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조운동 20년을 코앞에 둔 지금, 민주노조들은 고난의 가시밭길을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다. 하나같이 처절한 사연들뿐이다.

포항건설노조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를 교섭하자고 요구하였는데 돌아온 것은 공권력 살인과 백명에 가까운 조합원 구속이었다. 철도노조 KTX 여승무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200일을 넘기는 투쟁에도 다시 지부장은 삭발하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명백한 불법파견, 부당노동행위인데도 그렇다. 파업 200일을 넘기고 있는 대학노조 한국외국어대지부나 전교조의 성과급투쟁, 그리고 여타 쟁의 사업장들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정부의 집중적인 탄압을 받고 있는 전국공무원노조의 사정은 더 딱하다.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특별한 법’에 따르지 않는다고 단결행위 자체를 불법으로 내모는 탄압 때문이다. 노사정대표자회의에서 공무원노동기본권을 재론하겠다는 정부의 약속은 역시나 지켜지지 않았다. 이후 19세기 단결금지법 시대의 탄압이 가중되고 있다.

민주노총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난 9월 11일 ‘노사관계선진화방안’에 관한 ‘역사적인’ 노사정 합의가 좋은 사례다. 민주노총은 배제되었고 참여정부의 ‘참여’는 다시금 기만이었음이 드러났다. ‘참가전술’을 통해 상황의 반전을 꾀했던 지도부로서는 허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조직혁신이라는 중대한 과제를 다루는 대의원대회는 두차례나 성원부족으로 무기력하게 끝나고 말았다.

한편, 국가 자본과 손을 맞잡고 해외자본 투자 유치를 내놓고 선언하거나 재벌정당의 정치적 들러리를 자처하는 일들도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다. 노동운동의 이름으로 해선 안 될 일들이 거리낌 없이 행해지고 있다.

요컨대 지금 민주노조운동은 수세기의 깊은 심연으로 빠져드는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상황을 반전시킬 투쟁동력도, 전술적 방안도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는 막연한 두려움이 널리 유포되어 있는 점이다.

그간 위기론을 주장해 온 필자이지만 지나치게 비관적일 필요는 없지 않느냐고 제안하고 싶다. 어둠이 깊어야 새벽이 가까워진다는 평범한 진리, 노동운동의 가장 기초적인 원리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난 6월 금속연맹의 산별노조 전환투표 성공은 전환점이 임박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노동대중의 각성이 정파들의 분열도, 대기업 이기주의도 뛰어넘는 힘으로 솟아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산별노조 전환은 여전히 출발선을 크게 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기업 울타리를 허물고 비정규직 중소영세 하청노동자들이 연대하지 않으면 정규직들의 미래, 민주노조의 미래가 없다는 대중적 각성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다른 사례로는 9·11 노사정 합의를 들 수 있다. 기업 단위 복수노조 금지가 계속되고 공익사업장의 대체노동이 합법화되는 등 결코 바람직한 합의라고 할 수는 없지만 민주노조운동의 발전과정에서 금번 합의는 역설적이지만 두가지 긍정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먼저 사정 3자 합의주의에 대해 노동대중이 최종적인 판단을 할 수 있게 된 점이다. 이 문제는 지난 10년 동안 민주노조운동의 내부동력을 끊임없이 잠식하였던 핵심 사안이었다. 따라서 노사정 대화나 참가의 가능성과 한계가 명료하게 정리된 것은 커다란 의미를 갖는 일이었다. 연관된 두번째 요소는 한국노총 문제이다. 이 역시 ‘역사적인’ 합의 속에서 대중적으로 해소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위기를 넘어서는 일은 쉽지 않다. 당장 눈앞에 해결방안이 없으므로 대체로 그냥 버틸 수밖에 없다. 그런데 다행히 우리에게는 좌표가 있다. 자주적 민주적 활동, 계급적 연대의 확장이라는 좌표를 갖고 원칙적으로 대응해 나갈 밖에 길이 없다. 20년 동안 지켜 온 민주노조의 활동방식과 역사, 그것이 우리 좌표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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