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난 9월 19일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 막판에 조직혁신안을 논의할 때 조금 어리둥절한 경험을 했다.

사연인즉슨 이렇다. 집행부가 ‘임원 직선안’에 대해 안건 설명과 질의 응답을 마친 뒤, 대대는 정회에 들어갔고 그동안 조준호 위원장이 각 연맹 대표자들을 불러모아 ‘회의 진행’을 상의했다. 대회를 속개한 뒤 위원장이 토론할 내용이 있느냐고 묻길래 나는 마이크 앞으로 나아가서 "수정동의안이 있다. 대의원 직선도 추가하자"고 발언했다. 이 대의원 직선 추가안이 ‘수정동의안’에 속하는지 유권해석을 묻는 발언이 있은 뒤, 위원장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중도에 대회장을 빠져나간 대의원들 때문에) 지금 ‘의사정족수 과반 미달’ 위험이 짙은데, 수정안을 묻게 되면 의사정족수를 확인해야 하고, 이것을 확인하는 순간 대회가 유회된다. 반면에 이의가 없으면 (이의가 없으면? 확인도 거치지 않고?) 원안을 확정지어서 규약개정을 묻는 투표에 들어갈 수 있다(투표에 시간이 걸리므로 그동안 최대한 동원령을 때려서 의사정족수를 채울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대의원 직선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당장 시행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뺀 것이다. 그러니 수정안 발의자께서는 다음을 기약하고 우선 임원 직선이라도 실현되도록 그 수정안을 철회해줄 용의가 없느냐?”

그 말을 수긍해줘도 좋은지 여부를 불과 1~2초 안에 판단해야 하는, 어리둥절해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단순하게 한가지만 생각해 보았다. “대의원 직선안은 지금 토론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그런 것이냐?” 답은 명확하게 전자(前者)라고 생각하여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안 돼!’ 하고 팔을 내저었다.

그런데 유회가 선포된 뒤, 내가 조금 놀랐던 것은 ‘정 아무개가 똥고집만 부리지 않았어도 조직 혁신이 시동을 걸었을 텐데…’ 하고 눈을 흘기는 사람이 꽤 있었다는 사실이다. 집행부 사람들의 눈흘김이야 ‘그러려니’ 여길 수도 있으나, 주변의 대의원 몇몇에게서 그런 반응을 듣고는 웃음을 거두어야 했다. 이 글은 그에 대한 변론과 제안이다.


‘조직혁신 회의론’을 누르려면 대의원 직선을!

첫째로 묻는다. ‘유회’ 책임은 정 아무개에게도 있는가? 이 논리에 따르면 ‘회의 성사’를 위해 소수 의견자들은 ‘표현의 권리’를 때로는 스스로 포기해야 한다. “지금은 임원 직선밖에 할 수 없다”는 논리가 완벽하게 옳을 때라야 그러한 ‘다수자의 독재’ 또는 ‘꼼수 회의 진행’이 그나마 말이 된다. 그런데 과연 그 단계론이 완벽하게 옳은가?

원래 어떤 단체의 임원은 직선으로도 간선으로도 뽑을 수 있는 반면, 언로(言路) 확보의 기본 장치인 대의원은 반드시 직선으로 뽑아야 한다. 국가 행정권력의 수장은 직접으로도 간접으로도 뽑지만 의회 의원들은 반드시 직선으로 뽑지 않는가? 특히 여러 연맹체들의 연합 기구라는 조직의 성격에 비추어, 예전에 레이버투데이에 실렸던 노광표씨의 ‘임원 직선, 문제 있다’는 주장도 얼마쯤은 일리가 있고, 그런 뜻에서 ‘집단지도체제로 가자’는 정윤광씨의 주장에도 귀 기울여 봄직하다.

물론 나는 민주노총이 80만 조합원에게 ‘동떨어진 존재’로 머물러 있는 운동 현실의 타개가 시급하다는 뜻에서 ‘임원 직선’의 전술적 의의를 인정하지만, 그것이 꼭 진선진미(盡善盡美)한 결과만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임원 직선이 바람직한 결과를 낳기 위해서도 대의원 직선 등의 보완 장치가 필수다.

현실을 살피면 더 분명해진다. 올해 민주노총 대의원대회는 중도 유회되거나 심지어 참가자 부족으로 아예 열리지도 못한 일이 무려 네 차례나 일어났다. ‘간간선’으로 뽑혀 거수기 노릇이나 해 온 대의원들이 태반이어서 이렇게 대대가 ‘식물 상태’로 빠져든 것 아닌가?

현 집행부는 ‘현실 여건’을 들어 ‘대의원 직선’이 어렵다고 변명하는데 도통 이해하기 어렵다. 가령 조합원 9만명이 전국에 흩어져 있는 거대 조직, 전교조가 자기 대의원들을 거뜬히 선출해 왔는데 왜 그보다 훨씬 적은 숫자인 ‘민주노총 파견대의원’을 직선으로 뽑지 못하는가? 혹시나 각 연맹이 민주노총에 보고하는 ‘조직원 숫자’와 ‘실제 조직원 수’ 간의 격차가 문제로 드러날까봐 노심초사 하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민주노총의 체질을 강화하기 위해서도 ‘조직 혁신’은 더 절실해진다.

'식물 상태' 벗어나려면 대대를 열라!

아무튼 지난 대의원대회는 ‘조직 혁신’을 거론만 하고 접어버렸다. 그 아쉬움을 달래는 화살은 애꿎게도 고집쟁이 정 아무개에게 날아왔다. 대의원대회 직후 온라인매체 ‘레디앙’에 실린 한석호씨의 글에 따르면 “어느 정파도 일부러 '회의장 철수'를 지령한 일이 없다”고 하니, 그의 말이 타당하다면 정 아무개라도 화풀이의 대상이 되어주는 것이 좋겠다. 그래서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처지에서 제안을 하나 하겠는데, 사실 이것은 아주 간단한 해결책이다. “대의원대회를 다시 열라!”

민주노총 집행부는 그날 대의원대회에서 “오늘 결정하지 못하면 다음 선거에서 ‘직선’을 실행하기는 일정상 어렵다”고 설명했고, 이 조건을 ‘철의 규율’처럼 생각한 몇몇 대의원들이 내게 눈을 흘겼더랬다.

그러나 세상에 철의 규칙이 어디 있는가. 다음 집행부의 출범을 두어달 늦추면 되는 일이고, 민주노총이 전시 상황에 돌입한 군부대가 아닌데 왜 ‘각 연맹 대표의 집단지도체제’로 몇달을 운영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대의원들이 서너 시간의 토론을 견디지 못하고 집에 가버리는 지금 같은 ‘무관심 상태’를 벗어나려면 조직 혁신이 더없이 긴요해졌다. 그렇다면 다음 집행부의 출범을 몇달 늦추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비상한 사태에는 비상하게 대처하는 것이 바른 길이요, 그래서 엉뚱한 사람이 덮어쓴 누명도 벗겨줘야 할 것 아닌가.

현 집행부는 조직 문제와 관련해 처음에 어정쩡한 ‘선거인단’ 제도를 내밀었다. ‘비정규 할당제’ 신설도 처음엔 관심 두지 않았다. 그러다가 ‘임원 직선’과 ‘비정규 할당’을 내걸게 된 것은 진전이라면 진전이다. 그러나 그들이 정말로 혁신의 진정성을 품고 있다면 지금이라도 ‘혁신안’을 더 혁신하여 대의원 직선을 추가하고, 중소영세 사업장과 이주 노동자들에게로 ‘할당제’를 넓힐 일이다. 그래서 설득력을 높여야 ‘꼭 임원 직선을 해야 하나?’ 또는 ‘지금같이 현안이 산적한 시기에 꼭 조직혁신을 서둘러야 하나?’ 하는 회의론들을 달랜다.

하지만 현 집행부가 ‘대의원 직선’을 여전히 도리질하겠다면 그렇게 하라. 판단은 대의원들이 할 터이니. 그런데 그들 논리를 따른다면 ‘임원 직선’이 더더욱 중요해진다. 대의원대회가 유회를 거듭하는데도 (대의원제도) 혁신이 불가능하다면 ‘임원 직선’이라도 실행해야 그나마 조직 내 말길과 숨구멍을 틔우지 않겠는가.

현 집행부가 조직혁신에 숱한 노력을 다 기울였으면서, ‘대대 유회’를 구실로 이를 한갓 ‘없었던 일’로 치부한다면 어떻게든 새 바람을 바라는 조합원들을 실망의 늪에 빠뜨려버린다. 밑에서 들이민 요구가 따가워서 한때 ‘시늉’만 벌였다는 뜻이니까.

민주노총이 떠안은 벅찬 과제들에 견준다면 ‘조직 혁신’은 삶은 호박 자르듯 쉬운 일이다. 그렇다면 그것부터 잘라라. 그래서 민주노총의 칼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무기력감이라도 떨쳐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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