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 25일자에 실린 김태일 민주노총 사무총장의 특별기고 '9·11 야합의 전말을 공개한다'에 대해 한국노총 백헌기 사무총장이 반박의 글을 보내 왔다. <편집자주>


바쁜 시간을 쪼개 김태일 사무총장의 글을 읽어보았다. “야합의 전말을 공개한다”는 선정적인 제목을 달긴 했지만, 정작 내용을 보니 “야합을 막지 못한 책임이 야합보다 더 크냐?”며 민주노총 지도부에 가해지고 있는 각종 비난에 대해 “억울하다”고 항변하고 있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총파업을 준비하고 있는 상황이라 사정이 다급하긴 했겠지만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는 태도에 안쓰러움까지 느낀다. 그러나 워낙 사실과 다른 내용도 많고 황당한 논리와 주장으로 가득 차 있어 한국노총의 입장을 밝히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민주노총이 노사정 합의를 “야합”이라고 혼자 비난하면서 총파업을 통해 노사정 합의안에 따른 입법을 저지하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내부의 분란을 외부와의 전쟁을 통해 해결하려는 전형적인 수법에 불과하다. 아울러 대체근로와 부당해고에 대한 벌칙조항 삭제 등 자신들이 협상과정에서 이미 동의했던 내용들을 번복하면서 책임에서 벗어나려는 얄팍한 술책에 불과하다. 더구나 아울러 이번 합의에 포함된 미조직 영세사업장 노동자 보호를 위한 새로운 추가 조항들, 즉 서면 근로계약 확대와 서면 해고통보 의무화, 정리해고 시 재고용 의무화 등을 포기하겠다는 무책임한 태도일 뿐이다.

누가 오지 말라고 했나?

우선 민주노총의 거짓과 무능, 뻔뻔함부터 짚고 넘어가야겠다. 김태일 사무총장은 로드맵 실무협상을 책임지는 운영위원회의 민주노총쪽 대표였다. 누구보다도 협상의 전 과정을 소상하게 알고 있는 당사자이다. 그런데도 그는 초읽기에 들어간 막바지 협상 당시 병원에 입원해 있었고, 노사정대표자회의의 멤버였던 조준호 위원장은 노동부 장관과 점심을 먹은 뒤 미국으로 출장을 떠나 버렸다. 이해할 수 없는 처사이다.

김태일 총장의 글에 따르면 “정부가 강행입법을 할 것으로 믿고” 그랬다는 것이다. 황당하고 괘씸하기 그지없다. 정부의 강행의지를 읽었다면 ILO 아태총회장에서 철수했던 한국노총처럼 ‘투쟁’을 택했어야 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오히려 그걸 믿고 미국으로 떠났다니 참으로 정신 나간 사람들이다. 중요한 것은 이 말조차 진실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가 알기로는 이상수 장관과 조준호 위원장이 만났던 지난 9월8일 당시 노동부는 노사합의안의 수용 여부에 대해 여전히 결론을 짓지 못한 상태였다. ‘조건부 유예’나 ‘1년 유예 뒤 강행’이라는 카드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노동부 장관은 “정부가 노사합의를 수용한다면 민주노총은 어떻게 나올지” 그게 궁금했을 것이다. 이에 민주노총은 “정부 입법안을 강행하면 총파업으로 맞설 수밖에 없고, 노사합의를 수용하는 것에는 반대할 수밖에 없다”고 했을 것이다. 결국 해석은 노동부장관의 몫이었겠지만, 양대노총과 사용자단체가 모두 반대하는 정부 입법안 강행보다는 차라리 노사합의안을 수용하는 것이 전체적으로는 ‘덜 나쁜’ 결정이라고 판단했을 수 있다. 더구나 마지막 순간에 임박해서 대표자가 외국 출장을 나간다니 이를 ‘기권’으로 해석할 여지도 충분했다. 여하튼 어느 쪽의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을지는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겠다.

또 하나, 9·11 합의 당일 민주노총을 배제했다고 주장하는데, 주최쪽이 민주노총에 공문으로 알리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노총도 공문으로 연락받은 바 없고 민주노총도 회의가 열린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연락이 없는데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놓고 저울질하고 있었을 것이다. 당시 한국노총은 민주노총쪽에 이렇게 말했다. “민주노총이 반대 주장만 펴고 있는데 우리가 먼저 ‘민주노총이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할 입장은 못 된다. 다만 정상적인 회의 개최를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한다면 그런 민주노총의 입장은 전해줄 수 있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알듯 모를 듯 애매한 불만만 터뜨렸고, 결국 산하 조직원들을 보내 이용득 위원장을 건물 밖에서 기다렸다가 집단 폭행했다. 민주노총은 자신들을 배제하고 밀실에서 야합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노사정위 건물에는 밀실도 없거니와 민주노총 대표자가 조준호 위원장을 대리해서 참석할 의지가 있었다면 충분히 걸어올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한국노총이 걷어내면 받을 수 있다"

이제는 민주노총이 협상과정에서 이미 합의하거나 동의했던 부분에 대해서 밝히겠다. 상대적으로 덜 첨예했던 주제부터 건드리겠다.

8월초 실무협상 대표들은 노사협의회 근로자위원 선출방식을 현행대로 유지하기로 이미 합의한 바 있다. 그러나 8월26일 열린 대표자회의에서 민주노총은 이를 동의하기 어렵다며 입장을 바꿨고 “다음 회의에서는 동의해줄 수 있다”는 이상한 궤변을 늘어놓았다.

다음으로 부당해고에 대한 벌칙조항 삭제 문제이다. 노사합의가 발표된 9월2일 열린 대표자회의에서 노사정은 기존의 벌칙조항을 삭제하는 대신 구제명령 불이행 시 벌칙조항을 신설하고 이행강제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하는 방향으로 의견을 모아나가고 있었다. 민주노총은 현행 벌칙조항이 실효성이 없다는 정부쪽 주장에 대체로 동의하면서 “다만 정리해고자 재고용 의무와 인수합병 시 고용승계 의무가 받아들여진다면 패키지로 수용할 수 있다”는 공식 입장을 밝혔다.


결과는 어떠했는가? 사용자쪽 대표가 극구 반대하던 ‘정리해고 재고용 의무’가 한국노총에 의해 관철되지 않았는가? 고용승계 의무조항이 빠졌지만, 민주노총의 실질적인 요구는 ‘대법원 판례 수준’을 법에 명시하자는 것이었기 때문에 완전히 새로운 내용은 아니었다.

가장 논란이 많고 한국노총도 아쉬움이 적지 않은 대체근로 허용 문제도 그렇다. 민주노총은 같은날 대표자회의에서 공익사업에 대한 직권중재를 폐지한다면 필수공익사업장의 범위를 축소하고 필수유지업무와 대체근로 도입에 동의할 수 있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그러나 이틀 뒤 민주노총 실무협상 대표는 갑자기 “대체근로는 무조건 안 된다”는 입장으로 돌아서 협상 당사자들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함부로 말을 바꾸면서 입에 맞는 떡만 골라먹고 책임은 남에게 돌리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당초 한국노총은 철도와 석유정제를 필수공익사업에서 제외하자는 민주노총의 요구를 대변해 왔지만, 그날 이후 더이상 범위 축소를 주장하지 않았다. 요구를 관철하고자 한다면 협상에 와서 말하라는 뜻이었다.

마지막으로 복수노조와 전임자에 대해 사실을 밝히겠다. 이 문제에 관해 민주노총은 솔직하지 못한 태도로 일관했다. 물론 복수노조 전면허용과 전임자 임금 자율보장은 양대노총의 줄기찬 주장이자 요구였다. 그러나 정부는 노조 규모별로 전임자수를 제한하겠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고 경총은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는 무조건 관철돼야 한다는 비타협적이고 완강한 자세를 굽히지 않았다.

이같은 상황 속에서 양대노총은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전임자 임금 금지가 가시화될 경우 노동운동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울 뿐만 아니라, 복수노조의 전면허용 역시 현실적으로 노동자에게 이로운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조직 사업장의 일부 비정규직들에게 어려움이 있을 수 있지만, 전체 노동자의 2~4% 규모에 불과하며(850만 비정규직의 단결권이 박탈된다는 주장은 억지이다.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미조직 사업장에 있는 노동자들의 경우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불문하고 복수노조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자칫 양대노총 산하조직들의 마이너스 경쟁과 어용노조 결성만 확대시킬 우려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지난 8월 중순 양대노총 지도부는 전격 회동을 갖고 이 문제에 관한 협상전략을 집중 논의했다. 당시 민주노총 지도부는 자신들 역시 복수노조 전면 허용에 대한 조직 내부의 반대가 적지 않아 부담이 크다고 토로하면서, “복수노조와 전임자 임금 문제에 대해서는 민주노총도 한국노총과 입장이 똑같지만 조직의 형편상 민주노총이 강하게 주장할 수 없으니 한국노총이 나서서 두 조항을 걷어낸다면(폐지) 받을 수 있다”고 밝혔다. 물론 하나의 조건이 붙어 있었다. 산별교섭의 제도화에 관한 내용이었다.

이에 한국노총은 다양한 각도로 산별교섭 문제의 입법 가능성을 모색했고 심지어 경제5단체와의 합의 과정에서도 이 문제를 풀어보려고 끝까지 노력했다. 결국 무산되긴 했지만 한국노총 지도부로서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고 자임할 수 있다. 그런데도 민주노총은 ‘야합’이나 ‘노동자 권리를 팔아먹었다’느니 하면서 망발과 욕지거리를 서슴지 않고 있으니 가증스럽고 통탄할 노릇이다.

다시 말하지만 노사정 합의에서 민주노총은 배제된 것이 아니다. 민주노총을 참여시키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온갖 협상의제들을 수용해야 했다. 추가의제들 가운데 특수고용 노동자 문제를 제외하고는 모두 민주노총이 억지를 부려 협상의제로 채택된 것들이다. 그런데도 민주노총은 하나도 책임지지 않고 총파업에만 매달리고 있다. 산하 조직들에게 생색만 내고 협상은 방치하는 것이 민주노총 방식이다. 한국노총은 그동안 이런 민주노총의 고질병에 대해 정부나 경영계가 ‘신뢰하지 못할 집단’이라고 비난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한국노총이 아니라 노동조합 할아버지라도 민주노총의 주장과 요구를 신뢰할 수 없게 됐다는 점을 냉철하게 반성해야 한다.

민주노총이 로드맵 협상에 끝까지 참여할 생각이 있었다면 솔직하게 조직 현실과 협상 상대방의 입장 등을 감안했어야 한다. 교칙 위반을 밥먹듯 하고 맘대로 결석해놓고 이제 와서 “졸업장 안 준다”고 유리창을 부수는 것은 철부지들이나 하는 행동이다.

노사관계 로드맵에 관한 노사정 합의에도 불구하고 노사정 당사자 누구도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또한 노사정간 불가피한 선택이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제라도 노사정 합의대로 법개정이 될 수 있도록 총력을 기울이고 복수노조 시대에 대비한 노동운동 방침과 전임자 임금을 위한 노조재정자립 방안 강구에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에게 다시 한번 주어진 3년이란 시간을 결코 길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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