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가 풍미하고 있는 시대에 대안적인 논의들이 여러 각도에서 진행되고 있다. 지난 14일 이화여대 인문관에서 개최된 ‘제3회 맑스 코뮤날레 2차 워크숍’도 이런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다.

이날 ‘케인즈주의에 대한 맑스주의적 비판’이란 글을 발표한 김수행 서울대 교수(경제학)는 맑스적 입장에서 케인즈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도, 케인즈의 ‘불완전 고용’ 개념과 ‘자유시장 만능주의’에 대한 비판은 맑스주의자들이 참고해야 될 것이라고 충고했다. 김 교수가 제기한 문제를 중심으로 케인즈와 맑스의 현재적 의미를 추출해본다. <편집자 주>


한국 사회는 현재 한미FTA(자유무역협정), 북한 핵실험 등으로 파생된 한반도 관계 등으로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이 시점에서 ‘장기적 전망’과 관련된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이 맑스 코뮤날레 2차 워크숍의 개최 배경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는 국가의 개입을 강조한 케인즈주의가 지배적 학문으로 자리 잡고,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케인즈주의를 국가이데올로기로 채택했다. 그러나 1975년 이후 자본주의가 불황에 빠지면서 신자유주의가 풍미하는 시대가 도래 했다.

이에 대해 사회를 맡은 김세균 서울대 교수(정치학)는 “자본주의가 공황에 빠지면서 케인즈주의는 ‘죽은 개’ 취급을 당했으며, 최근 신자유주의의 문제점이 파생되면서 다시 대안으로 케인즈주의가 재부각되고 있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이에 따라, 케인즈주의의 실효성을 본격적으로 따져봐야 할 시기라는 게 그의 진단이다.

그는 또한 맑스 코뮤날레의 현재적 의미는 ‘현실에 개입’하는 투쟁과 ‘장기적 전망’의 관계를 묶어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수요부족으로 불황에 빠진다? 케인즈 자의적 생각”

김수행 교수는 케인즈가 자본주의 사회의 구성원을 기본적으로 소비자, 투기꾼, 기업가로 구분하고, 장래의 불확실성에 직면한 구성원들의 ‘자율적인 심리와 행동의 변화’에서 경제의 역동성과 경기변동을 설명하려 했다고 소개했다. 반면, 맑스는 기본적으로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으로 자본주의 사회가 나뉘어 있으며, 이 계급들의 심리와 행동의 자율성은 자본의 이윤추구욕이나 가치증식욕에 의해 제약을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의 입장은 맑스처럼 노-자 갈등을 부각시키는 것이 더 현실설명력이 있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자본가는 인간으로서 인류애, 사치욕, 동정 등을 갖지만 노동자를 착취하여 자본의 가치를 증식시키지 않는다면 자본가로 부를 수 없고,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가 계급에게 팔아 자본가 계급의 지휘 아래서 잉여노동을 해야만 먹고 살 수 있어 항상 자본가 계급과 대립하고 투쟁하기 때문에 더 정확하다는 설명이다.

이런 기본적인 차이점을 중심으로 김 교수는 케인즈의 유효수요이론을 비판했다. 유효수요이론은 소비자, 투기꾼, 기업가의 개인주의에 맡겨둘 경우 소비와 투자는 완전고용을 달성하는 규모에 도달하지 않기 때문에 비자발적 실업이 생기고, 물적 자원들이 유휴상태에 빠지며, 이에 따라 제3자인 국가가 개입해 소비와 투자를 증대시켜야 실업이 제거된다는 이론이다.

김 교수는 “케인즈는 결국 수요부족 때문에 자본주의 경제는 불황에 빠진다고 봤으나 이런 생각은 자의적인 생각이라고 지적하고 싶다”며 “국가가 조세정책, 국채발행 등의 정책을 구사해 완전고용을 달성하라는 케인즈의 ‘일반이론’은 기본적으로 국가가 사회이익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국가는 ‘사회이익’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 김 교수의 지론이다.

이와 함께, 투자와 관련해서도 맑스의 이론이 더욱 정확하다는 것이 김 교수의 지적이다. 그는 “기업가는 장래 이윤 전망이 비관적이면 투자를 중단한다는 것이 케인즈의 입장인 반면, 맑스는 기업가가 ‘끊임없이’ 투자에 몰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며 “현재와 같은 불황기에도 기업들은 낮은 임금수준으로 수많은 노동자들을 고용할 수 있는데도 노동절약적인 신기술을 착실히 도입하고 있는 것은 상품의 단위가격을 낮춰 무한경쟁에서 시장점유율을 높이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맑스의 이론이 더 정확하다”고 지적했다.

“국가를 강조하는 것은 ‘국가 물신주의’”

김 교수는 또 케인즈가 자유방임 시장주의를 배척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정도로 국가물신주의에 빠졌다고 지적했다. 특히, 케인즈주의자들이 민중에 대한 관심이 없는 채 국가의 개입을 주장했기 때문에 파시즘의 경제정책을 높게 평가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파시즘 하에서 국가가 경제전체를 장악해 주도해 나가는 것과 관련해, 케인즈는 히틀러가 이것을 잘했다고 그의 저서인 <일반이론>에서 지적하고 있다”며 “대불황기였던 1929~30년에 영국 재경부의 차관으로 있던 케인즈의 친구 모슬리는 케인즈적인 불황대책을 정부에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영국파시스트당을 만들었다”고 소개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한국에서 지난 1997년 12월 공황이 폭발하자 IMF(국제통화기금)와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은 ‘국가 개입을 강조한 아시아모델’ 때문이라고 지적했으나, 케인즈주의자들은 이와는 달리 ‘국가 개입을 강조한 아시아모델이 붕괴됐기 때문’이라고 지적했음을 상기시켰다.

이와 함께 김 교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관한 견해와 관련해, 케인즈는 주식회사의 발달에 의해 소유와 경영이 분리돼 ‘경영자는 공공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것으로 파악했으나, 맑스는 전혀 그렇게 보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가 보기에 케인즈는 ‘치부욕과 개인주의’가 자본주의체제의 특징이며, 자본주의체제의 결점은 ‘실업과 소득분배의 불평등’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또한 자본주의의 장래는 주식회사나 국가에 의해 치부욕과 개인주의가 일정한 규율과 제한을 받을 것으로 본다. 반면, 맑스는 자본주의 체제의 기본동력은 자본의 가치증식과 그것을 둘러싼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계급투쟁으로 봤다.

김 교수는 “자본주의 체제는 생산력을 무한정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생산력이 기존의 생산관계와 모순하게 돼 주기적인 공황을 맞이하고, 이에 따라 생산력을 낭비하게 되고 생산의 사회화가 전개됨에 따라 궁극적으로 생산자들의 연합이 경제운영 전체를 장악하면서 ‘공동소유, 공동노동, 공동분배’를 실현하게 될 것으로 맑스는 봤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맑스의 저서 <자본론> 32장을 인용해 “맑스는 결국 노동자계급은 자본의 억압에서 해방되고 자본가계급은 가치증식욕으로부터 해방돼 노동해방과 인간해방의 새로운 세계가 나타날 것으로 봤다”고 덧붙였다.

거래소시장과 코스닥시장을 보면, 주식회사와 관련된 투기와 사기가 분명히 행해지고 있으며, 단기적 수익 획득에 몰두하는 주주자본주의에서는 회계를 조작해야 될 유혹이 더 커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현실에서는 맑스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는 게 김 교수의 주장이다. 특히 “주식회사가 아무리 소유와 경영이 분리돼도 여전히 가치증식을 최고의 목표로 삼는 자본주의 기업일 수밖에 없다”고 그는 강조했다.

이밖에 케인즈는 국제거래, 문호개방 등이 1920~30년대 경제공황의 원인이라고 봤기 때문에 ‘국민적 자급자족’ 형태가 되면 국가가 문제해결에 나설 수 있고, 이는 세계 평화에 기여할 것이라고 봤으나, 맑스는 자본의 가치증식욕은 국경을 무너뜨리면서 한편으론 문명을 세계로 전파하고, 다른 한편 식민지와 종속국의 인민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으로 봤다고 김 교수는 소개했다. 

“국가는 기본적으로 자본가 계급 이익 옹호”
김수행 교수는 케인즈와 맑스가 국가를 다른 관점에서 보고 있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케인즈는 실업과 소득분배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것이 국가의 당연한 도리이며, ‘국가는 사회적 이익 또는 공공의 이익을 추구’한다고 봤다. 이에 따라, 만약 국가가 실업과 소득분배의 불평등 해결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케인즈는 정부의 각 부처, 의회, 중앙은행 등 국가기구 구성원들이 가지고 있는 ‘낡은 사상’ 때문인 것으로 진단한다는 게 김 교수의 설명이다. 이와 같은 진단 때문에 케인즈는 무식한 유권자들에 의해 선출된 의회나 정부보다는 ‘그 위에 지식인들이 서서’ 문제해결에 나서야 한다는 처방을 제시한다고 그는 덧붙였다.


이에 반해 맑스는 국가가 자본가계급으로부터 ‘상대적인 자율성’을 가지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자본가계급의 이익에 봉사하는 위원회’로 본다. 김 교수는 “맑스는 대통령, 국무총리, 국회의원, 대법원장, 검찰총장, 경찰국장, 금융감독원장, 국정원장 등이 국가기구를 통해 국가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외형적으로는 국가 엘리트가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지배계급인 자본가 계급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라며 “국가가 자본가계급으로부터 상대적 자율성을 가지는 것은 노동자 계급과 자본가계급이 충돌해 혼란이 지속될 경우 자본주의 사회를 유지, 옹호할 목적으로 자본가계급이 노동자계급에게 일정한 양보를 할 수 있도록 개입하는 경우”라고 설명했다.


이어 “국가가 근로기준법을 제정해 노동일수를 제한하고, 노동조건 개선을 자본가계급에게 명령하고, 사회보장제도를 실시하는 것은 국가가 제3자의 중립적 입장을 취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를 유지해야 한다는 자본가적 입장에서 자본가계급의 ‘단기적 이익’을 물리치고 자율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을 가리킨다”고 덧붙였다.


이에 따라, 케인즈처럼 국가가 항상 자본주의의 뚜렷한 결점인 실업과 소득분배의 불평등을 해소하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란 게 그의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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