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우는 지나갔다. 순풍이 불고 배는 어느새 안정을 되찾은 모양새다. 그러나 한편에서 선원들의 불안한 마음은 여전히 가시지 않고 있다. 폭풍우를 지난 온 배가 100여년을 지나온 항로를 벗어나 닿아본 적 없는 미지의 곳을 향했기 때문이다. 순풍에 순항만이 이어질 것이라고는 예상하진 않지만, 또 다시 닥칠지 모를 폭풍우를 이기고 배를 나아가게 하는 것은 순전히 배를 이끄는 자들의 몫이다.
부산항운노조가 꼭 그렇다. 부산항운노조는 지난 2005년 12월 ‘항만노무공급체계 개편을 위한 지원특별법’이 제정된 이후 올해 1월1일부터 항만노무인력에 대한 상용화를 처음으로 도입해 실시하고 있다. 100여년 간 유지해 온 노무공급권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지난 2005년 2월 부산항운노조 내의 채용비리가 항운조직을 강타한 이후 2년만이다.
물론 선택은 부산항운노조 집행부가 아닌 조합원 스스로가 했다. 지난해 7월 구성된 노사정 협상기구인 ‘항만인력공급체계 개편위원회’가 내놓은 합의안에 대한 찬반투표에서 상용화 대상인 조합원 중 77.1%가 찬성표를 던졌다. 지난해 12월17일 진행된 투표에서, 대상자 1,022명 중 1,000명의 조합원이 투표에 참가, 777명이 상용직 전환에 동의를 한 것이다. 이렇게 전환된 곳이 구(예전)항인 북항 중앙부두와 3부두, 4부두, 7-1부두, 감천항 중앙부두 등 5곳이다. 부산항운노조는 왜 상용직 전환을 먼저 받아들였는지, 상용직 전환 이후 어떤 변화들이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지난 19일 부산항운노조를 찾았다.
노무공급권 포기, 상용화 지원법까지
부산항운노조는 지난 2005년 2월 채용비리 사건으로 전현직 위원장이 잇따라 구속되는 등 조직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그리고 한 달 후인 같은 해 3월 노조는 비리의 근원으로 지적된 노조의 독점적 노무공급권을 포기하겠다 선언했다. 더불어 상용화에 대한 조합원 사이에 찬반논란도 일었다. 그럼에도 부산항만의 상용직 전환은 예상보다는 순조롭게 진행돼 왔다.
부산항운노조는 자체 혁신에 나서기도 했다. 선거제도를 조합원 직선제로 바꾸고 같은 해 6월 조영탁 현 위원장을 첫 직선위원장으로 선출했다. 새 선장을 뽑은 부산항운노조는 조직 안팎의 어려움을 수습하면서, 이후 상용직 전환에 대한 협상에 나선다.
정부는 항운노조에 비리사건이 터진 4개월 후인 지난 2005년 6월 ‘항만노무공급체계 개편을 위한 지원특별법’을 발의한 후, 국회와 노동계의 찬반 논란이 뒤섞인 가운데 그해 12월 국회에서 이를 통과시키는데 성공했다. 특별법은 ‘항만생산성 향상을 위해 항만인력공급체제를 개편함에 있어서 항운노조 조합원에 대한 효과적인 지원대책을 강구함으로써 항운노조 조합원들의 고용안정과 복지증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쉽게 말해 항운노조가 노무공급권을 갖고 도급제로 운영하던 항만인력을 하역기업별 상시고용제로 전환하는 대신, 조합원들의 권익을 보장하겠다는 뜻이다. 물론 이에 따르는 필요한 방안을 마련하지 않은 항만운송사업자는 항만시설 임대계약 해지 등 대통령령이 정하는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명시해 놓았다.
구체적인 협의는 지방해양수산청별로 구성토록 특별법에 명시한 ‘항만인력 공급체제개편위원회’에서 진행키로 돼 있다. 이렇게 해서 부산에서는 부산해양수산청 주도하에 지난해 7월노사정 대표 10명이 참가하는 개편위원회가 구성됐다.
개편위원회는 이어 같은 해 11월 항만인력공급체제 개편을 위한 최종합의문을 도출하기에 이른다. 합의문에서는 운영회사는 희망퇴직자를 제외한 전체 인원을 상시 고용하고, 해당 운영사의 규정과 상관없이 이들 모두에게 고용보장, 임금·복지 향상 등을 약속했다.<박스기사 1 참조>
고용보장, 임금·복지 향상에 기대 높아
이 같은 과정 끝에 2007년 1월1일 부산항운노조에서 처음으로 항만노무인력에 대한 하역회사별 상시고용제가 실시됐다. 인력공급제도가 바꾼 지 20여일이 지났지만 현재로선 특별히 변한 것은 없다. 작업장, 작업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기로 해 표면적으로는 일하는 곳도, 일하는 방식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기 때문이다.
다만 상용직 전환과정에서 예상보다 많은 297명의 조합원들이 희망퇴직을 신청했다. 노사정은 약 10%를 예상했으나 이는 전체 인원 1,022명 중 29.1%에 이르는 수치다. 때문에 현재 5개 부두에서는 858명의 조합원들만이 남아 일을 하고 있다. 희망퇴직자들에게는 정부에서 250억원이 지원돼, 개인당 평균 8천5백만원의 생계안정지원금이 지급됐다.
북항 3부두에서 작업반장을 맡았던 최경훈(35세)씨는 상용화 이후 조합원들의 심리상태에 대해 “기대 반, 우려 반”이라고 표현했다. 고용보장과 임금안정이 확실하고, 도급제에서 상용직으로 고용되면서 오히려 직장은 안정됐기 때문에 기대가 크다. 특히 도급제 하에서는 물동량이 많은 달에는 일도 많이 하고 돈도 많이 벌지만, 물동량이 적은 달에는 쉬는 날도 많고 수입도 적어져 생활의 안정성이 없었다는 것이다. 더불어 도급제는 근로의 자유는 주어졌지만, 역으로 그것은 직장(고용)에 대한 불안감을 항시 내포하고 있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아직 첫 달 월급봉투를 만져보진 못했지만, 상용직으로 고용된 이후로는 작업량도 도급제보다는 평균화되고 임금도 안정적으로 받을 수 있다.
그는 상용직 전환 이후 변화된 것이 없냐는 질문에 “도급제였을 때는 일을 많이 가져오는 것이 작업반장의 능력이었고 일을 많이 할수록 노임을 더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조합원들이 더 좋아했다”며 “그러나 상용직으로 전환된 이후로는 일이 적은 것을 좋아한다”라며 우스개 소리를 한다. 그만큼 아직까지 구체적인 변화를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상용직으로 전환하는 노사정 약속이 잘 이행돼 조합원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하기도 했다. 물론 그는 지난 2005년 채용 비리사태 이후 새롭게 집행부에 합류해, 이 약속이 잘 이행대도록 지켜나가야 할 노조간부 중에 한명이다.
신항 개장, 기계화로 밀려나는 구항
부산항운노조가 상용직 전환을 받아들인 것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채용 비리문제가 집중적으로 제기되면서 노무공급권을 갖고 있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는 지적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이는 상황을 급반전시킨 이유 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조합원의 77%가 상용화에 찬성한 이유는 보다 다른 것에 있다는 것이 부산항운노조의 설명이다.
부산에는 신항이 들어서고 있다. 부산 신항은 지난해 1월 최초로 3선석(배를 댈 수 있는 장소)을 개장한데 이어 올 1월에도 3선석을 추가 개장했다. 앞으로도 오는 2008년 말 18선석이 개장하는데 이어 2015년까지 총 30선석이 단계별로 개발된다. 신항은 기존 부산항과는 달리 최신식 시설로 무장돼 있다. 뿐만 아니라 배후물류단지 및 배후교통망을 상호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는 항만클러스터화를 통해 항만경쟁력 확보에 나서고 있다.
그것이 구항인 북항에서 일하고 있는 하역노동자들의 고용불안감을 가속시키고 있었다. 북항은 아직까지 노무인력이 중심이 돼 하역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신항 개발에 따른 북항 재개발 사업 추진도 진행될 예정이다. 신항에 물동량이 빼앗기고, 북항 재개발마저 추진된다면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갈 곳을 잃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용화 추진 과정에서 이들의 고용보장을 노사정이 약속했다. 정년 만60세 보장은 물론 북항 재개발 시 이곳에서 일하던 하역노무자들을 신항에서 일할 수 있게 승계하겠다는 내용이다. 그것은 부산항운노조 나름의 성과기도 했다. 때문에 부산항운노조는 이같은 성과가 상용직 전환에 가장 큰 이유가 됐다고 평가한다.
끝나지 않은 항해…노사정의 선택은?
부산항운노조의 설명대로 라면 현재로선 상용화를 통해 조합원이 얻은 실익은 기대 이상이라 할 수 있다. 이대로 제도가 잘 정착된다면 항만노동자와 부산항운노조는 새로운 미래를 개척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조합원들을 불안하다. 그것은 변화 자체의 두려움이지만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탓이다.
정부는 특별법에서 상용화 대상을 항만하역노동자로만 한정했다. 검찰의 사정으로 노조의 인력공급권은 비리의 근본원인으로 지적돼 항만 하역노동자의 상용화는 이제 막 시작단계에 들어섰다.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다. 앞으로 노사정협의회를 통해 임금과 단체협약을 새로 결정해야 한다. 노무공급 독점권을 가졌던 부산항운노조나 하역회사 입장에서 보면 새로운 길로 들어선 것이다. 또 상용화가 하역 노동자의 고용을 보장하는 완전한 안전장치라 할 수도 없다. 정부가 항만 구조조정 차원에서 하역노동자들의 상용화를 추진한 만큼 미래를 보장받은 것은 아니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해양수산부는 하역 노동자의 상용화 이후 항만의 세계적 경쟁력 확보, 경영의 합리화, 효율화, 인력감축 등의 발언을 공개적으로 하고 있어 이러한 의견을 뒷받침하고 있다. <박스기사2 참조>
그러나 노조는 상용화 추진 과정에서 ‘항만 특별법’과 ‘부산항만 노사정 합의서’라는 나침판과 육분의를 얻었다. 그 두 가지 항해 도구를 통해 바른 항로를 설정하고 미래를 개척하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있다. 그 뒤에는 9천여명의 조합원들이 버티고 있다.
상용화는 이제 시작이다. 올 1년, 다시 노사정은 구체적인 협상들을 지속해 나가야 한다. 노사정이 어떤 모습의 제도를 만들어갈지, 또 그 안에서 부산항운노조는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 항해는 끝나지 않았다. 긴장감을 늦추지 말고 지켜봐야 할 대목이다.
◇ 부산항 노무인력 상용화 일지
2005년 2월 검찰 부산항운노조 채용비리 전면수사 돌입
2005년 3월 부산항운노조 독점적 노무공급권 포기 선언
2005년 4월 해양수산부 노무공급체계 개선 기본계획안 수립
2005년 6월 조영탁 위원장 등 노조간부 직선 선출
2005년 6월 항만노무공급체계 개편을 위한 지원특별법 발의
2005년 12월 항만노무공급체계 개편을 위한 지원특별법 국회 통과
2006년 7월 노사정 협상기구 ‘항만인력공급체계 개편위원회’ 출범
2006년 11월 상용화 협상 최종합의문 도출
2006년 12월 조합원 투표 77% 찬성으로 상용화 가결
2007년 1월 부산항 하역회사별 상시고용제 도입
|
|
|
매일노동뉴스 <2007년 1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