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캄캄한 무대.

동그란 조명이 모여 있는 이들을 하나하나 비추지만 침묵은 죽음처럼 무겁다. 마지막 춤을 출 그이를 찾은 여인의 얼굴엔 초조함이 가득하지만 그이는 나타나지 않는다.
침묵이 체념으로 바뀌는 순간, 찬찬히 문이 열리고, 조명은 문을 열고 들어선, 그이를 비춘다. 순간, 여인의 얼굴엔 미소가 번지고, 그이에게 다가가 손을 내민다.
“쉘 위 댄스?”

부의 축적, 노동자의 저항

지난 97년 개봉된 일본 영화 <쉘 위 댄스>의 마지막 장면이다.
신은종 단국대 교수(경영학부)가 ‘노사관계 200년 역사기행’이란 부제를 단 저작의 제목을 <쉘 위 댄스>(사진·생능출판사)로 정한 것은 왜일까.

“아름다운 춤은 신뢰의 선물이다. 파트너들이 서로 신뢰하지 않으면 춤의 아름다움은 생산되지 않는다. 그러나 춤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신뢰는 춤이 갖는 고유의 규칙에 대한 믿음이다.”

규칙에 대한 믿음. 노와 사는 세계화 시대라는 새로운 규칙에 맞춰 새로운 춤사위를 보여야 할 때라는 게 신 교수의 믿음이다.

1820~1870년 저항의 시대. <쉘 위 댄스>는 산업혁명의 완성기인 1820년대부터 출발한다.철도상용화 이후 신흥자본가가 등장하면서 부는 축적됐지만 이는 낮은 임금과 장시간 노동을 강요하면서 가능했다. 노동자는 러다이트라는 기계파괴로 저항했지만 산발적이었을 뿐 조직적이지 못했다.

1870~1910년 조직의 시대. 경쟁자본주의가 독점자본주의로 전환되면서 노동자의 산발적 저항은 조직노동으로 성장한다. 산별노조가 결성되고 저임금 장시간 노동 개선투쟁에 나섰다. 또한 자본주의에 내재된 불평등에 눈뜨면서 정치투쟁도 벌였다.

교섭주의 노사관계 부흥과 몰락

1910~1050 혼돈의 시대. 두 차례의 전쟁과 유례없는 공황을 거치는 동안 노동조합은 명분보다는 실리를 선택했다. 제한적으로나마 노동기본권이 신장됐지만 자본주의의 근본적 개혁보다는 실현가능한 실리를 선택했고 노동운동은 상층과 하층의 괴리를 가져왔다.

1950~1960 타협의 시대.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자본주의는 황금기를 구가한다. 대량생산을 위한 포드주의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타협’이라는 규칙을 갖는 ‘교섭주의 노사관계’가 만들어졌다. 교섭 뒤엔 반드시 임금과 복지가 뒤따랐지만 이면에서는 ‘노동의 소외’가 자리잡고 있었다.

1970~1980 위기의 시대. 석유위기로 촉발된 위기는 포드주의 자본주의를 빠르게 해체시켰다. 대량생산, 대량고용 체제가 무너졌고 노동조합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 시기 영국은 ‘불만의 겨울’을 나면서 79년 대처정부가 들어섰고 노동조합은 암흑의 시기를 맞았다. 하지만 지구 반대편 일본은 같은 시기 약진을 거듭하고 있었다. ‘노동자의 경영참여’라는 생소한 가치를 발견했지만 노동자에게는 어떤 것도 보장되지 않는 어설픈 타협이었다.

1980~현재 유연성의 시대. 세계화 시대가 개막됐다. 무역장벽 제거는 물론 상품, 자본, 기술의 이동이 자유로워진 세계화로 인해 경쟁이 심화되면서 기업은 유연화 전략을 선택한다. 세계화 시대는 노동의 위기를 더욱 심화시켰으며 교섭주의 노사관계와 불협화음을 이뤄왔다. 이것이 오늘날의 노사관계 현주소다.

세계화 시대 ‘비대칭 균형’ 노사관계

<쉘 위 댄스>는 노사관계 역사에 대한 ‘해석적 기술서’다. 교수는 “지금의 노사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노사관계’를 이해해야 하며 그 논리는 ‘앞으로 노사관계가 어떻게 변화해갈 것인가’를 전망할 수 있도록 해 준다”는 게 신 교수가 펜을 든 이유다.

그가 제시하는 세계화 시대의 노사관계는 ‘비대칭 균형’의 노사관계다. 유연성의 시대를 살고 있는 노와 사는 힘의 관계에서 비대칭적이지만 이것이 노동조합의 완전한 몰락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본주의가 지속되는 한 노동조합의 힘도 지속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연성은 ‘양날의 칼’과 같다. 생존을 위해 필요하지만 공멸에 이를 수도 있게 한다.

“비대칭 균형을 위해서는 노와 사 모두 자신의 역할을 새로이 해야 한다. 경영은 힘의 우위를 노동에 대한 절대적 지배로 몰고 가선 안 된다. 노동조합은 미래에 대한 새로운 청사진을 제시하는 사회제도로 거듭나야 한다. 시대가 요구하는 변화된 역할을 받아들인다면 노와 사는 새로운 타협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공존을 위한 동맹인 ‘생산성동맹’일 것이다.”
 
 
<매일노동뉴스> 2007년 3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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