먹고 사는 일용직 건설노동자들은 이번 대선에서도 먹고 살기 위해 권리를 포기했다. 김씨 말대로 이미 "다 아는 사실"이다.

학습지 교사 노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D 학습지회사 충남지역에서 교사로 일하는 안아무개(43)씨는 이번 대선에서 투표 못한 것을 생각하면 분통이 터진다.

"동료가 지점 국장한테 쉬어야 하는거 아니냐고 몇 번을 물어도 대꾸도 안했어요. 그래서 평소처럼 출장을 나가느니 했는데. 투표 전날에야 다른 지점에는 교재가 일주일 전에 미리 나가 다 쉬기로 한 사실을 알게 됐지 뭐예요."

화가 머리끝까지 난 안씨는 본사에 전화를 걸어 항의했다. 그 결과 "각 지역본부에 공문을 보내 대통령선거 날 수업은 그 전 주에 미리 끝내라고 지시했다"는 대답을 들었다. 본사 차원에서 교사들에게 투표권을 주는 것으로 방침을 정했는데도 안씨가 속한 지점은 모른체 한 것이다.

안씨는 "태어나서 대통령과 지자체 선거에서 한 번도 투표해 본 적이 없다"며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이번 대선을 앞두고 전국학습지노조(위원장 이현숙)는 "투표권을 보장해 달라"며 각 회사 앞 1인 시위를 벌였다. 노조는 또 공문을 보내 "대선 날 수업교재를 일주일 전에 미리 보내 수업을 진행할 것"을 요구했다.
 
본사 투표권 보장방침도 안먹혀

노조 요구를 대부분 학습지 회사가 받아들였지만 D사의 경우처럼 각 지역본부나 지점에서 모른체 넘어가는 사례가 발견됐다. D사에서는 안씨가 속한 충남지역 일부 지점 외에 강원도 동해지점에서도 비슷한 일이 발생한 것으로 파악됐다.

이처럼 드러난 사례는 일부에 불과하지만 이번 대선에서도 건설일용직, 중소영세사업장 비정규직, 유통서비스 비정규직, 학습지교사 등 상당수는 투표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노동부는 대선 전 “근로자가 공민권 행사에 필요한 시간을 청구할 경우 사용자가 거부하지 못하도록 근로기준법(10조)에서는 규정하고 있다”며 이를 어긴 사업주에 대한 처벌규정도 밝혔다. 하지만 고용이 불안한 비정규직 당사자들이 사업주 눈치를 보지 않고 신고하기는 쉽지 않다.

노동부 근로기준팀 관계자는 "각 지방관서에 신고된 사례를 집계하지는 않았지만 소수에 불과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용자가 투표권 행사요구를 거절하거나 투표행위에 따른 급여피해 사례 등을 직접 신고 받은 민주노총 울산본부에도 접수된 사건은 단 한 건 뿐이다.

비정규직 차별해소와 일자리창출 약속을 쏟아냈던 이번 대선이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공약 판단을 행사할 기회마저 없었다. 비정규 노동자들의 투표권 보장을 요구한 후보는 권영길 민주노동당 후보와 금민 한국사회당 후보에 불과했다.
 
비정규직 860만명 투표권 상실

민주노총이 14일부터 18일까지 서울지역을 순회하며 비정규직 참정권 보장을 요구했지만 작은 목소리에 불과했다.

이번 대선에서 총 유권자수는 3천765만3천518명. 정부 통계에 따른 비정규직 규모가 570만3천명이고,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장 통계로는 861만명이다.

모든 비정규 노동자들이 투표에 참가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제도상으로는 전체 유권자의 15%에서 23% 정도의 권리를 제대로 보장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제도개선 없이는 내년 4월 총선에서 나타날 현상도 불을 보듯 뻔하다.

때문에 민주노총 등 노동계는 내년 총선 이전에 선거일을 유급공휴일로 지정하는 내용 등을 담은 법안을 국회에 청원한다는 계획이다.
 
"비정규직 참정권 보장법안 통과돼야"
선거일 유급휴일 방안 부각, 구체적인 법안 준비는 더뎌
민주노총 등이 비정규직의 참정권을 보장하기 위한 법안을 내년 총선 이전에 의원입법 발의한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어떤 법안을 개정해 어떤 내용을 담을 지는 구체화되지 않고 있다.
 

현재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사용자는 투표 시간을 보장하는 노동자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도록 돼 있다.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마찬가지다. 또 투표행위에 따른 급여 상의 불이익도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당사자들의 신고가 필요하기 때문에 유급휴일 주장이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하루 일당을 받게 돼 있는 일용직은 좀 다르다. 투표를 위해 잠깐 시간을 낼 수는 있지만, 투표를 위해 하루를 쉬어 하루 일당을 못 받아도 법적 보호장치는 없다.
 

이번 대선에서 민주노총 울산본부에 신고된 사례가 이런 경우다. 일당을 받고 있는 울산 지역 초중등학교 비정규직노동자들이 학교가 문을 열지 않으면서 투표는 했지만 하루 일당은 날아간 것이다.
 

법적으로 사용자를 처벌할 수 있는 근거는 없지만, 공민권행사 자체가 임금보장에 대한 위협으로 다가온 사례다.
 

따라서 근로기준법에서 선거일을 유급휴일로 명시하는 것으로 일정 정도 보완이 가능하지만, 일용직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보다 구체적인 방안이 필요하다. 작업장 현장에서의 거소투표 보장 등도 방안이지만 건설 등 일부 업종에서만 가능하다. 울산본부 신고사례처럼 수업도 없는 학교현장에 적용할 수 있는 방안은 아니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솔직히 일용직 노동자의 급여 피해 등에 대해서는 고민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매일노동뉴스> 2007년 12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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