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이 넘는 긴 투쟁에도 허물어지지 않고 싸워왔던 시그네틱스 노동자들이 대법원에서 복직 판결을 받았다. 비록 노조간부들은 제외된 반쪽의 성과이지만, 시그네틱스 노동자들의 승리는 이제부터다. 5년 전 시그네틱스 노동자들이 투쟁을 시작할 때, 당시 금속연맹 부위원장으로서 투쟁에 함께 했던 이석행 전 민주노총 사무총장이 축하와 감사, 그리고 연대의 편지를 보내왔다. <편집자 주>

 

며칠 전부터 강하게 압박으로 밀려오는 시간이 이제 밤을 세울 여유조차 없습니다.
콩닥거리는 심장은 터질듯 끓어오르고 목젖은 이미 타들어 갈 대로 타들어 갔습니다.
발은 둥둥 진공 상태로 떠 있고 마음은 초점을 잃은 채 우왕좌왕 갈피를 잡지못하고 있습니다.
나는 며칠 전 이러한 나의 상태를 매어둘 끈과 기둥이 필요하다 판단되어
춥고 고독한 겨울날 더한 마음고생을 하고 있을
민주노총 허영구 부위원장과 박민 비정규국장을
영등포구치소로 몇몇동지들과 가족들과 만나러 가기로 예정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이토록 심장이 멈추는 듯한 가슴졸임을 해야 했던 이유는
5년 전의 악몽에 씨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시그 동지들, 동지들도 다 잘 아시는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5년여 긴 시간 동안 자본인수라는 미명 아래 구조조정의 명분으로 집단해고를 당했고,
전술이라는 전술을 다 구사하고 동원시켜 투쟁했던 삼미특수강고용특위 동지들이 생각났기에,
나는 대법원에 갈 수도 없었고,
그 시간 동안 더 더욱 피를 말리고 있었습니다.

2001년 7월 27일,
길고도 치열했던 삼특 동지들의 대법원 판결을 받는 날이었지요.
고등법원까지 승소했던 터라 승리에 대해 조금도 의심치 아니하고,
대법원에 모였던 우리들은 환한 기대감으로 승소 판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판결 배정이 맨 끝으로 되어 있어 조금은 뜨아 했지만 별다른 생각은 없었지요.
그러나 판결문을 읽어가는 대법관의 떨리는 목소리를.
우리들을 한없는 나락으로 빠져들게 만든 절망의 비수를.
삼특 동지들과 함께 해 온 노동자,
그리고 수많은 민주양심의 가슴과 가슴에 꼽았던 악령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항고를 기각하고 원심을 파기 환송한다."
망치 놓기 바쁘게 항변할 시차도 주지 아니하고 도망치듯 꽁무니를 빼던 대법관들….
그때 나는 금속산업연맹 부위원장으로 부당노동행위대책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삼미특수강 투쟁을 책임지고 있었으며,
또한 구조조정투쟁을 막 시작했던 한국시그네틱스노동조합에 결합하여
교섭대표로 함께 동고동락할 즈음이었지요.

당시 시그네틱스 동지들도 크나큰 충격을 받았었지요.
함께 결합하여 싸워가면서 삼특 동지들의 투쟁을 타산지석으로 삼아가려 했던
시그 동지들이었기에 동지들도 한때 실망감으로 눈빛이 크게 달라졌었지요.
제가 거의 일주일 동안 공동의 상태로 무기력증에 절망감으로 헤메였던 것,
동지들은 잘 아실 겁니다.
그런 나를 오히려 따듯하게 위로하고,
한편으로 함께 투쟁해서 새로운 승리를 안아오자고 당차게 요구하던,
시그네틱스 동지들, 아마 그들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

사랑하는 시그네틱스 조합원 동지 여러분!
2006년 12월 22일 오후 14시30분, 이 숙명의 순간이 시그 동지들에게 또 왔습니다.
5년전 삼미특수강 동지들과 거의 같은 운명에 놓이게 되었단 말입니다.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동지들의 얼굴 속에서
환했던 모습에서 일그러진 모습들이 스쳐갑니다.

나와 처음 만났을 때 늘 동지들은 깔개방석을 커다랗게 만들어 가지고 다녔지요.
이상히 여겨 물어 봤더니 투쟁중 사진을 찍히지 않기 위해 얼굴가림용이라 했었지요.
임금을 삭감하고 상여금을 양보하고 복지를 축소하여 아이엠에프를 극복하고
경기도 파주에 최신설비와 멋진 공장을 노사가 함께 지었다, 확신으로 주장했지요.
그곳에서 일을 할 수 있다는 확신과 긍지감을 갖고 열심히 일했건만
이미 그곳은 1,200여명의 비정규직과 사내하청으로 꽉 채워놓고 우린 갈 곳이 없다고
분노하던 동지들의 절규가 지금도 귀에 생생합니다.
공장이 완성되기 전부터 전공장 비정규직화를 위한 시나리오대로
정규직 조합원 희망퇴직이라는 자율을 빙자한 강제퇴직으로
어느덧 2천여명을 넘나들던 조합원이 400여명으로 줄어들었고,
남아 있는 동지들마저 토사구팽의 위기로 내몰려 있다고 절규하던 동지들.
자본은 타율적 강제적 희망퇴직으로 동지들을 내몰다 그 한계를 느끼자
이제는 공공연하게 설비를 빼어내기 시작할 즈음 내가 그곳으로 가게 되었지요.

어디서부터 어떻해야 할지 몰랐지만 조합원들의 절규을 모으고
우선 70년대 여성노동자 선배님들(박순희 최순영 이총각등) 모시고
사례를 중심으로 한 조합원 교육을 하면서 간부들과 밤샘 토론을 하면서
가닥을 잡아갔었던 2001년이었지요.
어려울수록 답은 현장에 있음을 동지들과 함께 실천하면서….

2001년 그해 여름 폭우에 농성텐트가 무너지면 몸으로 받치면서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고
구사대의 침탈에 대비해서 신나를 가장한 저항물품을 공장에 배치해놓고
영풍그룹 타격투쟁으로 영풍문고에 젓갈 살포투쟁,
영풍 본사 점거하여 벌이던 낙서투쟁,
국민혈세 무제한으로 낭비하던 산업은행 본점 그리고 강남전 여의도점에
떼지어 줄서서 창구마다 1,000원 저축하고 십원찾기투쟁.
2001년 8월 9일, 통트는 새벽 무렵 50여명의 당직 여성노동자들에게 들이닥친 500여명의
무자비하고 거침없고 잔혹하던 용역깡패에 맞서 맨몸으로 저항하며 내동댕이쳐지던 날.
여자의 몸으로 한강교 철구조물 올라가 1박2일 투쟁 등
안 해본 것 없다 할 정도로 다 해 본 시그투쟁이 결국 법관들에 의해 운명의 명암이 가려질
숙명의 날이 온 것이기에
나는 5년 전 삼미특수강 동지들의 처절했던 악몽에 씨달리지 않을 수 없었답니다.

그날 나는 허영구 부위원장 면회를 하면서도
박민 국장 면회를 하면서도
국회앞 로드맵 분쇄 결의대회 현장에서도
후끈거리는 얼굴, 타들어가는 목젖, 터질 듯 부풀어 오르는 가슴,
쥐어 짜는 흔들림으로 기다렸답니다.
헌데, 애간장을 녹이듯 소식은 오지 않았지요.
그렇다고 전화도 할 수 없고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지요.

그때 4시 무렵 간단한 한 줄의 문자메세지가 왔습니다.
윤민례 지회장이었지요
"시그네틱스 노동조합 승소"
다시 보고 또 다시 보고
확실하다싶어 그제사 전화를 걸었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확인사살을 해야겠기에….
"부위원장님, 고맙습니다. 승소했습니다."
시그 동지들은 아직도 나를 부위원장이라 부릅니다.
목이 메였습니다.
긴장이 풀렸습니다.
마음 속으로 만세를 불렀습니다.
완전히 승리한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시작의 계기를 사투끝에 동지들이 만들었기에.

간부들의 복직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점,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복직을 통해서 조직을 재정비하고 먼저 복직을 이룬 동지들이
이제부터 간부들의 복직을 위해 싸워줄 것을 믿기 때문에 나는 동지들이 자랑스럽습니다.

5년이 넘는 그 긴 세월을 견디고 투쟁하며 오늘을 새롭게 시작해준 시그 동지들!
동지들께 나는 이렇게 또 한수 배우고 오늘을 살아가려 합니다.
동지들께서도 이제부터 자만하지 말고 자기 이기에 매몰하지 말고 처음 함께 시작했던 것처럼
버텨주고 버팀목 자청하며 함께 승리하는 그날까지 단결하여 승리하십시요.
또한 그동안 동지들과 연대했던 수많은 연대조직과 동지들 뜻에 따라 받은 그 이상으로
힘들어 하고 어려워 하는 동지들 곁에 늘 시그 동지들이 함께 하길 바랍니다.

시그 동지들! 사랑합니다. 참으로 고맙습니다. 그리고 자랑스럽습니다.

2002년 12월 24일
함께하는 노동자 이석행
 
<매일노동뉴스> 2006년 12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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