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에 해버릴까, 내년 주총 때까지 참을까? ” 사장단과 임원 인사 시기를 놓고 재벌그룹들이 한창 눈치보기를 하고 있다. 재벌그룹들은 관례적으로 연말 연초에 그룹 임원인사를 해왔지만 주총을 무시한 총수의 인사전횡이라는 소액주주들과 정부의 비판을 의식해 이번에는 내년 2~3월주총 때로 미루는 듯했다.

그런데 에스케이그룹이 임원인사를 단행했고 이에 대한 별다른 비판의 목소리도 나오지 않자, 다른 그룹들도 여론의 추이를 저울질하며 다시 인사 시기를 앞당기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지난달 이후 삼성, 엘지 등 주요 그룹들은 연말을 전후로 그룹에서 일괄 발표해온 사장단 및 임원 인사를 이번에는 각 계열사별로 내년 2~3월 주총에 맞춰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에스케이가 예상을 깨고 이달 들어 사장단을 포함한계열사 임원 인사를 확정지으면서 분위기가 급변하고 있다.

에스케이는 지난 1일 건설을 시작으로, 5일 글로벌, 8일 에스케이㈜, 13일 텔레콤 등 주력사별로 잇달아 이사회를 열고 주력 3사의 사장을 모두 교체하는 큰 폭의 임원인사를 했다. 에스케이는 “이번 임원인사는 확정된 것이 아니고, 내정단계로 이해해 달라”고 특별 주문하기도 했다.

주총 승인을 받아야하는 대표이사 등 등기이사의 선임을 이사회에서 사전 결정한 것이 법적으로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음을 의식한 대목이다. 하지만 새로 기용된 대표이사 사장이나 임원들이 바로 일을 시작한다는 점에서 에스케이의 변명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다른 재벌그룹들은 에스케이의 `과감한' 인사에 대해 처음에는 `무모한 짓'이라며 우려하는 모습이더니, 비판 여론이 그리 높지 않자 `원님 덕에 나팔부는' 격으로 “그러면 우리도…”하며 반기는 분위기다.

내년 3월로 인사시기를 잡았던 삼성그룹의 고위 관계자는 “경영상 필요성 때문에 여론만 괜찮다면 임원인사 시기가 1월 말이나 2월 초로 앞당겨질 수 있다”며 애드벌룬을 띄웠다.

일부 그룹은 임원 승진자와 보직 이동자를 내정해 내년 1월 초부터 자리 이동을 하고 발표만 주총에 맞춰 하려는 편법까지 동원하고 있는 실정이다.

ㅇ그룹의 한계열사 간부는 “발표는 안했지만 이미 회사 안에 임원 인사 내용이 파다하게 퍼져있고, 1월부터는 새 사람들이 새 자리에서 일을 시작할 예정”이라며“공식발표는 내년 2~3월에 한다고 하지만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재벌그룹들이 연말께 사장단을 포함한 임원 인사를 그룹 회장실에서 일괄적으로 발표해온 관행은 총수 1인이 수십개 계열사의 주요 의사결정과 핵심인사를 좌지우지하는 `황제경영'의 대표적 사례로 지적돼왔다. 특히 소액주주운동이 활성화되면서 일부 그룹은 올초 주총에서 사전 임원인사 문제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정부도 재벌그룹들의 이런 인사 관행에 부정적이다. 과거 총수 회장실이나 비서실에서 이름만 바꾼 그룹 구조조정본부가 총수의 뜻에 따라 임원인사를 좌지우지하는 한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기업지배구조 개혁작업도 실효를 거두기 어렵기 때문이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주총과 주주의 뜻은 철저히 무시한 채 재벌 총수가 인사를 좌우하는 관행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고 말했다.

소액주주운동을 주도해 온 참여연대 경제정의위원장인 장하성 교수(고려대)도“주총승인을 받아야 하는 대표이사 같은 등기이사를 미리 임명하고, 이들이 실제 경영을 하는 것은 잘못”이라며 “내년 주총 때 시시비비를 가릴 것”이라고 말했다.

재계는 경영현실상 사장단 및 임원 인사를 주총 때로 늦추는 것은 어려움이 많다고 말한다. 엘지그룹의 한 임원은 “대부분 기업들의 회계연도가 12월 말로 끝나기 때문에 결산성적에 따라 연말에 임원인사를 하고, 새해 경영계획을 확정지은 뒤 내년 1월부터는 새 진용으로 사업을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임원인사를 미룰 경우 자칫 두세달 동안 업무공백 사태가 빚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주총승인을 받아야 하는 등기이사 인사는 주총 때로 미루고, 주총 승인이 필요없는 나머지 집행이사들 인사만 연말 연초에 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지만 이 역시 쉽지 않다는 설명이다. 최고경영진의 진퇴 문제가 유동적인 상황에서는 그 밑의 임원들이 내년도 경영계획 수립과 업무처리를 정상적으로 진행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재계의 이런 하소연에 대해 설득력이 없다며 비판하는 목소리도 많다. 전경련의 한 임원은 “선진국 기업들이 모두 주총에 맞춰 인사를 하는 것에 비춰볼 때 기업들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면서 “이제는 우리 기업들도 잘못된 관행을 고쳐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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